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희 교육가. 수필가
둘째날은 터키의 가장 위쪽에 위치한 이스탄불에서 가장 남쪽 끝에 있는 도시 아다나를 향해 떠나기 위해 공항에 도착하였다. 사도 바울의 생가가 있는 닷소를 방문하기 위해서이다. 거리가 멀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고 가는 도중에 기독교 박해를 피해 건설되었던 지하도시 카파토키아를 경유했으나 그 다음날 다시들러 바위를 파서 교회를 만든 괴뢰메 계곡의 수 많은 비둘기 집으로 유명한 비둘기 골짜기 우치하사르 등 카파토키아 순례를 제대로 마치고 돌아와 콘야의 호텔 안에서 터키탕 사우나를 즐겼다.
넷째 다섯째 날은 주로 소아시아 7교회들을 둘러보았는데 먼저 비시디아 안디옥 순례후 차지도 덥지도 않아 입에서 토하여 내치겠다는 라오디게아 교회, 오직 칭찬만 받았던 빌라델피아 교회, 살아있지만 죽은 교회 사대(리디아 왕국의 수도), 리디아의 고향인 두아디라에 세워진 교회, 사단의 위에 있는 버가모 (페르가믐) 교회를 들렀다. 여섯째 날은 이 순례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사도 요한이 유배를 당한 밧모(Patmos)성을 가는 날로 우리 일행 모두의 가슴은 기대와 흥분으로 벅차올랐다.
과연 크리스천이라면 한번 쯤 꼭 가 볼만한 곳이었다. 계시의 굴에 성치 못한 노구를 의지해서 사도 요한이 누워있던 자리, 그 곳이 바로 주님의 계시를 받았던 곳이고 천장에는 계시를 받을 때 나팔소리에 의해 갈라졌다는 세 갈래의 바위틈새가 지금도 생생하였다.
일곱째의 마지막 날에는 아시아 7 교회 중 주님의 첫 사랑을 잃었다는 에베소 교회와 터키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 이즈밀(Izmir)에 위치한 폴리 갑 순교 기념교회라고도 하는 서머나 교회를답사 했다. 이 답사를 위해서 먼저 도착한 곳이 지금 셀주크라고도 불리는 에게해 연안에 위치한 고대도시 에페스(에베소)였다. 이 도시의 광대한 규모와 위용에 압도당한 순례자들에게 수많은 유적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도 요한의 무덤이 있는 성채, 인구 2만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 로마 총독이었던 이우라우스 이킬라가 역시 로마 총독이었던 자신의 아버지 셀수스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거대한 셀수스 도서관, 당시 정부 차원에서 교역이 행해지던 정부 아고라, 목욕탕, 공중화장실, 한 없이 아름답고 우아하지만 위엄을 잃지 않고 있는 아르테미스(아테미) 여신상 등 등 그 이름도 다 욀 수 없는 유적지로 머리속은 온통 뒤죽박죽이 되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역사적으로 많은 민족과 문화가 이곳을 지나갔고 기원전 546년에는 페르시아가 이 땅을 점령했으며 기원전 479년후에는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고 기원 후에는 로마 통치를 받게 되었다는 것과 사도 바울에 의해서 기독교가 처음으로 이 도시에 전파되었고 또 사도 요한의 활동 중심지였다는 사실이다.
어느덧 8박9일을 보내는 동안에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에덴동산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터키, 노아의 방주가 머물렀으며 그 잔해가 남아있는 아라랏산이 있는 곳, 사도 바울의 1, 2차 전도지, 요한 계시록의 소아시아 7 교회가 있는 성지를 다 둘러보게 되었다. 그리고 내 교회는 아니지만 주 안에서 형제자매가 되어 여러 날을 같이 지나게 되었던 사랑하는 성도님들, 특히 내 동생 내외와 같은 룸메이트로 고락을 같이 했던 우리 사돈, 또 나의 대학 동창인 친구 등, 35명의 정든 식구들과 헤어져야 하는 터키성지 순례를 모두 마쳤다.
그러나 여행하는 동안 나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은 어찌하여 사도 바울의 전도지이며 사도 요한의 활동의 중심지였던 이곳, 또 7 교회가 버젓이 세워졌던 이 땅이 어찌하여 지금은 90%이상의 이슬람교인으로 꽉 차버린 지역으로 바뀌어 버렸는가 하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2000여년 동안의 역사의 흐름과 그 공백이 너무 안타깝고 슬플 뿐이다. 하지만 이번 터키 여행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가장 인상적인 것은 터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가이드의 애절한 호소도 있었지만, 실제로 여러가지 자료를 찾아보니 터키와 우리나라가 형제의 나라라는 이유가 있었다.
같은 우랄알타이 계통이었던 고구려와 돌궐(투르크)은 동맹을 맺어 가까이 지낸사이였는데 돌궐이 위구르에 멸망한 후 남아 있던 이들이 서방으로 이동하여 결국 후에 오스만 투르크(터키)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오슨만 터키 제국을 건설한 그들은 자기들의 역사를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고, 그들의 역사책은 돌궐 시절의 우방국 고구려에 대한 설명히 상세한 편이여서 고구려의 후예인 한국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터키가 6전쟁 때에 16개국의 파병중 미국 다음으로 많이 파병한 (15,000명 파병, 770명 사망)
나라이었던 것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한국은 우리의 역사책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처럼 돌궐에 대한 기억과 사랑을 키우지 못했던 것 같다.
여기에 얽힌 하나의 에피소드가 참 재미있다. 88 서울 올림픽 때에 터키의 한 고위층 관계자가 한국을 방문했다. 자신을 터키인이라 소개하면 큰 환영을 받을 줄 알았던 그는 의외의 시큰둥한 반을을 나타낸 한국에 대해 크게 실망하고 돌아가 신문에 기고하기를 ‘이제 짝사랑을 그만 둡시다’라는 글을 썼다고 한다. 한국과 터키의 이러한 어색한 기류가 참 멋있게 반전된 것은 지난 2002년 월드컵 축구 경기였다. 터키 유학생들이 터키인들의 따뜻한 한국 사랑을 소개하자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 터키를 응원하자라는 내용의 글이 인터넷을 타고 여기저기 퍼져나갔고 결국 터키와 3,4위전 때 자국에서 조차 본 적이 없는 대형 터키 국기가 관중석에
펼쳐지는 순간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터키인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경기는 한국 선수들과 터키 선수들의 어깨동무로 끝나면서 양국의 사랑을 확인 시켜주는 장면이 펼쳐 졌다는 이야기이다.
여행에서 돌아와 6를 보내면서 ‘터키의 한국사랑’에 대해 얼마나 생각 했던지 그 나라가 도무지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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