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물처럼 전반전
비바람은 무서웠다. 가랑비가 아니었다. 지나가는 소나기는 더욱 아니었다. 인생은 여행같은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요람에서 사망까지. 특히 해외여행 중(이민생활)에 만난 폭풍우는 절망이었다. 충격적이었다. 나는 벼락을 맞은 격이었다. 맨 정신으론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기절했었다. 깨어난 후에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엄정한 사실이었다. 나는 차라리 죽음을 원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니 오히려 편안함이 찾아왔다. 자연의 법칙처럼, 모든 시작에는 끝이 있게 마련. 나는 고개를 높이들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폭풍우가 지나간 하늘은 파란 유리바다였다. 햇살이 빛나는 꿈을 싣고 나에게 새로운 것을 속삭여 주었다.
부모가 자녀 교육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마치 자연의 섭리와도 같다. 깊은 물이 소리없이 흐르듯이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말없는 고민이다. 표현하기 어려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영적인 원칙 같은 것이다. 나는 편모였다. 어린 아들 하나 데리고 70년대 중반 미국으로 이민왔다. 편부나 편모 밑에서도 맑고 밝게 자랄 수 있는 사회가 미국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나의 꿈의 터전이고 바다였다. 인생이란 배를 타고 항해할 목적지였다. 아들을 미국에서 교육시킬 꿈에 부풀어 있었다. 환상의 날개가 내 어깨 위에 달려 있는 듯 했다. 나의 삶을 아낌없이 불태울 이유는 너무나 확실하고 분명했다. 아들을 성공한 인간으로 키워 내는 일. 사회를 위해 공헌할 줄 아는 훌륭한 사람, 불쌍한 사람을 외면 않고 사랑으로 돌볼 줄 아는 따뜻한 가슴을 지닌 신앙인. 나는 아들을 전인적인 사람으로 교육시키고 싶었다. 기회의 땅 미국에서 존경받을 한 인간으로 성공하길 바랐다. 그것이 아들에 대한 나의 꿈이고 희망이었다.
뿌리째 옮겨심긴 나무는 힘이 들었다. 건강하지 못했다. 엄청 고통스러웠다. 이민생활은 우리 모자에게 가시밭길의 시작이었다. 신문을 보고 아이 맡길 곳을 찾았다. 나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아이를 베이비시터에게 살점 떼내듯 맡겼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막 일을 시작했다. 가게 점원, 식당 주방, 웨이트레스, 청소일, 페인트 등등. 페인트 헬프로 나갔다 온 날은 어깨와 목, 팔이 저려서 살럼파스를 붙여야 했다. 온몸뚱이가 몽둥이로 얻어맞은 듯 싶었다.
나는 때때로 미국에 온 것을 후회했다. 내 고생은 고사하고 아이가 너무나 불쌍했다. 아빠 먼저 하늘나라에 보낸 아이는 달랑 하나인 엄마마저 일에 빼앗겨야 했다. 내 가엾은 아들 유빈이. 베이비시터 집에는 우리 유빈이보다 두 살 위인 피터가 있었다. 그 집 아들 피터는 착했다. 유빈을 친동생처럼 잘 데리고 논다고 피터 어머니가 말했다. 그녀는 나에게 우리 유빈을 자기 자식처럼 잘 돌보니 조금도 걱정 말라고 했다. 유빈은 피터를 따라 영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영어로 생활하는 그 댁을 참 잘 선택했다고 생각되었다. 유빈은 나에게도 곧잘 영어로 재잘거렸다. 나는 신기했다. 내 아들이 영어로 말을 하다니. 기적처럼 느껴졌다. 엄청 기뻤다. 그리고 감사했다. 눈에 띄게 엄청난 아이의 발전을 보니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만 하는 삶도 큰 보람이고 즐거움이었다. 희망이 있는 고생은 고통이 아니었다. 꿈을 키워가는 과정은 축복이고 행복이었다.
어느 날 베이비시터가 내게 부탁했다. 너무 자주 아이를 보러 오지 말라는. 엄마를 만났다가 헤어지면 아이가 계속 울어서 달래기가 힘이 든다고 했다. 나도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었다. 떨어질 때 서로가 아파해도 나는 자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우리 유빈은 나의 유일한 의지였다. 큰 힘이었다. 그리고 나의 생명이었다. 유빈이에게도 내가 전부다. 그런데 어떻게 아이를 자주 못 보게 하다니. 물론 아이의 교육을 생각해서 일것이다. 못 오게 하니 더 아이가 보고 싶었다. 분신을 내손으로 키울 수 없는 현실에 목이 메였다. 아이에게 미안했다. 죄스러웠다. 사실 남의 손에 귀한 아들을 맡긴 어미의 마음은 한시도 편할 리 없었다. 가슴 한켠에 걱정의 고름 주머니를 달고 사는 느낌이었다.
