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코바 발 근착 외신은 1918년 볼셰비키 혁명의 와중에 처형된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 마지막 황제 니콜라스 2세 일가의 기구한 운명을 전했다. 그 동안 미제로 남아있던 알렉세이 공자와 마리아 공주의 매립지가 최근 발견되었고 이들의 유해에 대한 DNA 검증을 거쳐 10년 전 우랄 산맥의 외진 마을 예카테린부르그에서 찾아 페트로그라드의 ‘성 베드로와 바울 성당’에 안장된 이들 부모와 처형 90주년이 되는 지난 7월 17일 마침내 합장되었다는 소식이다.
화려했던 제정 러시아 왕가의 비참한 운명이 던진 명암이 투영하는 역사의 교훈은 과연 무엇일까? 19세기 말 서구의 산업화에 따라 봉건제도에 항거하는 자유주의와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떠오른 사회주의 사상이 유럽의 오지 러시아를 성난 파도처럼 덮치고 있었다. 이에 맞선 것은 전제군주 짜르 정부의 혹독한 탄압이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 탄압의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1905년 1월 9일 제정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 있는 짜르 니콜라스 2세의 동궁(冬宮) 앞 광장에 20만이 넘는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초상화를 들고 “하나님, 짜르를 보우해주소서”라는 찬송을 부르며 그들을 혹독한 가난에서 구해줄 것을 호소하기 위해 모였다.
이윽고 이 평화로운 시위대의 맨 앞에 서있던 러시아 정교회 신부인 가퐁이 이렇게 애소(哀訴)했다. “폐하, 저희들은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정도로 비참한 생활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부디 저희들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노동은 규정된 시간에만 하도록 선처해주시고, 하루에 단 1루불 만이라도 노동의 대가를 받게 해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시면 저희들은 물론 저희의 후손들까지도 폐하의 이름을 영원히 가슴에 간직할 것입니다.”
이때 동궁 앞에 친 바리케이드 뒤에서 총을 겨누고 있던 짜르 군대의 총구에서 총탄이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하얀 눈 위에 붉은 피가 튀었다. 대열은 흩어지고 텅 빈 광장에는 5백여 구의 시체가 뒹굴었고 수천 명의 부상자들의 신음소리가 진동했다.
이 사건은 당시 러시아의 3천여만 인구 중 2천만 명이 넘는 가난한 노동자와 농노들의 가슴에 짜르와 그가 상징하는 제도와 질서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일시에 무너뜨렸다.
이때부터 노동자와 농노 사이에서 내연하기 시작한 혁명의 용암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활화산이 되어 곳곳에서 끝없이 분출해 나갔다. 1917년 3월 8일 수도 페트로그라드에 또다시 대규모 항의 시위가 일어나고,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단행했다. 드디어 짜르 군대의 사병들이 이에 동조하여 소비에트(협의회)가 조직되었다. 짜르 정부는 붕괴되고 두마(국회)에서 선출한 노동자, 병사 대표실행위원회가 임시정부로 들어앉았다. 이 위원회는 곧 황제의 퇴위를 결의한다.
그리고 니콜라스 2세와 그의 일가는 결국 볼셰비키 혁명 이듬해인 1918년 7월 17일 에카테린부르그의 외딴 집 지하실에서 총살되었다.
볼셰비키 혁명은 인간이 스스로의 자각과 의지에 의해 계급 없고 모든 재산을 공유하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으로 한때는 불평등과 사유재산에 의한 인간의 보편적 가치의 파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정치적 제도와 질서를 구축할 수 있다는 꿈과 낭만이 20세기를 풍미했으며, 지구의 곳곳에서 그 정치적 실험이 성공하는 듯 했다.
실제로 이 혁명은 소비에트연방 건설 불과 20년 만에 낡은 봉건체제에서 신음하던 후진 농업국가였던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막강한 공업국인 히틀러의 독일과 싸워 승리를 쟁취하고 미국과 필적하는 산업국가로 등장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뿐 아니라 1957년에는 우주선 스푸트니크를 띄워 자본주의 미국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1961년 유인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지구 궤도에 오른 유리 가가린 소령이 지구는 푸르다고 타전했을 때 많은 서방 옵서버들은 “미소의 게임은 이제 끝났다”고 외쳤다.
그러나 스탈린 집권 이후 소비에트 공화국의 경직된 전제체제와 공포정치는 볼셰비키 혁명이 타도를 외쳤던 바로 그 구체제에 복귀하는 과오를 범했고, 공동소유의 보편적 귀속감은 소득을 위해 노력한 개인이 분배에 대한 결정권이 박탈된 사실을 뒤늦게 깨닫자 배신감으로 변했다. 거기에 전체주의는 인간의 창의력과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 무엇보다도 혁명세대의 이상주의의 열기가 지속될 수 없었던 점도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실험이 실패하게 된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를 볼셰비키 혁명이 추구한 이념적 가치 그 자체의 실패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볼셰비키 혁명은 그 이전의 체제에 온존했던 제도적 불의의 종식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역사의 큰 전진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해 본다.
이선명 /US News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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