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을 방문 중이신 매형과 누님에게 여호와의 증인인 우리가 전도를 하려고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누님이 손사래를 치곤 한다는 이야기는 지난주에 썼었다. 누나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음직하다. 성장기의 나의 행실이 개차반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진천 군수를 하셨고 도지사 물망에도 오르셨던 선친께서 워낙 청렴하셨던지 특히 6.25 사변을 전후해서는 끼니 걱정마저 가끔 있던 시절, 누나는 위장이 약해서 위경련을 자주 일으켜 보리밥을 먹을 수 없는 처지였다. 어머님께서는 그를 굶기지 않으시려고 쌀밥 위에 보리밥을 살짝 얹어주는 눈속임을 하시곤 했던 모양인데 내게 발견되기만 하면 “왜 저 x은 쌀밥을 주고 나에게는 꽁보리밥을 주느냐”고 밥상을 발로 차는 등 ㄴ 자로 시작되어 ㄴ 자로 끝나는 욕설까지 입에 담는 개망나니 노릇을 한 게 나였다. 누나에게 울고불고한 기분 나쁜 추억이 남아있을 것이다.
누나가 청주여고를 졸업하고 조흥은행에 취직이 되어 서울로 오게 된 1956년부터 이미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나와 합류하여 셋방살림이 시작되었다. 누나의 월급으로 먹고사는 처지였는데도 나의 행실은 욕만 빼고 역시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예를 들면 당시 미군부대에서 시중으로 유출되던 스팸 햄 한 통을 누나가 가금 사들고 들어오면 누나는 아껴서 조금씩 먹자는 주장이고 나는 당장 다 먹어치우자는 억지로 싸움이 빈번했었다. “내 돈으로 먹고 사는 네가 어찌 나에게 대들 수 있냐”는 누나의 말에 나는 “돈을 벌어서 트럭으로 뿌려주겠다”고 소리를 질렀으니 문자 그대로 배은망덕에 적반하장 격이었다. 셋집이라 자주 집을 옮겨 다녀 몇 년 사이에 열 차례 이상 이사를 한 기억인데 한 번은 창신여고 운동장 축대 밑의 집에 방 둘을 얻고 살고 있었다. 누나가 불안해서 집을 내놓은 상태에 사람들이 보러오면 나는 축대 밑이라 위험하다는 말을 잊지 않고 한다는 사실이 식모에게서 누나에게 보고되면 그게 또 싸움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 누나가 약혼 시절 댄스를 하는 것을 발견하고 누나의 따귀를 올려붙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으니 매형이 관대하신 분이라 용서하셨지만 심각한 죄가 아닐 수 없다.
1957년 서울대 시험에서 낙방하고 외국어대학에 다니게 된 후 기운 가세에 도움이 되려고 직장 찾기에 혈안이 되다시피 된 것도 싸움거리가 되었다. 한국일보, 조선일보 등 공채 시험에 응하기 위해서는 사진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진 값을 달라고 누나에게 졸라대는데 번번이 떨어지는 주제에 사진 값을 달라느냐는 대꾸가 싸움 원인이었다.
1959년 초 누나가 결혼한 직후에 동아일보에서 견습기자 공채가 있었다. 자격요건에 ‘대학졸업자나 동등한 실력을 가진 자’라 되어 있었다. 원서는 누나에게서 사진 값을 빌려 집어넣은 상태에서 휘경동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이사를 도와준 몇 친구와 광화문 부근의 선술집에서 양주를 마시게 되었는데 가짜 양주였던지 배가 참을 수 없게 아프기 시작했다. 내일이 시험날인데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셋집 부근의 조그만 병원에 찾아가서 내일 시험을 꼭 보아야 하니까 주사를 놓아달라고 사정사정했다. 시험날 아픈 배를 참아가면서 시험장인 중앙고등학교로 향했다. 영어, 시사 상식 등 비교적 아는 문제들이 많다고 생각되었다. 작문의 주제는 ‘자화상’이었다 맹장 기운이 있는 가운데 쓰는 글이라서 상당히 처절하고 박진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택시를 타고 김성진 외과로 달려가 맹장 수술을 받았다. 맹장이 곪아 터지기 직전이었단다. 제1차 시험 발표도 아직 입원 중에 본 것으로 기억된다. 선친께서 제2차 면접시험에는 “당가를 타고 가거라”는 내용의 서찰을 보내주셨다. 면접시험 때 최두선 사장이 왜 아직 재학 중인데 기자가 되려느냐 라고 질문하셔서 가난한 처지를 설명했더니 “3만환 월급으로는 어려울 텐데”라고 대답하신 생각이 난다.
좌우지간 서울대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명 가운데 하나로 뽑혀 4월1일부터 견습기자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부모님께서 간신히 부쳐주신 등록금은 수술비로 날아갔기 때문에 학교는 자동휴학이 되었다. 취직한 날로부터 20일도 못 되어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전보가 왔다. 종교 상 제사는 안 지내지만 그 이듬해 4.19 날 최루탄 때문에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내가 가짜 양주를 마시지 않아 맹장염에만 안 걸렸던들 선친께서 좀더 오래 사셨을 것 같은 회한에 사로잡혔었다.
누님, 이제는 개과천선했으니 내 말 좀 들어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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