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는 국가와 함께 시작된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등 4대 문명은 모 두 큰 강 부근의 광대한 농토를 기반으로 한 국가의 탄생과 함께 일어섰다.
이들 문명의 공통점은 절대 다수인 가난한 농민과 이들이 생산한 부를 독점한 집권층, 집권층의 권력을 물리적으로 지키는 군대, 이들의 집권을 정신적으로 지지하는 사제집단으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일반 국민은 파라오와 천자에 봉사하기 위한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집트와 중동, 인도와 중국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똑같은 형식의 체제가 수천 년 동안이나 계속 유지돼 왔다는 것은 이것이 인간 사회의 가장 흔한 존재 방식이었음을 말해준다.
인간은 집권자의 노예가 아니라 국가의 주인이라는 유별난 생각을 처음 한 것은 그리스의 작은 도시국가 아테네 사람들이었다. 물론 모든 인간이 아니라 자유인인 성인 남성에 국한된 것 이었지만 소수의 왕과 귀족이 아니라 일반 시민이 스스로를 ‘자유인’이라고 부른 것은 혁명적 사건이었다. 이 정신은 근대 시민혁명을 거쳐 “모든 인간은 창조주로부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국가가 창설되었음”을 선포한 미 독립 선언서에서 그 절정을 맞는다.
그러나 인간은 국가에 봉사하기 위한 존재이며 모든 가치는 국가에 있고 개인은 무가치하다는 생각은 근대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 생각을 집대성해 20세기 현실 정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철학자가 있다. 칸트와 쌍벽을 이루는 독일 관념철학의 대가 헤겔이다. 헤겔 철학은 왼쪽으로는 마르크스를 통해 공산 전체주의를, 오른쪽으로는 파시즘과 나치즘, 천황주 의 등 국가 숭배주의의 기간이 된다.
자유 민주주의와 우파 전체주의의 싸움이었던 제2차 세계 대전, 자유 민주주의와 좌파 전체주의의 싸움이었던 냉전,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자유 민주주의와 회교 파시즘과의 싸움 등 지난 수십 년 간 지구를 피로 물들인 전쟁은 결국 궁극적인 가치가 개인이냐 국가냐를 가리기 위한 이념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체주의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인명에 대한 경시다. 국가와 집권자를 위해서라면 개개인의 목숨 따위는 초개나 다름없다. 무고한 사람 수백만을 개스실로 보낸 나치나 적진에 돌격하지 않는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뒤에서 사살한 소련군, 젊은 학도병을 가미가제란 이름으로 비행기에 태워 폭사시킨 일본군 모두 방법만 달랐지 밑에 깔린 사고방식은 똑같다.
지금부터 25년 전인 1983년 9월 1일 한국민들은 전체주의 국가의 군대란 어떤 것인가를 확인했다. 소련 영공에 허락없이 들어왔다는 이유로 269명의 민간인이 탄 대한항공 여객기에 미사일을 발사, 격추시켜 버린 것이다. 소련 당국은 사건 발생후 유감을 표시하기는 했지만 이 비행기가 스파이 활동을 했다며 책임을 미국에 전가하기에 급급했다.
전체주의의 본질에 무감각해진 한국민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 지난 주 발생했다. 금강산 관광을 갔던 한 여성이 새벽 철책을 넘어 산책을 하다 북한군의 총격을 받고 사망한 것이다. 북한 측은 이번 사건에 유감을 표시하면서도 모든 책임을 남쪽에 떠넘기고 있다. 정확한 사건의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북한군이 남한 관광객을 총격 살해한 것은 분명하다.
관광객이 경계선을 넘어왔다고 총을 쏴 죽인다는 것은 한국민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으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국가의 이익에 비해 개개인의 생명은 파리 목숨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수천만 국민이 김정일 하나를 위해 존재하고 아우슈비츠와 비아프라가 함께 있는 나라가 북한이다. 수백만이 아사하고 수십만이 강제 수용소에서 신음하고 있는 나라에 관광을 간다는 것 자체가 기괴한 일이다. 이번 금강산 살인 사건은 북한식 사고방식과 북한 체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줬다. 아무도 먹고 죽은 이가 없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는 밤을 새가며 촛불을 밝히지만 참혹한 북한의 실상에 눈을 감는 한국민들이 하루 속히 깨어나기를 바란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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