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 바느질에는 홈질, 박음질, 감침질, 새발뜨기, 공그르기, 휘갑치기, 상침뜨기 등이 있다.
상침뜨기는 작품을 끝맺는 과정에서, 박이 옷이나 보료, 방석 따위의 가장자리를 실밥이 겉으로 드러나게 꿰매는 것으로, 튼튼하고 장식을 겸하여, 반대색 실로 두 땀 혹은 세 땀씩 간격을 고루 맞추고, 이를 두 상침 또는 세 상침을 뜬다고 부른다.
한국의 전통문화 중 공예에 속하는 자수는 약 2,000년 전 삼국시대 신라에서 시작되어 불교 영향을 받아, 폐쇄된 여인들의 사회에서 손끝에서 손끝으로 이루어져 왔다. 외래문화의 간섭 없이 여인들의 창의력과 인내로 마음의 시와 그림으로 소원을 담았다.
조선시대 말 약 1900년께 전통문화는 일본의 지배 하에 우리 교육과 더불어 말살되었고, 1945년 해방이 되고 새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1950년 6.25동란의 피난 보따리에 자수는 소멸하는 수난을 겪었다. 일본 교육을 받지 않으셨던 분들께서 우리의 전통자수를 고수하셨고, ‘조선자수 500년’의 전시회와 복식문화를 되찾으려고 헌신적으로 노력하셨던 귀하신 분에 힘입어, 한국 전통문화는 ‘88년 세계올림픽대회’가 서울에서 열리는 계기로 되살아나면서, 전통공예와 전통자수가 되살아 전통의 맥을 이어왔다.
전통자수는 생활 속의 모든 것이 작품을 제작하는 동기와 주제가 되었고 문양이 되었다. 가족의 장수와 행복, 부귀영화의 소원을 담고 제작되어, 작품마다 오래 간직하고 싶은 것이다.
수저 집은 장수의 기쁨은 먹는 수저임에 귀한 것으로 잘 보관해 두는 주머니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자수의 솜씨보다는 가족과 집안의 발전을 위하여 절실한 소원과 욕심이 담겨, 정성을 다하여 지성스럽게 만들었다. 친정어머니께도 몇 죽의 골무와 버선, 수저 집 등 손수 만드시어 시집을 오셨다고 하셨다.
나는 결혼하는 딸의 시부모님에게 ‘청홍 십장생자수 수저 집’을, 신랑과 신부에게 ‘청홍 목단자수 수저 집’을 예물로 드리고 설명하였다. “‘청홍 목단자수 수저 집’의 청색은 신랑을, 홍색은 신부를 나타내고, 앞면에 목단 꽃은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고, 원앙새는 부부의 행복을, 뚜껑에 ‘忠,’은 국가에 충성하고, ‘孝’는 부모님께 효도하며, 뒷면에 ‘오자등과’는 다섯 명의 아들이 변호사 합격을 바라는 소원이 담긴 작품이다”고 하였다. “변호사 합격의 말이 어디에 있느냐”고 질문을 받았다.
전통자수 작품에는 장수, 부귀, 다남, 행복과 소망을 담은 마음의 시와 그림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시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자수의 담긴 내용을 설명 듣고 난 뒤의 “그러면 네가 결혼할 때 갖고 온 수저 집을 너는 갖고 있느냐?”는 질문에 나는 그 답을 못하였다. 일본 교육의 흐름과 함께 말살되어졌던 전통문화가 되살아나기 전, 한국동란이 있었고, 내가 결혼할 당시의 생활에 힘들었던 우리 민족에게 전통의 맥은 이어지고 있지 않았다는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부산에서 태어난 나는 어린 시절 6.25동란을 맞았다. 유치원 강당에 피난민들이 살았고, 초등학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어 산기슭 천막에서 공부하였다. 나는 할머니의 삯바느질하시는 옆에서 천의 마름질과 질감을 자연스럽게 배우면서 규방문화의 기초를 닦았고, 신문사에 근무하셨던 아버지께서 문화교육을 시켜주셨고, 중·고등학교에서 한국의 대가로부터 동양화를 배웠다. 대학교에서 자수를 전공하고 작품 제작과 각 문화센터에서 전통 자수를 강의하게 되었다. 그 후 이민을 와서 겪어야만 하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일을 하다간, 육체노동에 견디질 못하고 쉬었다. 집에서 바느질하며 한국의 전통자수와 침선의 규방문화 예술인으로 한국 전통의 맥을 이어 가고자 젊음을 온통 쏟아 작품을 제작하면서, 가르치기도 하고 홍보도 하였다.
