베이징올림픽이 어느덧 1주일을 넘어간다. 한국선수단의 연이은 승전보로 북가주 등 미주한인들도 모처럼 신이 난 것 같다.
나라고 예외가 아니다. 올림픽 아니라 자잘한 동네스포츠도 맛나게 보는 편인데, 날이면 날마다 누구나 아무나 하는 것도 아니고 4년에 한번 세계 각국에서 고르고 고른 선수들이 벌이는 대제전을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시차도 시차려니와 서울에서 파견된 대규모 특별취재단이 워낙 시시콜콜한 것까지 챙겨주니 기사 부담도 별로 없이 맘편하게 즐기고 있다.
그런데 올림픽 같은 굵직한 국제스포츠잔치가 열리면, 특히 한국선수가 좋은 성적을 내면, 그래서 기분이 한껏 고양될 때면, 거의 예외없이 그 맛을 앗아가는 게 몇 있다. 더러 예외는 있지만 대개 한국선수가 금메달을 딴 직후에 그 선수에게 연결되는 대통령의 축하전화다.
물론 그 자체를 나무랄 건 없다. 보기에도 좋고 듣기에도 좋다. 그러나 축전이면 족할텐데, 경기직후 축하전화는 아무래도 거슬린다. 숨막히는 승부를 막 마치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선수와 꼭 그렇게 진한 전화통화를 해야 하는지, 그거야말로 선수를 정말 귀찮게 하는 건 아닌지, 하도 여러번 그런 풍경을 보다보니 이제는 저 양반이 정말 축하를 하려는 게 아니라 ‘그 통에 정치하고 있네’ 하는 비아냥이 절로 든다.
TV로만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실제로 그런 장면을 보고는 대통령 전화에 대한 짜증은 더욱 깊어졌다. 1994년 10월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마라톤 경기 직후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우승자 황영조는 히로시마에서 일본이 대항마로 내세운 하야타의 추격을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어느 한 종목 쉬운 게 없겠지만, 특히 마라톤은 인간한계에 도전하는 극한종목으로 인식돼 있다. 그냥 걷기도 벅찬42.195km(약 26마일)를 쉼없이 치열하게 다퉈가며 뛴다는 건 그냥 상상만 해도 숨이 차는 듯하다. 몇마일이라도 뛰어본 사람은 그 고통을 알 것이다. 마라톤의 달인, 그래서 마라톤을 무슨 식은 죽 먹듯이 하는 것 같은 황영조 자신이 그 고통을 잘 묘사했다, 바르셀로나올림픽 레이스에서 고통이 엄습할 때면 마주 오는 버스에 뛰어들고 싶었다고.
그는 96년 봄 동아마라톤(애틀랜타올림픽 대표선발전)을 앞두고 가진 회견에서도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가하니까 뛰는 거지 다음에 또 뛴다고 생각하면 못뛴다”는 말로 마라톤고통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히로시마 레이스를 막 끝낸 그가 한숨도 고르기 전에 그에게 박상하 선수단장이 휴대전화를 건넸다. 황영조는 헐떡거리며 “예 예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예 예” 할 때마다 그 파김치가된 몸으로 허리까지 굽혀가면서. 김영삼 대통령의 축하전화였다. 구한말 조선땅에 전화가 처음 들어왔을 때 구중궁궐 황제의 전화를 신하들이 의관을 정제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받았다는 풍경과 포개지면서 저놈의 촌스런 전화놀음은 언제 사라지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또하나 꼴불견은 성적(메달)에 국가와 민족의 흥망성쇠가 걸린 듯한 호들갑이다. 살맛나는 것이라곤 귀한 장삼이사들이 선술집에서 거리에서 그늘밑에서 한국선수단의 활약을 안주삼아 날 새는 줄 모르는 것쯤이야 능히 이해된다. 그러나 중계방송이나 현장발 기사들은 너무나 자주 너무나 심하게 오버한다. 이번에 한국수영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박태환 선수가 민족적 국가적 긍지에 가득찬 기자들의 질문에 맥빠진다 싶을 정도로 가볍게 응수한 것이 차라리 대견하게 느껴질 정도다. 하기야 어떤 언론매체는, 박태환으로부터 판에 박힌 교과서적 모범답안을 못들어 ‘박태환 떠받들기’ 의도에 차질이 생겼는지, 미 언론에 언급된 박태환의 캐주얼한 어법을 들어 박태한의 말솜씨에 미국언론도 어쨌다는 등 갖다붙일 수 있는 건 죄다 갖다붙였다.
이번 베이징올림픽이 메달색깔에 따라 국가의 등급이나 민족의 품위가 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걸 보다 더 진하게 눈치채는 올림픽이 됐으면 좋겠다. 지금 아니면 언제 그러랴 싶게 실컷 대한민국 응원물결에 몸을 싣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것 때문에 올림픽 보기의 참맛까지 가려버리는 건 손해라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특히 정치인들이나 행정가들이 무슨 장마통에 몰래 오물을 갖다 버리듯이 그 틈을 타 고약한 짓을 하는 것도 모자라 응큼한 계산으로 뻔질나게 얼굴을 들이미는 따위가 좀 줄어드는 올림픽이 됐으면 좋겠다.
<정태수 기자> tsj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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