나는 유빈에게 달려갔다. 유빈은 외출한 주인이 돌아오기를 고대하며 기다리는 강아지 같았다. 매일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며 엄마를 애타게 갈망하는 것이 나의 아가였다. 내가 도착하자 유빈은 와락 내 품에 안겨 흐느꼈다. 그 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온 몸으로 울었다. 세상 서러움 혼자 겪은 양 처절하게 목이 메였다. 나도 함께 울었다. 아이가 불쌍했다. 한없이 미안했다. 너무나 가엾어서 아이를 껴안고 울었다. 내 울음소리에 아이는 어느 새 울음을 그치고 “마미 돈 크라이”하며 나를 달랬다. 아이 앞에 의지박약한 에미 모습 보인 것이 거듭 죄스럽게 느껴졌다. 유빈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세로 자기의 서러움을 내게 호소했다. 아이의 서러움은 주로 피터와의 불화 때문이었다. 맛있는 것은 피터 혼자 먹으려 한다던가 텔리비전도 못 보게 한다고 했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일 들이었다. 피터가 자기 아빠에게 ‘데디’라고 해서 유빈도 따라 ‘데디’라고 불렀다가 “낫 유어 대디”라며 떠다밀어서 넘어졌다고 했다. 많이 아팠다고 하나하나 보고했다.
내 가슴이 갈기 갈기 찢어졌다. 피가 철철 흘렀다. “마미 돈 고!” “엄마가 돈 많이 벌어야 우리 유빈이 좋은 학교 보내주지.” “아이 돈 니드 머니, 아이 돈니드 스쿨, 아이 니드 유, 아이 원 투 고 위드 유” 나는 아이의 애절한 절규를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나는 아이에게 더 이상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충동적인 결단이 아니었다.
나는 유빈을 데리고 내가 임시로 거처하는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모자는 이민생활 1년도 견디지 못했다. 한국으로 돌아갔다. 갈 곳이 없었다. 집을 판 게 후회됐다. 그나마 의좋은 형제자매가 보석처럼 조국을 지키고 있어 다행이었다. 언니와 동생은 우리 모자의 안식처였다.
나는 아이와 같이 대구 언니댁으로 갔다. 온 가족이 식구처럼 따뜻이 맞아 주었다. 너무나 감사했다. 언니의 자녀들은 유빈을 막내 동생처럼 사랑해 주었다. 유빈은 이종사촌 형과 누나로부터 키타와 피아노 반주로 노래를 배우며 즐거워했다. 며칠 쉰 후 부산에 있는 동생 집을 방문했다. 남동생 가족도 모두 반겨주었다. 동생 명기는 나를 끔찍이 배려해 주었다.
내가 부탁하기도 전에 동생은 먼저 나에게 연민의 정을 보였다. 매형도 없는 낯선 외국생활에 혼자서도 힘이 들 테니 유빈을 맡아 키워주겠다고 했다. 나는 혈연의 정에 깊은 고마움을 느겼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자리잡을 때까지 아이를 한국에 두는 것이 최선일 것도 같았다. 명기는 아버지와 장모님을 함께 모시는 처지였다. 동생부부는 천사 같은 성품을 지녔다. 아버지를 잘 모시는 것만으로도 나는 동생에게 참으로 고마웠다. 그런 동생부부에게 누나인 내가 짐을 보텔 수는 없었다.
나는 언니와 의논 끝에 친정어머니같이 푸근한 언니댁에 내 분신을 맡기기로 했다. 언니는 막내아들처럼 키울 테니 조금도 염려 말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청상과부로 수절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언니에게 도움은 못 되고 힘든 부탁을 해서 참으로 미안했다. 그리고 한 편으로 너무나 고마웠다. 어린 아들과 기약없는 생이별을 하고 돌아서는 발목에 무거운 바위 덩어리가 자꾸만 나의 목을 메이게했다.
