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 온 한국의 첫 민간 대북방송사 ‘열린 북한방송’ 하태경 대표
‘북한인권 국제 컨퍼런스’ 준비
한국의 첫 민간 대북방송사인 ‘열린 북한방송’의 하태경 대표(40.사진)가 워싱턴을 찾았다. 오는 9월말 서울에서 개최하려는 ‘북한 인권 국제 컨퍼런스’ 준비를 위해서다.
“미국 내 NGO들과 공동으로 행사를 추진 중입니다. 북한의 여성과 아동, 장애인 등 마이너리티의 인권과 식량문제와 인권, 인권 개선의 실용적 방법 등 세 가지를 주요 섹션으로 삼아 다루고자 합니다.”
북한의 ‘인권’과 ‘민족의 화해’는 그가 청년시절부터 길고도 넓게 다차원적 천착을 해온 과제다. 지난 2005년 서울에다 설립한 ‘열린 북한방송’도 그 민족적 과제를 위한 도구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남한의 국민들과 북한의 인민들이 진정으로 화해하기 위해서는 서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대화를 해야 합니다. 특히 폐쇄된 체제에 살고 있는 북한 주민들과 많은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북한 주민들과 대화할 수 있는 통로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열린 북한방송은 그 통로를 열어주고자 설립했습니다.”
워싱턴에 본사, 서울서 제작
아직은 생소한 이 라디오 방송사는 한국에서 민간이 세운 첫 대북방송사. 워싱턴에 ‘본사’를 두고 서울에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전파를 쏘고 있다.
단파를 이용하는 열린 북한방송은 그동안 매일 새벽 1시간씩 방송하던 시간을 지난 7일부터 하루 2시간으로 늘렸다. 북한 전역과 중국의 동북 3성에서 들을 수 있다 한다.
하 대표가 꼽는 이 방송의 가장 큰 특징은 일반인이 참여하게끔 하는 열린 운영방식.
“북한 주민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싶으신 분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재미동포 분들도 환영합니다. 이산가족 사연이나 북 주민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나 노래 등 내용을 글로 써서 이메일 또는 MP3에 녹음해 nkradio@naver.com으로 보내주면 됩니다.”
‘비정치성’ 지향도 이 방송의 특징 중 하나다. 그래서 북한 핵, 기아, 인권 같은 정치색 강한 소재는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대신 이산가족의 편지, 영어 강좌, 웰빙 건강법 같은 재미를 곁들인 ‘교육, 문화물’로 프로그램을 편성한다.
북한서는 미국 지원들어 비난
하지만 하 대표가 소개하는 개국 취지와 달리 북한의 반응은 결기에 차 있다. 최근 북한의 대남기구들은 이 방송사 등을 거론하며 “남조선의 보수집권 세력이 미국과 일본의 우익, 보수 세력과 결탁해 대북방송을 강화, 동족과의 사상대결, 체제대결을 불러오고 있다”고 비난을 쏟아냈다.
이에 대해 하태경 대표는 “우리는 대북 비방방송이 아니며 대북 비판이든, 지지든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 어떤 내용도 방송한다”면서 “북한 주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실용적 정보를 제공하고 세계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교양을 전달하며 민족화해를 위해 남한 바로 알기를 하자는 게 우리의 모토”라고 반박한다.
그가 이처럼 북한의 심기를 건드린 이유 중의 하나로 미국으로부터의 지원을 빠트릴 수 없다. 미 국무부가 주는 대북방송 지원예산 가운데 첫 해분 100만 달러의 공동 수혜자 세 곳 중 하나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이는 정치적 오해입니다. 저는 투자 유치를 했다고 농담 삼아 주장합니다. 워싱턴은 자기 나라의 이해를 위한 재정 지원을 받기 위한 세계의 각축장이기도 합니다. 미 기금은 제가 치밀하게 논리를 세워 관계자들을 설득해서 받은 겁니다. 그들이 방송사 운영에 간섭하는 것은 없습니다. 내년부터는 EU로부터도 기금을 지원받을 예정입니다.”
대학시절 국보법 위반 징역
북한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그는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통일운동’의 젊은 기수였다. 서울대 물리학과 86학번인 그의 대학시절은 최루탄 냄새와의 싸움으로 시작됐고 결국 세계적 과학도의 꿈은 스스로 버려야 했다.
그는 비밀 지하조직을 구성해 전대협을 배후 조종하며 국가 이적 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구속돼 1년9개월간 투옥생활을 했다. 혹독한 고문은 더 이상 거론하기 싫은 과거다.
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 특사로 풀려난 그는 ‘통일맞이 NGO’를 이끌던 문익환 목사의 정책비서를 맡아 94년까지 활동했다.
이 ‘붉은 운동권’이 ‘전향’을 한 건 90년대 초반 사회주의의 해체과정을 지켜보면서였지만 결정적 계기가 된 건 북한의 실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 때문이었다. “91년 발족한 범민련이 해산하자 북측에서 문 목사님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안기부 프락치’란 비난이었습니다.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북한 실체에 대한 새 인식 가져
탈북자들과의 만남도 그의 세계관의 변화를 이끌었다. 부산대학교 영어 동시통역대학원 석사(96년), 고려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석사(99년)를 마친 그는 미국 유학을 준비하다 북한 난민들의 대량 탈북을 보고 방향을 중국으로 틀었다. 길림대학교 동북아연구원에서 박사학위(2001년)를 받은 그는 동족이 죽어나가는 현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중국에서 공부하며 수많은 탈북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북한 정권의 성격이 제가 싸웠던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보다 비교가 안될 정도로 반인민적이란 생각을 굳혔습니다. 제가 북한 인권운동을 하게 된 것도 80년 광주에 영향을 받은 학생운동 시절의 초심과 같습니다. 사람이 인생을 바치는 건 아이디어나 이론이 아니라 가슴을 후려치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대학시절의 초심이 이제 경계를 넘어 북한 주민들에로 향하고 있을 뿐입니다.”
“인권-식량문제 함께 접근해야”
2005년 봄 4년간 다니던 SK 텔레콤 경영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을 그만둔 그는 미 워싱턴으로 왔다. 민주주의기부재단(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에서 펠로십을 받은 그는 1년6개월간 체류하며 중국에서 가졌던 북한 주민들의 복리와 민족화해를 향한 꿈을 설계했다.
열린북한방송을 운영하며 북한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접하고 있다는 하 대표는 식량난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으나 굶어죽는 상황은 아닌 것으로 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식량지원도 취약계층과 지역을 골라 돕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식량가격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시장에 쌀이 있는데 기아 문제가 발생하는 건 식량난이라기보다 분배의 문제입니다. 즉 취약지역과 계층에 대한 빈곤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는 겁니다. 막연한 총체적 식량난 접근은 적절한 해법이 아니며 지역이나 취약계층을 고려한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접근을 해야 이 문제가 완화될 수 있습니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하태경 대표는 “북한도 경제발전을 하려면 글로벌 스탠드가 된 인권을 외면하기 힘든 세상이 됐다”며 “식량지원과 인권 문제는 뗄 수 없으며 함께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 대표는 15일 저녁 7시 본보 문화센터에서 열리는 PNP포럼에서 북한 문제를 주제로 강연할 예정이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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