미국인들에게 우리의 ‘모시조각 보자기’를 소개할 기회가 있었다. 치자와 쑥, 먹 등으로 자연염색 한 모시로 옷을 만들고, 남은 조각을 이용하여 제작하는 것이다.
높은 문화 안목을 갖춘 상류사회 미국인들은 바느질이 이루는 섬세한 선의 현대적 구성미를 보고 감탄하였다.
보와 흉배는 조선시대 관복에 계급표시로 달았던 옷의 부속품이면서 나라가 제정한 계급장이다. 조선시대 초기는 중국 제도를 답습하였고 제도가 확립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한다. 약 30년 전에는 흉배를 일반 대중들은 거의 알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전통문화 홍보 교육과 사극을 통하여 널리 알고 있다.
왕은 황금색 곤룡포 위에 금사로 오조용 보를 가슴, 등, 양 어깨의 네 곳에 달았고, 왕손은 사조용 보 를 달았다. 왕비에게는 원삼에 사조용 보 또는 봉황흉배를, 왕자와 공주, 대군과 옹주가 각기 다른 문양의 흉배를 달았다. 문관은 학, 무관은 虎를 지위에 따라 한 마리 혹은 두 마리로 제정되어 가슴과 등에 달았다. 보를 전담한 수방나인들이 제작한 것을 하사 받기도하고, 집에서 부인이 정성을 다하여 만들기도 하였다. 관복은 거의 헤어지고 없어졌으나 흉배는 비교적 많은 수가 유물로 보존되고 있다.
문관용 쌍학흉배를 재현하고자, 바탕천을 고르고, 수틀을 짜서 꾸미고, 수틀 위에 본을 그렸다. 품격 있는 비단색실을 고루 갖추고, 품사실로 한 뜸씩 수놓기 시작했다.
물거품을 흰색으로 세로로 이음수 하였다. 구름은 둘레를 아우트라인수 하고, 그 위에 색의 농도를 주고 평수와 이음수 하였다. 학 날개는 몸판을 중심으로 대칭하여 날개 방향에 따라
흰색으로 사선 평수로 메우고, 날개 깃털은 반으로 가늘게 꼰 흰색으로 털을 만든다.
몸판은 짧은 이음수로 메웠다. 긴 다리는 중간 회색으로, 문관용 쌍학흉배 마디는 가늘게 꼰 실로 검정색, 회색, 흰색으로 명암을 준다. 부리는 가늘게 긴 삼각형으로 메우고, 윗부리와 아래 부리 사이에 가는 검정색실로 명암을 준다, 눈은 검정색, 벼슬은 빨간색으로 씨앗수를 한다. 물결, 바위, 불로초, 파도를 수놓았다. 전체 둘레는 굵게 한 붉은 고동색 두 가닥을, 한 가닥은 오른빔으로, 한 가닥은 왼빔으로 꼰 후, 두 가닥을 합해 징금하였다. 마치 길게 땋아 늘인 머리와 같다. 수놓기를 끝내고, 뒷면의 실밥을 정리하고 풀을 발랐다. 냄비에 물을 올려 김을 씌웠다. 하루를 그늘에서 말리고, 수틀에서 떼고, 뒷면에 안감 공단으로 감침질하였다.
문관용 쌍학흉배가 완성되었다. 이 흉배의 주인은 누구일까?
