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 터진 줄 모르고 성령 온 줄 알았어”
6.25 때 인민군 전도갔다 부상...통역하다 탈주
한국서 교회 9개 세워...북한 복음화 아직 꿈꿔
송환규 목사(80)는 한 여름이면 반세기 이상 묻어두었던 풍파(風波)의 보자기를 끄른다. 거기에는 한 청년의 서투른 객기와 피 묻은 역사, 그리고 신을 향한 길을 걸어온 노(老) 목사의 경건한 여정이 뒤섞여 있다.
“내 꿈이 육군 대장이었어. 멋있잖아. 진주 농고 4년 때 장래 희망에 그렇게 적었지. 그래서 육군사관학교에 가려고 했어. 근데 어머니란 암초를 만난 거야.”
신심 깊은 기독교인이었던 어머니는 아들을 “사람 죽이는 연습하는 학교”에 보낼 수 없었다. 어머니는 사흘 간 단식하며 당신의 꿈을 관철시켰다. 1948년 육사에 합격했으나 그는 장군의 꿈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는 부친 친구의 도움으로 동대문 전매서에 취직, 5급 공무원이 됐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의 두 번째 선택도 뒤집어 놓았다. “자식이 담배 만드는 데 있을 수 없다는 거였지.”
결국 그는 어머니가 인도한 신(神)의 길을 걸어야 했다. 부산의 고려 고등성경학교에 입학한 그는 이듬해 전쟁 소식을 들었다. 6월말 전황이 급박하자 학교에서는 조기방학 결정을 내렸다. 그는 손을 들고 교장 선생님에 항의했다.
“방학은 7월인데 왜 빨리 하느냐는 소리였어. 방학을 빨리 하면 기숙사가 문을 닫고 그러면 쌀값도 올랐는데 곤란한 상황이었지. 그래서 교장 선생님에게 오기를 보여주기 위해 나는 방학 안 하고 인민군 전도하러 간다고 큰소리 쳤지.”
그는 걸어서 남하한 전선으로 갔다. 가방에는 성경과 찬송 책, 장로교 헌법 책이 들어 있었다. 삼천포, 사천을 지나 무작정 걷다 미군들을 만났다. 그들은 “가면 죽는다”며 이 무모한 신학생의 의지를 막았다. 호주 선교사에게 2년간 개인 영어 레슨을 배운 실력으로 그는 공산군 전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미군들이 내 열정에 감동했는지 차고 있던 시계를 끌러주며 가도 좋다고 허락했어.”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도망가던 국군을 만났다. 군인은 카빈총을 그에게 들이대고 협박하며 옷을 뺐었다. 반소매 군복을 입은 그가 걸음을 재촉하던 중 어느 순간 따끔거리는 감각을 느꼈다. 팔을 보니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피를 본 순간 그는 쓰러지고 말았다. 7월31일이었다.
“폭탄 터진 줄도 모르고 난 그게 전도 잘 하라고 성령이 온 줄만 알았어.”
그 후 병원에서 파편을 대부분 꺼냈으나 그의 몸속에는 아직도 파편이 파고든 17군데의 자국이 남아 있다. 한참 후 ‘조선 동무는 일어나라!’ 는 소리에 그는 눈을 떴다.
“미군 포로들이 살려달라고 싹싹 빌고 있었어. 인민군들이 머리에 따발총을 쏘니 빌던 사람이 즉사하고 말아.”
다음은 그 차례였다. 인민군은 “동무는 왜 이승만 군복입고 있어?”라고 물었다. 그는 옷이 바뀐 경위를 설명한 후 미군 허락 맡고 전도하러 왔다고 답했다.
“미군과 영어로 대화했다고 하니 부사령관이 자기들 영어 통역 시키자며 미군 포로 심문을 맡겼어. 그래서 내 죽을 차례에서 살아난 거야.”
그는 부상당한 몸에 졸지에 인민군 통역이 돼 미군 포로 심문장에 불려 다녔다. 통역이 끝난 포로는 바로 죽음이었다. 사람의 값어치가 콩나물 쓰러지는 것 같았다. 제대로 치료를 못 받아 그가 부상당한 자리에서는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걸 불쌍히 여긴 한 인민군이 “북에 가면 크리스챤은 강제수용소로 간다”고 귀띔해주었다.
정신이 번쩍 뜬 그는 9.28 수복을 앞둔 밤에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성공이었다. 고향인 함양으로 갔지만 그곳도 인민군 치하였다. 다시 도망쳐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몸을 피해 있었다.
고려신학교(현 고신대)를 다닌 그는 전쟁 후 주기철 목사가 시무했던 양산교회에서 조사(전도사)로 일했다. 그러다 1955년 길에서 군에 끌려가 논산훈련소에서 머리를 깎였다. 부상으로 병역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자대에 배치된 후 휴가를 다녀오니 일이 터졌다.
“빈손으로 귀대했다고 선임병들이 혹독하게 기합을 줘. 내가 인민군보다 더 더러운 놈들이라고 욕을 했어. 바로 20일간 금식에 들어갔지. 물 한 방울 안 먹고 있다 부산의 560 병원으로 후송간 후 얼마 뒤 의병제대했어.”
군복을 벗은 송환규는 본격적인 사역의 길을 걸었다. 김해 북선교회를 시작으로 경남 하동의 옥종 교회, 부산 아미동 교회, 평택 안정리 교회 등에 이어 서울 신정동의 신남교회(현 예성교회)을 마지막으로 그는 1990년 6월 도미했다.
“뉴욕에 사는 동생 초청으로 도미했지. 한국에 9개 세웠으니 미국에도 1개 세우자는 뜻이었어.”
뉴폿뉴스 교회를 다른 동역자와 함께 설립해 지역 학생들과 동포들의 정신적 요람으로 키웠다. 94년부터는 미 장로교 노회의 요청으로 올드 도미니언대학 내에 노폭 한인장로교회를 세웠다.
“처음 한 20명 됐어. 유학생들이 졸업하니 떠나 이제는 5명밖에 안돼. 그것도 내 식구들도 포함해서. 난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교회 목사야.”
올해로 팔순. 남들은 삶을 정리하고 안주하는 나이이지만 그는 아직도 객기를 버리지 않고 있다. 그것은 참으로 대책 없던 지난여름의 꿈과 다르지 않다.
“그때 부상만 없었으면 인민군들에 전도했을 텐데 말이야. 비록 팔십 인생이지만 아직도 꿈을 못 버려. 북한에 복음의 사자(使者)를 보내는 거야. 꼭 할 거야. 난 할 수 있어. 알지?”
<이종국 기자>
■송환규 목사는
1928년 진주 생. 장군이 되고 싶어 육사에 지망했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포기. 신학교 재학 중 전쟁이 나자 인민군 전도를 위해 전선으로 달려갔다 부상으로 체포됨. 인민군에서 미군과의 통역을 맡다 탈주. 교회 9개 설립 후 도미해 현재 버지니아 노폭에서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교회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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