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존재를 확대해 나가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본성은 경쟁을 통해 표출된다. ‘나무쌓기 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관찰해 보면 이런 성향은 아주 어릴 적부터 나타난다. 3~4세에서는 절반가량이 경쟁의식을 보이다 6~7세가 되면 86%의 아이들에게서 이것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들어갈 때쯤이면 이미 경쟁의식으로 똘똘 뭉쳐진다는 말이다.
경쟁은 인간사회의 속성이다. 승리와 보상을 위해 무한경쟁을 마다하지 않는다. 올림픽이 인류 최대의 이벤트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경쟁의식을 마음껏 원 없이 뿜어낼 수 있는 자리인데다 승리할 경우 확실한 보상이 따르기 때문이다.
올림픽이 겉으로 내세우는 구호는 인류의 평화와 화합이지만 실제로 이 제전을 지배하는 것은 ‘롬바르드 윤리’로 대변되는 승리지상주의이다. 게르만의 일족인 롬바르드족은 6세기 이탈리아를 침범해 자신들의 왕국을 세웠다. 그들은 “승리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것이다”라는 모토를 내세웠다.
프랑스의 쿠베르탕이 근대올림픽을 부활시킬 때만 해도 ‘대중 스포츠의 보급과 장려’라는, 순진하지만 순수한 이념을 내세웠다. 이것이 퇴색되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쿠베르탕은 첫 번째 올림픽이 끝난 후 “나는 올림픽 경기의 영광에 매혹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몇몇 챔피언들을 둘러싸고 벌이는 야단법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내용의 편지를 친구에게 보냈다. 그는 인간에 대한 애정은 있었지만 속성은 잘 몰랐던 것이다.
스포츠는 지난 100년간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 더할 수 없이 야단스럽고도 파워풀한 쌍방향 이벤트로 진화해 왔다. 스포츠의 주체와 객체 간에는 다른 이벤트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적극적 관계가 형성된다. 스포츠의 영웅이 만들어지고 객체들은 이에 흥분한다.
이런 흥분지수를 최고조로 높여 주는 것이 올림픽이다. 경쟁이라는 바탕에 ‘애국심’이라는 주술적 힘이 더해지면 열광은 거의 통제 불능 수준이 된다. ‘우리 선수’ ‘우리나라 팀’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올림픽은 스포츠를 내세우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이벤트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주최국은 주최국대로, 참가국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정치적 계산이 있다. 베이징 올림픽을 중국이 세계의 황제로 즉위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벌이는 수퍼파워 프로젝트로 보는 시각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금메달 40개로 미국을 누르고 1위를 차지하자는 목표에서 이런 정치적 의도가 뚜렷이 읽혀진다. 참가국들로서도 골치 아픈 국내 문제들을 잠시나마 덮어버리고 국민들의 애국심을 한껏 고양시켜 주는 올림픽이 반갑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스포츠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어느 정치인이 “한국인은 토론이 불가능한 민족”이라고 개탄했지만 지금 한국사회는 통합과는 점점 더 거리가 먼 분열의 길로 치닫고 있다. 그나마 치고받으며 싸우던 한국사회가 하나 되는 경우는 국제적 스포츠 이벤트가 열릴 때이다.
월드컵에서 승리하거나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가 금메달을 땄을 때는 한 목소리로 환호한다. 대통령 투표할 때는 후보 출신지를 따져도 ‘우리 선수’가 승전보를 전해올 때는 이런 것 개의치 않는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스포츠를 빼 놓고는 한국사회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기제가 없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올림픽 금메달 하나 제작하는데 드는 돈은 150달러 정도에 불과하다. 이런 금메달 한 개가 한국 선수의 목에 걸릴 때 유형·무형의 가치는 수천만달러에 달한다니, 희소성이 예전 같지는 않아도 금메달에는 물리적 가치를 훨씬 넘어서는 무엇인가 있는 게 분명하다.
시차 때문에 한동안 한인들의 아침잠을 앗아가게 될 베이징 올림픽이 LA 시간으로 8일 새벽 개막된다. 베이징에서 메달 소식이 날아들면 우리 몸에서는 엔돌핀이 돌 것이다. 박태환이 미국 수영의 지존 펠프스를 꺾고 수영에서 사상 첫 금메달이라도 따게 되는 날이면 어깨가 절로 으쓱거리게 되지 않을까. 처지와 생각의 차이도, 일상의 고단함도 잠시 잊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올림픽이 가져다 줄 진통효과는 일시적이고 하나 됨은 반짝 경험이다. 2002년 월드컵 때 모두가 하나 된 듯 했지만 과연 그 후에 사회적 통합이 더 견고해졌는지 의문이다. 이벤트가 가져다주는 효과는 말 그대로 ‘이벤트성 효과’일 뿐이다. 약을 먹어 잠시 콧물증세가 멈췄다고 해서 체질이 개선된 것은 아니다.
21세기 새로운 화두의 하나는 ‘지속가능성’이다. 경영과 웰빙 등 많은 분야에서 지속가능성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지속가능한 사회통합에 대해서도 좀 더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할 때이다. 그것은 다름과 차이에 관용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번 축제가 끝나면 이전에 걸쳤던 편견과 아집의 액세서리들을 다시 찾아 걸치게 될 것이다. 또 한번 올림픽을 맞이하면서 스포츠를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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