약 35년 전 내가 바느질하는 것을 보신 친정할머니께서 ‘내가 죽으면’하시면서, 생존 시 어두운 눈으로 ‘무궁화자수 대한민국 전도’ 액자와 ‘버선본 주머니’를 만들어주셨다,
‘無窮花刺繡 大韓民國 全圖’는 부산에서 무궁화 줄기를 내려, 한 줄기는 전라남도, 다른 줄기는 강원도를 거쳐 평안북도를 지나 함경북도의 회령까지 연결되었고, 백두산을 비롯한 전국에 무궁화 꽃이 활짝 피었다. 일본의 지배가 있기 전에 구하여진 자수 본으로 할머니께서 수놓으시어 남겨주셨다. 제주도와 울릉도가 표시되어 있다. 내가 갖고 있는 액자는 할머니의 재현하신 것이지만 원본의 사진을 갖고 있다.
‘버선본 주머니’는 버선본을 장지나 한지로 만들어 찢어지기 쉽고, 더러워지기 때문에 보존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빨간색 공단 정사각형 앞면 중심에 활짝 핀 목단 꽃을, 네 모서리에는 나뭇잎을 배경으로 목단 봉오리를 수놓고, 남색 바이야스로를 둘러 안감과 합하였다. 마주보는 두 귀를 서로 맞접고, 다른 두 귀에 3개씩 연봉매듭을 맺고, 끈목을 반대색으로 새발뜨기 하고 연봉 구멍을 만들어 여닫게 하였다.
버선본의 종류도 서방마님, 아씨, 하인들까지의 본을 넣어주셨다. 할머니께서 남겨주신 것이 서툰 손 바늘 뜸이라도 재현해 주신 것을 볼 때 할머니를 뵙는 것 같다.
할머니께서 살아계셨으면 여쭈어볼 것이 많다. 여름에 도시락 반찬으로 싸갔던 묵은지 김치와 콩잎 김치를, 치자 물을 우려내어 부침개를 부쳐주셨고, 생일에 쑥굴리 떡을 만들어주셨다. 염료를 만드시어 자연 염색하셨고, 조각 천을 모아 상보를 만드시어 유지로 씌워 상에 덮으셨고, 솜으로 누빈 주발 주머니에 밥을 담아 아랫목에 따뜻하게 묻어 놓으셨다.
할머니께서는 여러 곳을 꿰맨 모시적삼을 빳빳하게 풀을 먹여 한여름 더위를 식히셨다.
나는 이민 온 후, 시집 올 때 갖고 온 삼베 홑이불에 치자 염료를 만들어 농도의 차이를 두고 염색을 하였다. 치자염색을 들인 후, 늦봄 쑥을 뜯어 와서 쑥색 염료를 한 번 더 염색하면 올리브 그린 색이 된다. 노란색과 쑥색과 회색, 올리브 그린의 농도 차이를 두고 염색 되어진 베로, 조각보를 만들었다.
회오리 모양으로 중심을 잡아 시침을 두고 겉감으로 싸서 고운 감침질을 하고 안감을 다시 싸서 감친다. 무늬를 한 개씩 만들면서 연결한다.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때로는 구석에 접어 두기도 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한 뜸, 한 뜸 떠가는 동안 현대적 구성을 이루는 기쁨을 맞본다. 대작일수록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정성이 깃들어 오래 간직하고 싶다.
‘여의주 문양의 보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여의주 문양은 사방 13cm 양단 조각을 시접 접어, 네모서리를 중심에 고정시키고, 뒤를 돌려서 네모서리를 중심에 또 고정시키고, 다림질을 하고, 다른 한 장을 만들어 붙여 한 변을 감침질한다. 다른 색 사방 4cm의 조각 천을 사이에 끼우면서 초생 달 모양의 무늬를 휘갑치기 한다. 상상할 수 없는 꽃잎무늬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박쥐 문양을 만든다. 색이 다른 천 사방 5cm 조각 두 모서리를 각각 바늘 끝으로 중심으로 모이게 말아서, 반으로 접고 0.8cm 내려 바늘로 단단하게 꿰맨다. 아래 부분은 잘라내고 풀칠을 하여, 양쪽을 벌리면 상상할 수없는 무늬가 만들어진다. 만들어진 박쥐로 꽃 심을 박는다. 헝겊으로 나타낼 수 없는 입체감 있는 꽃무늬들이 나타난다. 한 작품을 만들 때마다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만 작품을 완성하는 그 성취감의 기쁨은 황홀하다.