유빈에게 안정된 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함이란 변명으로 나는 슬픔과 아픔을 스스로에게 위로했다. ‘내 가슴에 비만 내리라는 법은 없어. 곧 찬란한 햇살로 빛나는 날을 개척할 거야. 억척같이 일해서 자리잡고 우리 아기 빨리 데려와야지!’ 나는 나 자신에게 체면을 걸어 내 스스로가 힘이 되고 길이 되어 다시 엘에이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파트를 얻었다. 지난번 하숙집에서 만난 친구와 함께 가장 저렴한 스튜디오 공간을. 베이비시터비, 하숙비 등 지출이 줄어지자 돈이 모이기 시작했다. 나는 차를 사지 않았다. 두렵고 위험했으나 버스를 이용했다. 아들을 떼어놓은 대가로 나는 지독한 깍쟁이로 변했다. 몇 달을 라면만 먹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내 룸메이트가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 정도였다.
나는 열심히 일한 결과 한국에서 집을 정리한 것과 합해서 작은 아파트 건물을 마련했다. 그 동안 아이와 떨어져 있던 세월, 4년이 훌딱 지나갔다. ‘어서 데려와야지! 학교에 보낼 나이인데!’ 그동안 정말 무섭게 일했다. 우리 아들 만날 생각을 하니 좋아서 눈물이 핑 돌았다. 꿈에도 그립던 나의 분신이 다시 내 품으로 돌아왔다. 비싼 대가를 지불하며 배운 영어는 까맣게 잊고 돌아왔다. 그대신 한국말은 아주 유창하게 잘 배워왔다. 다시 영어를 기초부터 배워야 될 유빈에게 혼돈을 주어 너무나 미안했다. 그러나 나랑 우리 말을 하니까 너무나 좋았다. 유빈이가 한국말을 유창하게 잘 한다는 것은 큰 축복이었다. 영어만 잘하고 우리말을 못하는 유빈이보다 훨 좋았다.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나는 우리 아들과 그동안 함께 하지 못했던 세월을 되찾고 싶었다. 아들과 나는 주말과 방학 때면 함께 여행을 즐겼다. 정말 잘 해주고 싶었다. 나는 유빈과 약속을 했다. 앞으로는 그 어떤 어려운 환경이나 이유가 있어도 절대로 떼놓지 않을 것이라고. 유빈은 내 일을 잘 도와주었다. 테넌트가 이사를 가면 우리는 같이 청소를 했다. 페인트도 함께 칠했다. 비가 새는 곳은 같이 뗌질을 했다. 우리는 비속에서 서로 마주보며 킥킥거리며 장난도 쳤다. 유빈은 일거리를 스스로 찾아 돕기도 했다. 때로는 테넌트에게 보내는 노티스도 잘 대필해 주었다. 나는 작은 유닛의 아파트를 사서 고치고 팔면서 더 좋은 지역으로 업그레이드 해서 이사를 했다. 유빈은 든든한 파트너 같았다. 믿을 수 있는 친구 같았다. 그리고 메니저 역할까지 해주었다. 그동안 대구 언니집에서 가정 교육을 아주 철저히 잘 받은 표가 곳곳에 역력히 드러났다.
우리가 이사한 곳은 해변가였다.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걸어서도 바다를 갈 수 있는 위치였다. 샌타모니카시였다. 유빈의 학교도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들은 초등, 중등, 그리고 고등학교까지 무사고로 잘 다녀주었다. 성적도 훌륭했다. 참으로 고마웠다. 유치원도 못 다녔는데 잘 해줘서 때때로 안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유빈은 봉사활동도 아주 잘 했다. 시간이 나면 샌타모니카에 있는 병원과 경찰서에 가서 봉사했다. 중학교때부터 고등학교때까지는 자기의 용돈을 모아 담요와 컵라면 등을 사서 노숙자를 돕는 일도 스스로 했다.
그당시 모 기자는 유빈을 소년 산타클로스라고 불렀다. 나는 우리 유빈이가 내 아들이란 사실이 참으로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유빈은 착하고 성실했다. 아파트 건물의 외등도 알아서 갈아 주었다. 타이머로 시간를 잘 맞추어 주었다. 잔디에 물주는 일이며 내 차까지 때로는 씻어 주었다. 아들은 자기 때문에 싱글 엄마로 고생이 많다며 오히려 미안해했다. 어느 날 유빈은 내게 진지한 부탁을 해왔다. 좋은 아저씨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사는 엄마 보는 것이 자기의 소원이라고. 엄마의 행복이 바로 자기의 행복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들이었다. 나는 유빈이가 참으로 고마웠다. 그리고 엄청 자랑스러웠다. 장래도 아주 든든하게 느껴졌다. 내 미래가 유빈이란 나뭇가지에 찬란한 결실의 열매가 달리는 것 같았다. 꿈이 가득했다. 비전을 보았다. 아들을 통해 만사가 형통함을 느꼈다. 고생은 끝났다. 우리 모자의 행복의 통로가 빛으로 보였다.
