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있는 30대 직장 여성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아침준비를 하고 점심 도시락을 싼 후 아이들을 유아원에 떨어뜨려 놓는다. 남편은 퇴근시간이 아내보다 이르고 집에서 더 가까운 직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유아원에서 데려오지 않는다.
아내는 퇴근 후 아이들을 데리러 가서 집에 오자마자 부랴부랴 저녁 준비를 한다. 남편은 부엌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고 앉아서 밥상을 받는다.
이것은 한국에서의 광경이 아니라 놀랍게도 LA에서 목격한 어느 한인 부부의 생활 모습이다. 이 여성은 13살 때 미국으로 이민 온 소위 1.5세이며 남자는 훨씬 어렸을 때 이민 온 한국말도 못 하는 한인이다. 물론 이 여성이 이렇게 사는 게 만족스럽다면 어찌 할 바가 없다. 하지만 부부간의 역할에 있어 이런 불균형이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다.
“미국에 이민 왔다고 해서 한국의 전통적 부부역할을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반문 할 이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도의 전통인 신부 태우기나 중국 전통인 전족 등도 절대 이어가지 않으면 안 될 ‘전통’들이라는 말인가.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 경제적인 이유임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을 개방적인 사고방식으로 간주하곤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직장에 다니는 여성에게 요구하는 게 많다. 주류사회에서도 흔히 ‘수퍼 우먼 신드롬’이라고 하는데 우리 한인사회에서는 그 도가 지나치다.
이를 테면 어느 직장 여성은 시어머니로부터 “남편이 일 때문에 바쁘니까 그가 집에 없는 틈을 타서 청소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아들 내외와 같은 지붕 밑에 사는 어떤 시어머니는 하루 종일 일하고 들어온 며느리가 저녁 식사를 해 줄 때까지 손 하나 까딱 않고 툭하면 혼수 투정이다. 어떤 어머니는 며느리는 남편의 도움 없이 집안일을 해 주기를 기대하며 딸은 사위가 도와주기를 바란다.
이와 같이 차별하는 인간관계와 모순적인 행동 하에서 어떻게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상황을 가능케 하는 여러 가지 비뚤어진 기대치들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무조건 “며느리니까” 혹은 “부모니까”라는 이유를 제시한다면 문제가 있다.
바람직한 인간관계는 나이나 성별, 지위, 혹은 가족관계를 떠나서 상호 존중에 바탕을 두고 형성되는 것이지 여성 차별주의적인 전 근대적 사고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너무 당연한 개념이지만 실제로는 이런 고정관념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 하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예를 들어 시댁이 항상 친정보다 우선 되어야 한다는 관념이나 무조건 젊은 사람이 어른에게 먼저 전화를 정기적으로 걸어야 한다는 생각들은 오히려 좋은 인간관계를 해칠 수 있다.
나의 한 친구는 매주 시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그런데 인사를 드리기 무섭게 시어머니는 친구의 안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물어보지 않고 바로 이렇게 묻는다. “우리 아들 밥은 잘 해주고 있니?” 그 다음에 묻는 것은 “우리 손자 잘 있니?”
이렇게 며느리를 아들과 손자 돌보는 사람으로만 대할 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 대해 살가운 정이 생기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부부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한국적’이라며 여성차별적인 생각과 관습을 가진 한인이라면 과연 아내의 의견을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지 한번 돌이켜 보자. 외식할 때 식당 결정은 누가 주로 하는가, 아내가 퇴근해서 아이를 돌볼 때 집안일을 돕는가, 아내가 퇴근 후 저녁식사를 차릴 때 반찬 투정이나 하고 있지는 않은가 등등.
이 같은 물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때 바람직한 부부관계 형성이 가능하다. 전통적 가치관을 무조건 따르려 하기보다 현대의 가치관과 잘 조화시켜 상호 존중하면서 가사를 분담하는 지혜를 가질 필요가 있다.
또 남편은 아내의 사회생활에도 적극적인 조력자가 되어 줄 필요가 있다.
아내의 가족모임이나 친구들 모임에 자리를 같이 하는 것도 그런 자세의 하나이다. 부부 일심동체는 바로 이런 모습을 통해 드러난다.
주인과 하인 같은 관계가 아닌, 독립적인 성인 두 사람의 상호 존중적인 관계, 모든 일을 나누며 상부상조하는 관계야말로 바람직한 부부의 모습이다. 진정한 의미의 ‘잉꼬 부부’는 바로 이런 부부를 지칭하는 것이다.
조남주
캘리포니아 커뮤니티재단
커뮤니케이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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