뉴욕 우리 집 식탁에는 봄볕이 밝게 비취고 있다.
나는 여자들이 바늘용구로 빼놓을 수 없는 골무를 때때로 만든다. 양단 사방 5cm의 조각 두 장에 골무 본을 뜬 마분지 4장 풀을 바르고, 떨어지지 않게 사이에 한지를 붙인다. 헝겊 붙인 골무 본 두 장을 시접 두고 골무 모양으로 자른 후, 반달 부분에 가윗밥을 주고, 두 조각을 색 실로 새발뜨기 한다. 골무 본으로 눌러가면서 모양을 만들고 말린다. 정성을 들여 완성되어진 골무를 자꾸만 만져보곤 한다. 오색비단과 비단색 실로 새발뜨기를 한 어울림은 매우 고상하다.
이 봄 골무를 만들면서, 소멸된 문화재 숭례문의 안타까움과 소멸해 가는 전통공예와 쓰러져가는 장인들을 주제로 내용을 바꾸면서 자주 보도되는 기사를 라디오와 신문을 통해 읽고 있다. 전통자수와 침선은 힘을 잃고 있다. 소멸된 숭례문은 무슨 말을 할까?
우리가 받은 교훈은 무엇일까?
나는 40여년 전, 비원 옆 쓰러져 가는 한옥 칠궁 골방에 기거하는 연로한 나인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낯선 땅에서 전통자수 인으로 고집하며 바느질을 하고 있던 나는,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셨던 무궁화 자수 대한민국 전도 액자와 목단 자수 버선본 주머니, 수저 집, 노리개의 유품을 만지고 있다. 그러나 작은 골무는 찾을 수 없다. 칠궁의 쓰러져 가는 한옥 골방 수방나인 할머니께서는 굴러다니는 작은 골무를 보고 무슨 말을 했을까?
내가 만든 골무를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노리개를 만들기로 하였다. 매듭실의 끈목을 적당한 길이로 띠 돈을 두고 금사를 감고, 두벌 국화매듭을 맺고 날개를 키워 모양을 만들고, 연봉과 골무를 끼우기를 10회 반복하였다. 장구매듭으로 마무리를 하고 오색 오봉술을 달았다. 앞으로 골무들은 서로 동무하며 의지하겠지?
노리개는 여성의 몸치장 가운데 대표적인 패물이다. 궁중이나 상류사회, 평민에 애용되어 온 것으로, 입는 의복과 예식의 경중에 따라서, 三作, 二作, 單作을 사용하였다. 주제의 종류는 은, 옥 산호가지, 밀화와 수노리개 등 있고, 자손 번성을 기원하는 산호가지, 악을 제거하는 나비나 박쥐, 허수아비처럼 만든 방아다리, 복을 기원하는 것이 있다.
할머니께서 어머니에게, 결혼하는 딸과 며느리에게로 집안의 가보로 대를 물린다. 나는 친정어머니로부터 연화등 노리개를 받았다.
몇 년 전 나는 전형적 미국 유대인 사위를 맞았다. 결혼식도 가족들의 모임으로 하였다. 나는 남색 끝동과 고름을 단 물색 저고리와 진한 핑크색 치마를 입고 ‘흰색 노방꽃띠’와 ‘三作 노리개’를 달았다. 노방 꽃띠 앞면에는 연한 색으로부터 진한 색으로 마가렛 5송이가 있고, 겹친 뒷면, 바위를 연하고 중간색과 진한 담청색으로 이음수를 놓고 둘레를 금선으로 징금하고, 물거품은 하얀색으로 평수하고, 위에 무지개 색 물방울을 수놓았다. 그 위에 ‘복’을 담청색으로 평수하였다. 삼작노리개는 하얀 명주로 만든 바늘집을 3개 맺어 보라색 딸기술을, 박쥐 문양의 가지색 노리개는 금사로 징금을 하여 오색 가지색 봉술을, 은장식 방아다리노리개를 달았다.