유빈이가 대학을 가기전 여름이었다. 모국어와 역사, 그리고 문화를 배워 오라고 서울로 보냈다.
유빈은 연수 프로그램 일주일 남겨 놓고 대학내 기숙사에서 감전사했다. 청천벽력이었다. 내 인생에 큰 폭풍우가 한 순간에 몰아닥쳤다. 평탄하게 순항하던 배가 모진 풍랑으로 뒤집힌 것이다. 나의 폭발은 짐승이 새끼를 잃고 절규하는 처참한 형상이었다. 기절을 했다 깨어났다 하는 상황속에서도 나는 불쌍하게 이세상을 떠난 우리 유빈을 위해 뭘 해줘야 그의 영혼이 위안을 받을 수 있을지 평안을 누릴 수 있을까를 거듭 생각했다. 몸부림과 절규속에 떠오른 것은 아들을 위해 장학재단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슴의 상처를 날려보려고 세계로 떠돌며 방황을 했다. 미치지 않고 호홉하는 것이 이상했다. 환장이라도 했으면 차라리 견디기가 쉬울 것 같았다. 유빈이가 내 영혼 속에서 잠시도 떠나질 않았다. 그 아이를 잊고 사는 삶은 살아도 죽은 것이었다.
나는 매일 조금씩 미쳐가고 있었다. 언니와 나는 유빈의 산소가 있는 근교에 집을 구하러 다녔다. 유빈이 곁에서 살고 싶어서였다. 언니는 말렸다. 달랬다. 묘지가 있는 마을에서 절대로 혼자서 살 수 없다고 했다. 엄청이나 언니에게 걱정을 끼쳤다. 죄송했다. 남들은 나보고 잊으라고 했다. 잊어야 내가 살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살 수 없어도 좋았다. 잊을 수 없었다. 잊고는 더 못살 것만 같았다. 나는 숯덩이가 된 심장을 풀어낼 줄을 몰라 글을 쓰고 또 썼다. 내 심장에는 우리 유빈의 혼이 박혀 있었다. 글을 쓰는 것은 상처의 치유가 어느 정도 되기도 했다. 첫 산문집은 서울대학에서 출판을 해주었다. 서울대학의 박남식 교수님과 문희자 교수님의 지극한 정성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온갖 위로와 친절에도 불구하고 자식 잃은 어미의 갈기갈기 찢어지는 상처는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었다.
나는 원고 교정 문제로 서울대학에 며칠 머무는 기간에도 와인과 수면제 없이는 잠을 잘 수 없었다. ‘나는 이제부터 죽은 목숨이다’라고 생각했다. 내 존재를 버린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멍한 안정이 찾아왔다. 유빈은 지금도 내안에 살아 있다. 숨쉬고 있다. 깊은 물처럼 말없이 흐르며 살아 있다. 언제나 내 잠재의식과 일반의식 속에 끊임없이 희망을 자라게 해준다. 나는 아들의 목까지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어느 한 순간 다짐을 했다. 그것이 유빈의 짧은 숙명에 보답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이라고 믿었다.
2. 나무같은 하프타임
벼락을 맞은 나무를 보았다. 완전히 꺾여진 상태였다. 얼마나 아팠을까 짐작이 갔다. 다시 자라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 나무처럼 선량한 존재가 왜 벼락을 맞을까? 모든 피조물에게 일어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인가? 봄은 온 땅을 흔들어 새싹을 피워 올린다.
뜨거운 여름은 청청한 나무들로 무더위를 식혀 준다. 나무는 산소를 만들어 준다. 그늘을 만들어 준다. 시원한 바람을 주려고 온 몸으로 춤을 춘다. 자기 몸을 찬란한 색갈로 곱게 물들인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환희를 선물한다. 자신을 충실히 산 후에는 유기농 거름이 되어 지구에 큰 혜택을 준다. 그런 나무가 좋다. 나무를 바라보며 정직을 배운다. 인내와 사랑의 원칙을 깨닫게 된다. 나는 나무를 생각하며 쉼을 누릴 수 있어 감사했다. 나무같이 평생을 희생하며 사는 것이 값져 보였다. 그럴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나무처럼 내 삶을 몽땅 주는 인생은 참으로 아름다울 것 같다.
