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리버사이드 한마음 독서 모임’에는 출장 차 미국에 왔다가 귀국길에 잠깐 고모집에 들렸다는 모국의 한 젊고 잘 생긴 청년이 참석해 회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한국의 S기업의 잘 나가는 신입사원이라고 했다.
회원 한 사람이 한 마디 했다. “한국에서 온 젊은 손님의 소감을 잠깐 들어보면 어떨까?…” 한참 머뭇거리던 그는 다시 한번 재촉을 받고서야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사용하고 계시는 말은 분명 한국말은 한국말인데 어딘가 생소하게 들려 아까부터 왜 그럴까 하고 생각중이었습니다. 연변 조선말을 처음 들었을 때 경험했던 그런 생소한 느낌 이라고나 할까요? ” 하고는 회원들의 반응을 조심스럽게 살피는 것이었다.
“아니, 우리가 하는 말이 연변 조선말처럼 생소하게 들린다고?” 모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매일같이 한국어로 방송되는 라디오도 듣고 TV도 시청하고 있는 처지에 우리가 쓰는 한국말이 모국의 그것과 달리 생소할 이유가 전혀 없을 터였다. 침묵을 깬 사람은 이민 연조가 가장 오래된 회원이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한국말은 우리가 한국을 떠나 올 당시의 7, 80년대 한국말일 것이며 자신도 모르게 일상화 된 영어 단어들이 불쑥 불쑥 섞여 나오니 한국에서 온 젊은이의 귀에 이상하게 들리는 것이 당연할 것이라” 했다.
“괜한 말을 했나?” 하는 멋적은 표정을 남긴 채 청년이 자리를 뜨자 한 회원이 “이상한 쪽은 오히려 모국쪽인 것 같다”며 “우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한국어는 먼 훗날 연구대상이 될 소수 언어 아니면 방언으로 남게 될지도 모를 일”이라며 못내 씁쓸한 속내를 내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가끔 모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이상한 말들에 대한 불만을 털어 놓곤 했었던 터였다. 해괴 망측스럽게도 남편을 ‘오빠’라 부르고 한턱 사겠다는 말을 왜 ‘쏜다’라고 하는 지 모르겠다는 식이었다. 인터넷에서 통용되는 말은 알아 차리기도 힘든 것이 수두룩하다며 우리 모두가 이민 떠나 올 당시의 모국에는 분명 그런 말들은 없었다고 서로 확인한 적도 있었기 때문 이다.
그 젊은 청년의 방문은 새삼 언어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한다는 속성을 현실감있게 깨닫게 해 주었으며 바로 그 변화의 현장에 본인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고국에서 멀리 떠나 와 있다는 사실도 함께 느끼게 했다.
이민 1세대가 훌쩍 지난 뒤 우리들 후대의 미주 한인들의 한국어는 어떤 모양일까? 시공을 뛰어 넘는 눈부시게 발전된 정보산업을 염두에 두면 도저히 그럴 것 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혹시라도 인터넷 언어세력에 억눌려 신조어와 더불어 영어와 범벅이 되어 방언 취급도 받기 어려운 혼성 언어로 전락하고 마는 것은 아닐까? 미주 한인들의 한국말도 연변 조선족의 조선말, 러시아를 비롯 구 소련 위성국 등에 흩어져 사는 동포들의 고려말과 같이 되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모국의 한국어도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긴 매한가지다.
70년대 말 스위스 동북쪽 그라우뷘덴 지역을 찾았던 기억이 떠 올랐다. 그라우뷘덴주는 BC 58년 로마 제국의 시저가 지금의 스위스인 헬베티아를 정복한 후 통치수단의 한 방편으로 로마제국의 속주인 라에티아로부터 이주돼 온 후손들이 아직도 그들만의 전통 생활양식과 함께 기원전 당시의 언어인 로망시어를 말하며 대를 이어 살고 있는 곳이다.
스위스는 1938년 1할도 못되는 이들 소수 국민이 사용하고 있는 로망시어를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에 이어 4번째 국어로 헌법에 확정해 놓았다고 했다. 공문서는 물론, 번거로울 정도로 일일이 4개의 언어로 표시된 치즈, 우유병 등 각종 상품 레이블을 보면서 오직 수출과 국가 경제 부흥만이 최고 선이라는 의식화 교육에 잘 훈련된 내게는 자원 보존 못지 않은 높은 차원의 소수언어 보호에 많은 경비를 지출하는 스위스가 조금은 사치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존경심을 억제치 못했던 기억이 있다.
모국어는 한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적 유산의 버팀목이다. 모국에서 불고 있는 영어 몰입교육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범람하는 품위없는 인터넷언어는 어떻게 정화할 것인가? 우리의 고유 언어, 문자에 대한 국어학자의 고민이 보통이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종운
인랜드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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