상류사회의 우아한 분위기를, 친정 엄마는 작은 키에, 진한 핑크색 치마를 입고, 설치고 다녔으나, 그들은 모두 한복과 색이 잘 조화된 노리개를 보고 칭찬을 하였다.
가족들의 작은 웨딩파티였지만 한복과 노리개는 한국의 전통 미를 충분히 알려 주었다.
나는 외손자와 외손녀가 있다.
30개월 된 외손자 지누의 우리말 이름은 ‘進優’를 영어로 지었다. 첫 돌잔치 때 유대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모든 친척이 모였다. 지누는 한복을 입고 돌 신을 신었다. 돌 상 위의 차려진 것들 중에 쌀과 셀러리 폰을 잡았다.
기차를 좋아하는 지누는 “할머니 ‘come home”“할머니 big track made” 하면서 셀러리 폰을 한다. 손자 덕분에 나는 영어를 배우고, 지누는 영어와 한국어를 배운다, 위험하거나 부정적인 상황이 아니면 ‘No’를 말하지 않고 ‘개구쟁이라도 좋다. 건강하고 바르게만 자라다오’의 좌우명 속에서 미운 세살 개구쟁이는 귀엽고, 씩씩하게 뛰어놀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외손녀 에이바는 생후 6주 되었고 곱슬머리에 파란 눈동자를 가졌다. 잘 자고 잘 먹고, 하품하고, 잠간 눈을 떠서 맞추는 등, 열심히 자라고 있다.
손녀의 첫돌 잔칫상 앞에는, 목단 수를 놓은 조바위에 산호 줄과 작은 오봉술을 이마 위에 늘어뜨리고, 노란 색동저고리와 빨간색 치마 입고, 꽃버선과 꽃신을 신고, 오곡 주머니가 달린 십장생 돌띠를 매워줄 것이다. 이제부터 십장생 돌띠를 열심히 수놓고, 오곡 주머니를 만들어야 하겠다. 외할머니는 에이바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기원한다.
현재 나는 미국생활에서 삶의 지혜를 찾으려고 하지만, 두고 온 조국과 돌아가신 할머니를 그리워하고, 어린 추억을 더듬으면서, 그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아내고 있다.
우리 한국 여인들은 왜 상침을 두었을까?
겹보자기의 겉감이 완성되어 안감을 붙여서 뒤집었을 때, 안감과 겉감은 힘없이 서로 놀고 있다. 이때 서로 겉감과 다른 색실을 두 겹 또는 세 겹으로 두 상침, 또는 세 상침을 떠 준다. 땀이 고르게 규칙적으로 상침을 뜨고 나면 튼튼하고 힘이 있기 때문에 더 아름답게 보인다. 선조들이 장식을 겸하면서 튼튼하게 하셨던 지혜를 나도 실천하면서, 한국의 전통 자수의 아름다움이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흉배를 수놓고, 골무 노리개를 맺고, 보자기를 제작하면서 뉴욕에서 오늘도 상침을 뜨고 있다,
앞으로 미국을 비롯한 세계는 일상생활이 최첨단의 기술로 뒤덮겠지만, 그러나 나는 사위와 딸, 그리고 외손자와 외손녀에게 물려줄 우리 한국 전통문화를 생활 속에서 길잡이가 되려고 한다.
<끝>
입상 소감-박정열
결혼생활 40여년, 말로 축하의 표현을 나타내지 못하는 남편의 행동에서 무척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60평생 연필보다 바늘을 더 좋아하였던 결실을 보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앞으로 전통 자수문화의 보급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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