나는 아들과의 추억으로 살려고 했다. 함께 살던 아름다운 시간들을 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샌타모니카시는 떠나지지가 않았다. 바라만 봐도 좋았던 내 분신이 살던 곳이다. 아들은 나의 지붕이였고 울타리였다. 유빈이 내 곁을 떠난 후 나의 환경은 광야로 돌변했다. 온갖 들짐승들의 횡포가 가위 누르며 내 목을 졸랐댔다. 나는 무서웠다. 견딜 수 없었다.
겁이 나서 더 이상 버틸 수도 없었다. 목숨까지 내려놓았으나 두려움은 고통이었다. 나는 쉬고 싶었다. 내 인생의 전반전을 끝내고 싶었다. 어디서도 오라는 곳이 없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서울? 용인? 유빈의 무덤이 있는 용인에 가서 매일 한숨만 짖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유빈은 그 곳에 없다.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젠 유빈이가 내 삶에 더는 울타리고 지붕이 될 수 없다. 나는 혼자다. 철저히 혼자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과거에 묶여 살 수 없다. 미래를 향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원원 패러다임으로 계획을 세워야 한다. 내 인생에 새로운 틀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바다를 향해 모험의 배를 띄워야 한다. 더이상 무서워하지 말아야 한다. 두려워 하지 않아야 한다. 아파하거나 슬퍼하지 않아야 한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담대함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나는 반복적으로 내게 긍정적인 사고를 주입시켰다.
아들이 죽은 후 나는 그동안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멍청히 살았다. 때로는 아들이 꿈에 나타나 가이드 해주는 대로 살 때도 있었다. 그의 환영까지 털쳐 버리기가 그렇게도 힘이 들었다.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내 머릿 속과 가슴 밑에 꿈틀거리듯 나는 죄의식까지 느끼게 됐다.
어느날 나는 탁월한 멘토를 찾았다. 어떤 이별이든 이별은 새로운 만남의 전주곡이라 했다.
과거를 잡고 있으면 새로운 미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두려워 말고 과감히 이사를 하라고 그는 권유했다. 나는 그의 멘토링에 순종했다. 이사 결정을 했더니 하나님께서 좋은 도우미를 보내 주셨다. 내 환경을 눈동자처럼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들짐승이 우굴대는 광야가 아닌 경비원이 있는 안정된 정원으로 인도해 주셨다.
남편이나 아들은 곁에 없다. 그러나 이제 경비원이 지켜주기에 나는 오랫만에 단잠을 잘 수 있었다. 깊은 수면 후 찾아오는 상쾌한 몸과 마음은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이사와 동시에 나는 예순이 되기 전에 은퇴했다. 평생 일하며 살던 습관은 주어진 하프 타임도 편안히 쉴 수 없었다. 쉬어야 다시 에너지가 채워질 텐데. 나는 쉬는 것이 지옥이었다. 언젠가 누가 내게 쉴 줄 모르는 바보, 쉬는 것부터 배워야 겠다는 말을 한 적이 생각났다.
갑자기 시간이 덩그렇게 비어 있으니 온갖 쓰레기같은 생각들이 나를 엄습해 왔다. 내 머리와 가슴에 쓰레기 썩는 냄새가 풍기는 듯했다. 나는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것들을 차례대로 적어 보았다. 학교 공부, 봉사 활동, 세계 여행, 아이 입양하는 것, 다시 사업 시작하는 것 등이었다. 나는 한 가지씩 지워 나갔다. 그리고 끝에 남은 한 가지를 선택했다. 그것은 공부였다. 늦깎이 공부가 어렵고 힘들겠지만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다. 어차피 삶이란 내일 일어날 그 어떤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낯선 곳으로 여행하는 모험 같은 것이니까. 마치 사랑하는 내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같이. 내일 나에게 또 다른 색깔의 죽음이 덮칠지라도 후회없는 순간 순간으로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고 싶다.
새 천년이 시작된 해였다. 이천년 일월 삼일 나는 LACC(Los Angeles City College)에 등록했다. 사실 LACC에서 한때 영어와 사진을 공부한 적이 있었다. 은퇴 후 새로운 각오로 다시 교정을 밟은 마음은 더욱 흥분이 일어났다.
그러나 늦게 시작한 공부란 참으로 어렵고 힘이 들었다. 쉬우면 누구나 할 수 있겠지, 어려우니까 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프타임에 시작한 공부니까 스트레스 받지 말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하자며 자신에게 타일렀다. 내 인생의 전반전은 이미 끝났다. 나는 은퇴했다. 지금은 하프타임에 이모작을 시작한 것이다.
