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L 101년만에 27이닝 연속 무실점 피칭
선발투수는 선발투수라서 집중조명을 받는다. 마무리투수는 마무리투수라서 돋보이게 눈길을 잡아끈다. 선발과 마무리 틈바구니에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별로 주목을 못받는 투수들이 있다. 중간계투 요원들이다. 말 그대로 중간에 나와 이음매 역할을 하는 투수들이다.
출격에는 대중없다. 선발투수가 얼마나 버티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그 즈음의 스코어에 따라서, 또 상대타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중간계투 요원들의 투입색깔은 언제든지 달라진다. 언제 호출신호가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늘 출격대기 상태로 불펜을 지켜야 한다.
선발투수는 이기든 지든 한번 출격하면 대개 나흘동안 비상호출 부담없이 덕아웃에서 노닥거릴 수 있다. 마무리투수는 큰 점수 차이로 이기거나 지고 있으면 오늘은 공치는 날이구나 감을 잡고 한시름 놓을 수 있다. 중간계투 요원들에게는 마무리투수가 누리는 정도의 끝물 반짝자유조차 거의 없다. 중간계투 임무를 성공리에 완수했을 때 홀드(hold) 기록이 쌓이기는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이나 선수사냥꾼(스카웃)들 말고 일반 야구팬들 가운데 홀드 기록까지 꼼꼼히 챙겨 호응해주는 경우는 드물다. 별별 시시콜콜 스토리까지 훑어내는 야구기사에서도 홀드 기록은 홀대받기 일쑤다.
브랫 지글러(Brad Gregory Ziegler).
그의 보직은 중간계투 틈새투수다. 오클랜드 A’s 선수다. 마이너리그에서 기약없이 해뜰날을 기다리다, 한국식 계산법으로 서른 다 된 나이에(1979년 10월10일생) 올해 5월31일 처음으로 메이저 마운드에 올랐다. 캔사스주 프랫 출신의 덩치 큰 이 우완투수(6피트4인치/195파운드)에겐 그나마 행운이었다. A’s의 불펜이 시즌 초반 부진한 덕분에 잡은 땜빵용 승격이었다. 안타 하나 맞고 삼진 한명 잡고 0.1이닝만에 임무 끝. 그의 메이저리그 데뷔피칭은 그랬다.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원정경기에서였다. 그날 경기는 A’s가 4대8로 졌다. 아마도 지는 경기라 맛뵈기로 기용됐을지도 모른다.
그런 지글러가 거의 두 달 지난 7월27일까지 무실점 피칭을 보이리라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해냈다. 총 23게임에 틈새투수로 출격해 27이닝동안 0실점. 방어율은 당연히 0.00이다. 1907년 이후 101년만에 최다이닝 연속무실점 대기록이다. 선발투수로 치면 3게임 연속 완봉승과 같은 무실점 행진이다. 그동안 16안타를 맞고 6볼넷을 내줬다. 13명을 삼진아웃으로 솎아냈다. 공은 도합 350개를 뿌렸다.
대개들 무관심한 가운데 한올한올 이어오다 기어이 해낸 101년만의 대기록은 27일 이뤄졌다. 공교롭게도 상대는 그의 데뷔전 상대와 같은 레인저스. 장소는 오클랜드로 바뀌었다. 승패도 그때와는 달랐다. A’s의 6대5 승리.
대기록의 날 첫 상대 마이클 영은 속도와 각도와 로케이션이 절묘하게 배합된 지글러의 피칭에 방망이를 휘둘러보지도 못한 채 바라만 보는 삼진으로 물러났다. 두 번째 상대는 자시 해밀턴. 전매특허 타점(103타점)은 물론 홈런(24홈런)과 타율(3할2리)에서도 선두그룹에 든 강타자 해밀턴은 방망이 근처에서 돌연 휘어지는 지글러의 공에 속아 헛스윙 삼진을 먹고 덕아웃으로 향했다. 지글러는 다음 타자 밀턴 브래들리(타율 3할1푼2리, 19홈런, 58타점)에게 1루수쪽 내야안타를 맞았으나 그 다음 말론 버드를 3루수 땅볼로 처리하며 무실점 행진을 26이닝으로 늘렸다.
6대5 스코어에 변동없이 8회초 다시 마운드에 오른 지글러는 행크 블레일락을 헛스윙 삼진으로 잡은 뒤 제럴드 레어드에게 중전안타를 맞았으나 크리스 데이비스를 병살타로 처리, 27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을 세우고 덕아웃으로 물러나 동료들의 축하세례를 받았다. 아직까지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팀별 선수소개란에 사진도 없이 나이와 출생지 등 몇줄짜리 이력만 달랑 적혀있는 철저한 무명투수 지글러는 7월 마지막 일요일에 세운 대기록 덕분에 자신의 피칭 때 쓴 공 2개, 스타킹 한 켤레, 모자를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영구보존용으로 보내게 됐다.
지글러는 이렇게까지 하리라고 생각이나 했었는지 나도 모르겠다며 여기까지 오느라고 정말 열심히 했다는 생각은 든다고 말했다. 개인의 무실점 행진과 팀의 승리행진을 함께 바라는 소망을 덧붙였다. 고맙게도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라건대 우리가 승리를 계속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9회에는 휴스턴 스트릿이 레인저스의 마지막 공격을 봉쇄했다. 이날 출격으로 지글러는 8홀드를, 스트릿은 18세이브를 올렸다. 승리투수는 제레미 블레빈스(1승1패)가 차지했다. 선발투수 대나 이블랜드(4.2이닝 8안타 2볼넷 5삼진 5실점)가 5이닝을 채우지 못하고 강판되는 바람에 부랴부랴 투입돼 1.1이닝동안 틈새피칭을 한 블레빈스는 때마침 A’s 타선이 승리득점을 올려준 덕분에 메이저리그 첫 승리를 기록했다. 잭 커스트와 커트 스즈키는 각각 홈런을 치며 A’s의 3연패 사슬끊기를 주도했다.
A’s는 앞서 금요일(25일) 경기에서는 6대14로, 토요일 경기에서는 4대9로 졌다. 레인저스와의 홈구장 주말 3연전에서 본전치기(2승1패) 대신 밑지는 장사(1승2패)를 하는 바람에 A’s(53승51패)는 아메리칸리그 웨스트 디비전에서 레인저스(54승51패)에 반게임 차이로 3위에 머물렀다. 1위는 LA 에인절스(64승40패)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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