나에게 학교생활은 싱싱한 나무들이 우거진 숲속 마을 같았다. 젊은 학생들이 나의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젊은 학생들도 그들 나름대로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영주권이 없어 불안해 하는 학생, 일과 공부를 함께 해야 하는 학생, 이성 교제에 실연해서 상처와 씨름하는 학생.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해준다. 모든 힘든 상황은 지나가는 과정이고 어렵게 배워낸 후의 결실은 풍성할 테니 인내하라고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그들의 얼굴에는 어느새 희망의 햇살이 빛났다. 나는 돈 버는 일보다 더 값진 보람을 느꼈다.
나는 전공을 미술과 사진 중에서 고민했다. 사진과 그림 둘다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사진은 자연과 더 많은 시간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추상적인 형상을 자연 속에서 찾았을 때는 떨림을 느낄 정도로 즐거웠다. 돌덩이처럼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피사체를 찾아 온종일 산을 헤매어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미술은 나를 몰입상태로 이끌어간다. 이젤 앞에서 물감과 노는 나는 살아있는 고운 색깔로부터 전율같은 달콤한 감정을 느낀다. 그런 감성을 나는 무척 사랑한다.
캔버스 안에서 나만의 세계가 창조되고 나는 어느새 여행을 즐기며 나란 존재 자체를 잊게 된다. 어느 날은 열여섯 시간을 계속 작업해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아트는 시간을 훔치는 도적 같았다. 그림 그릴 때는 시간을 잡아 놓고싶다. 나는 아트를 전공으로 선택했다. 공부를 마친 후 그림 치료사로 봉사할 수 있고 선물로 주기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림은 소질이 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교양과목은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 영어, 수학, 과학, 역사, 그리고 심리학은 무척 어려웠다. 수학은 절벽이었다.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간절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 앞에 어려운 과목들을 내려놓고 간절히 간구했다. 기도 중에 나는 주기도문을 하루에 삼백 번씩 일년동안 올려 드리기로 서원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정말이지 업친 데 덮친 격이었다. 내가 답답하고 급하니까 기도가 절로 되었다. 그러나 기도마저 포기하고 싶은 심정일 때가 수 없이 있었다. 나는 기도 때마다 발가락 손가락을 총 동원했다. 처음에는 볼펜으로 적다가 기도의 맥이 끊어저 연구 끝에 손가락을 꼽으니까 훨 쉬웠고, 일년 동안 서원기도의 약속을 지켜냈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 나는 어느 여학생의 지도로 어려운 과목들을 모두 해낼 수 있었다.
미국에 살면 살수록 어려운 것은 영어였다. 영어는 나의 걸림돌이고 적이기도 했다. 영어시간에는 기가 죽었다. 그러나 낮은 자세로 최선을 다했다. 영어숙제 때 써낸 내 수필을 읽은 라이언 교수님은 내 번역 작품을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 당시 나는 영문으로 번역된 한 편의 소설 원고를 갖고 있었다. 내 한글판 소설은 어느 번역 작가에 의해 번역된 것이었다. 교수님은 원고를 읽으신 후, 나보고 다시 쓰라고 하셨다. 나는 감사하지만 영어 실력이 없다고 겸손히 거절했다.
교수님은 “유 켄 두 잇” 명령적인 어조셨다. 혹시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하고 약 열번만에 나는 순종했다. 나는 여러 가지 일들로 힘든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이다. 그러나 영문 원고를 다시 쓰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은 내 생애 없었던 듯하다. 소설의 시제와 연도, 장소 등 내가 하지 않고는 다른 누구도 논픽션 소설을 정리할 사람이 없다고 하신, 라이언 교수님은 초고부터 탈고까지 교정하는 중간에 학생들에게 직접 가르치며 반응을 보았다. 다행히 학생들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
내 논픽션 책은 하나님의 은혜로 라이언 교수님 수업에 교재로 채택됐다. 이번 학기에도 두 반에서 내 책으로 학생들이 배운다. 나는 기뻤다. 눈물이 났다. 내 책으로 배우는 학생들을 위해 기도했다. 인내와 노력과 열정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어 성공하기를. 나는 감사했다. 라이언 교수님과, 내 책으로 공부하고 많은 편지를 보내준 학생들, 내가 공부하는 일을 잘 한다고 언제나 용기과 힘을 실어준 친구와 가족들, 내가 아는 모두에게, 그리고 자연에게.
나는 나무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 나의 스승이다. 삶을 가르쳐 준다. 한 자리에서 평생을 지켜내는 인내를. 처음부터 끝까지 희생하는 봉사 정신을. 새들이 집을 짓도록 자신의 몸까지 내어주는 나무. 나는 나무로부터 인내를 배우며 기도의 힘으로 해냈다. LACC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AIU LA(American Intercontinental University Los Angeles)로 전학해서 BFA학위를 받았다. 지난 해 여름학기는 AIU London 영국에서 박물관학과 사진학을 연수했다. 현재는 CSUN(California State University Northridge)에서 아트 전공으로 대학원 과정에 있다. 이 모든 것은 하프타임에 십년을 심고 가꾸며 열매 맺은 내 인생 이모작의 결실이다.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셨기에 가능했다. 나는 다시 감사했다. 하나님과, 나를 도와주신 모든 분께. 그리고 언제나 나에게 침묵으로 교훈을 준 나무에게.
3. 먼저와 반응의 후반전
비바람과 벼락 같은 풍파가 내 삶에 수없이 몰아쳤다. 이젠 ‘먼저와 좋은 반응’이 내 모토다. 먼저 미소 짖자. 웃자. 인사 잘 하자. 봉사하자. 행동으로 실천하자. 나는 ‘먼저’란 말을 좋아한다. 먼저(first, first of all). 이 단어가 얼마나 좋은가. 먼저 이해하자, 용서빌자, 사과하자, 사랑하자, 되도록 모든 일에 내가 먼저 손 내 밀고 낮아지자.
그리고 나는 ‘반응’이란 단어도 좋아한다. 좋은 반응은 만사를 형통케 한다. 긍정적으로 반응하자. 좋게 반응, 이해하는 반응, 후회 없는 반응, 믿음과 사랑으로 반응, 재치있는 민감한 반응, 열정적이고 긍정적 반응은 내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어 준다. 부정적인 사고는 나를 죽인다. 실망 시킨다. 병들게 한다. 아프게 한다. 절규하게 한다. 처절하게 한다. 슬프게 한다.
무슨 일이든 걱정하게 만든다. 안될 것부터 생각하게 한다. 부정적인 뿌리가 심하면 결국은 우울증이 생긴다. 부정적인 것들이 마음 밭에 쏟아지면 나는 뿌리 내리지 못하게 한다. 즉시 좋은 단어나 문장 같은 것을 생각하는 습관을 길렀다.
예를 들면, 윈윈 패러다임, 발전적 시스템, 소유의 프레임보다 존재의 프레임, 하프타임으로 이모작 인생, 레드 오션이 아닌 불루 오션으로 의미와 보람을 찾을 것, 삼모작 인생을 비전을 갖고 뛸 것, 힘이 있는 단어들을 모아 긍정적이고 꿈이 있는 아름다운 언어를 디자인해 본다.
삶이 밝고 맑아진다. 즐겁고 행복해진다. 희망이 생긴다. 인생 후반전이 훨씬 풍성해질 것이다. 축복이 될 것이다. 기도로 내 의식을 햇살 퍼지는 빛으로 재충전한다. 하면 된다. 안될 일 없다. 나는 즐겁다. 행복하다. 감사하다 등을 수 없이 반복하면 정말 그렇게 된다. 반복은 나의 스승이다. 꿈이 없는 인생은 힘이 빠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죽은 목숨 다를 바 없다는.
물론 ‘먼저와 좋은 반응’은 나를 난처하고 손해 보게 하는 경우도 때때로 있다.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먼저와 반응에 민감하게 대처하지 못할 때이다. 지혜롭게 사리 판단을 하지 못할 때이다.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면 잃는 것이 많다. 펀드와 주식에 잘못 투자해서 재가 됐다. 부동산도 막차 타서 날아갔다. 가기 싫어했던 아들을 서울로 연수 보냈다가 잃었다. 돌아보면 못된 것들은 나의 한탕주의와 지나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패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동반했다.
그러나 아무리 큰 고난도 지나가는 장마였다. 고통은 흑진주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아들의 죽음은 침 상자를 통째로 심장에 쏟아 붓는 고통이었다. 온가슴에 장작불이 타는 아픔이었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는, 말로는 표현 불가능한 그런 괴로움이었다. 그러나 이젠 내 인생에 먹구름과 소나기가 그쳤다. 비구름 너머로 찬란한 태양이 빛나고 있으니까. 자연의 변화처럼 내 인생도 그랬다.
우리 유빈이 못다한 공부를 내가 대신 해냈다. 만약 하늘나라에 학위가 필요하다면 내 정성을 모두 올려 보내고 싶다. 유빈은 하늘나라서 기뻐할 것이다. 땅의 나라를 내려다보며 엄마 잘 한다고 큰 박수를 보내겠지. 아름다운 별빛으로 찬란한 햇살로.
나의 삶은 모험이다. 어려운 체험이다. 현대는 돈으로 얼룩진 세상으로 변해 있다. 돈보다 더 귀한 것이 경험이다. 모험이다. 모험은 때때로 두렵다. 그러나 두려움을 이겨내면 발전이 있다. 결실을 얻는다. 성공과 만나게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경험이 있다. 그것은 보물같은 재산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도 있지 않은가. 사업에 실패한 사람은 앞으로 사업을 더 잘 할 것이다. 연애에 실연한 사람은 경험을 통해 더 좋은 관계에 성공할 것이다. 나는 꿈을 크게 갖는다. 높은 이상을 꿈으로 삼고 노력한다. 누구나 자기의 삶을 쓰고 다듬으면 작품이 될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올해 내 계획은 대학원 과정을 계속하는 것이다. 열심히 배워 그림 치료사가 되고 싶다. 저녁에는 독서 지도사와 독서 코치반을 수강한다. 책은 내 가장 귀한 친구 중의 하나이다. 독서는 나에게 삶의 길을 제시해 준다. 저자는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시켜준다. 동반자가 되어 주기도 한다. 책은 나에게 시간을 가장 많이 내어 달라고 보챌 때도 있다. 지혜를 준다. 때로는 의사 역할까지 해준다. 책을 잘 선택해 읽고 글을 쓰면 깊은 상처도 치유 받게 된다. 이것 역시 생생한 나의 체험이다. 내게는 너무나 귀한 경험이다. 책을 통해 아들 잃은 상처를 많이 치유 받았다. 책이 주는 정보와 유통으로 나의 삶이 풍요롭다. 나는 책에게 정말 감사한다. 책을 사랑한다. 핸드백 속에도, 화장실에도, 부엌에도, 침실에도, 화장대 앞에도, 응접실 티 테이블 위에도 내가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책이 있다. 내가 책을 좋아하니 책이 어디에서나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인생 전반전을 억척스럽게 살았다. 살기 위한 수단으로 경제적 기반 마련이 시급했고 아들의 교육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물이 흐르듯 모나지 않게 살았다. 이모작은 벼락맞은 나무를 다시 소생시킨 삶이었다. 나무로부터 인내를 배우며 책도 내고 사진과 그림 전시회도 여러 번 했다. 하프타임에 목표에 달성한 승리의 삶을 살았다. 결핍의식을 버리고 풍부의식을 갖고 긍정의 자세로 임한 덕분이었다. 내 인생의 후반전은 올해부터 준비하며 동시에 봉사자로 행동하는 삶을 살 것이다.
독서 지도사와 독서 코치를 교육 받아 독서와 그림 치료자가 되고 싶다. 지금까지 갈고 닦은 풍성한 결실을 광주리째 따서 필요한 사람들께 남김없이 나누어 주고 싶다. 그리고 나처럼 상처받은 많은 영혼을 위해 의미 있고 보람된 삶을 살고 싶다. 물처럼 모나지 않는 마음, 나무처럼 인내와 희생의 사랑, 그리고 ‘먼저와 반응’을 긍정적으로 실천하며, 내 인생의 마지막 무대를 하프타임 새 작전으로 전반전보다 더 노력하고 열정적으로 살고 싶다.
<끝>
당선 소감-이혜영
부산에 내가 내린다. 해운대로 갔다. 친척들과 점심 약속이 있었기에 동생이 운전하는 옆자리에 앉아 차창밖을 내다보았다. 지난 날이 인터넷에 뜬 장면처럼 내 가슴을 밟고 지나갔다.
인생 전반전은 폭풍우가 내 가슴을 파괴했던 날들이 참 많았다. 그건 표현 이상의 아픔이고 슬픔이었다. 나는 걸었다. 오늘 내리는 빗방울 사이로, 사랑, 기쁨, 은혜의 물줄기가 전반전과 달리 내 빈등을 감싸주었다. 내가 자라고 학교를 다녔던 부산, 엄마의 내음만큼이나 정겹다. 고향이 있고 잘 사는 조국이 있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복인가.
많은 분들의 값지고 훌륭한 경험, 성공기 체험담 등 주옥같은 많은 원고 응모에 감히 내 얘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전과 힘이 될 수 있을까?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다. 부족한 글을 끝까지 읽느라 수고하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내 인생 후반전을 더 열정적으로 살라는 격려의 뜻으로 받고 싶다. 내 글을 보듬어준 후배 윤은영과 함께 이 기쁨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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