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는 놓쳤지만 선발잔류 희망투
4일(금)부터 6일(일)까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홈구장 AT&T 팍에서 벌어진 자이언츠와 LA 다저스의 주말 3연전에 쏠린 관심은 대단했다. 금요일과 토요일 경기에는 경기장 수용인원의 100%에 가까운 4만여 관중이 몰렸다. 일요일 경기 유료관중은 3만8,290명으로 집계됐다.
자이언츠-다저스의 경기는 남북가주 5번 하이웨이 라이벌전. 그런데 다저스의 이번 샌프란시스코행은 올 시즌 처음이니 더욱 관심이 쏠렸다. 그중 토요일 경기는 ‘참으로 간만에 보는’ 박찬호의 SF등판으로 한인팬들의 눈길을 모았다. 일반팬들에겐 홈구장 시즌 첫승에 목마른 배리 지토의 출격이 입맛을 돋웠을 것이다. 게다가 박찬호와 지토는 공교롭게도 거액계약 뒤 부진에 빠져 먹튀라는 오명을 들었다(물론 박찬호는 불펜과 임시선발을 오가며 왕년의 가락을 회복중이지만). 따라서 둘은 서로 먹튀를 잡고 먹튀 오명을 씻어내는 전기를 마련해야 할 입장이었다.
결과는 지토의 기를 더 살려줬다. 자이언츠의 5대2 승리와 함께 지토의 올시즌 홈구장 첫승. 그러나 내용은 박찬호도 결코 꿀릴 게 없는 멋진 쌍끌이 피칭쇼였다. 마치 둘이서 의기투합해 우리가 왜 먹튀냐고 항변하듯 너나 없이 잘 던졌다. 왕년의 주무기 포심 패스트볼 대신 투심 패스트볼과 싱커볼로 무장한 박찬호는 6이닝동안 91차례 공을 던져 3안타 3볼넷으로 1점만 내줬다. 그 사이에 7명에게 삼진을 먹였다. 박찬호가 6회말 피칭을 마치고 물러날 때까지 다저스는 2대1로 이기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7회말 순식간에 뒤집혀 박찬호의 승리도 날아갔다. 지토는 홈플레이트에 가까워지면 살짝 낯을 바꾸는 체인지업과 거의 타자 머리위 아니면 눈높이에서 날아들다 타자쪽에 가까워지면서 갑자기 고도를 낮추고 방향을 바꾸어 스트라익 존을 훑으며 떨어지는 커브볼을 주무기로 7이닝동안 6안타와 1볼넷을 허용하며 2실점으로 묶었다. 그러는 동안에 다저스 타자들은 10차례나 삼진 바가지를 쓰고 덕아웃으로 물러났다. 10차례 삼진 중 쓰리스트라익 승부구는 모조리 체인지업 아니면 커브볼이었다.
둘의 피칭을 두고 현장취재 ESPN 기자는 관련기사 첫 머리를 6과 1/2이닝동안 박찬호와 배리 지토가 2001년처럼 던졌다, 장기 슬럼프로 고생하는 이 두 선발투수가 메이저리그 최고투수 중 한명으로 꼽혔던 그 때처럼이라고 시작했다. 6과1/2이닝은 두 투수의 투구이닝을 보태 절반으로 나눈 것으로 금방 눈치챌 수 있는데, 왜 하필 2001년일까. 박찬호는 2001시즌(15승11패)에도 잘 던졌지만 그 전 2000시즌(18승10패)에는 더 기막히게 잘 던졌고, 배리 지토 역시 2001시즌(17승8패)에도 풍년이었지만 그 뒤 2002시즌(23승5패)에는 다시 보기 힘들 풍작을 거뒀는데…. 그동안 슬럼프에 비하면 잘했다는 것이지 각자의 전성기에 비하면 아직 2인치가 부족하다는 뜻이었을까.
어쨌든, 안타 하나 없이 단 1점으로 결판나든 전날(4일) 콜로라도 로키스와 플로리다 말린스 경기처럼 안타와 홈런이 빗발치는 가운데(말린스 22개, 로키스 21개)에 무더기 점수(로키스 18-17 말린스)가 나든 한 경기에서 승리투수란에 이름을 올리는 선수는 오직 한명뿐이다. 7월 첫 토요일의 5번 프리웨이 라이벌전 승리투수란에는 지토의 이름이 새겨졌다. 박찬호에게는 승패와 무관한 6이닝 호투기록만 남았다. 그게 야구다. 이번처럼 승패가 뒤바뀌면 코리안 언론매체들은 ‘안으로 굽은 팔’로 불펜투수들을 사정없이 후려치며 설거지를 잘못했다고 타박하지만, 야구란 게 그렇다. 때로는 그저 그렇거나 비실비실 던졌는데도 타자들이 점수를 신나게 뽑아줘 승리할 때도 있고, 누상에 주자들을 잔뜩 내보내놓고 어기적어기적 물러섰는데 불펜투수들이 깔끔하게 설거지를 해줘 거의 포기한 승리를 건질 수도 있다.
▷1회 : 지토의 출발은 좋지 않았다. 들어단짝 연속 2루타를 맞는 등 제대로 호흡을 고르기도 전에 2점을 내줬다. 노장유격수 오마 비스켈의 호수비가 아니었다면 1, 2점을 더 내줄 뻔했다. 그래도 첫 피칭도 하기 전에 2점을 벌어놓고 마운드에 선 박찬호는 출발부터 좋았다. 첫 타자 프레드 루이스에게 초구 스트라익. 왼쪽 타자 루이스의 몸통쪽에서 K존 한복판으로 휘어드는 찬호구에 루이스는 방망이를 까딱도 못했다. 안쪽 약간 높게 던진 2구는 파울볼. 3구 볼. 4구 파울볼. 박찬호는 다시 루이스의 몸쪽으로 가다 바깥쪽으로 낮게 깔려 휘어지는 백도어 브레이킹 볼로 루이스를 물먹였다. 첫 타자 첫 삼진. 그러나 2번타자 레이 더햄에게는 볼넷. 인사이드에 낮게 던진 1구와 2구가 K존을 연속 벗어났고 살짝 K존을 걸친 3구는 파울볼, 아웃사이드 높게 흐른 4구 볼. 박찬호는 다시 인사이드로 공을 뿌렸으나 홈플레이트 엄파이어 밥 데이빗슨의 손은 올라가지 않았다. 더햄 출루. 랜디 윈이 등장할 때 관중석에선 Beat LA(LA 박살) 구호가 높아졌다. 박살난 건 윈이었다. 6구째만 빼고 모조리 안쪽으로 높게 낮게 던지는 박찬호의 공을 밀어내고 잡아당겨 4차례나 파울볼을 치며 버티던 윈은 제7구, 96마일짜리 싱커에 꼼짝없이 당했다. 다음은 포수 벤지 몰리나.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데뷔 이후 처음 대적한 몰리나를 3구만에 유격수 앞 땅볼로 처리했다.
▷2회-6회 : 지토가 살아났다. 1회초 피칭 때 아직 덜 넘어간 햇볕이 딱 투수판 즈음부터 걸려 지토의 눈을 정통으로 쏘는 바람에 신경이 거슬린 표정을 지었던 지토는 2회부터는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햇볕의 방해없이 피칭했다(1회말 박찬호의 피칭 때는 해가 조금 더 낮아져 그림자가 더 길어진데다 왼손투수인 지토가 와인드업을 할 때 햇볕을 정면으로 쏘이는 것과 달리, 오른손 투수인 박찬호는 와인드업 때 햇볕을 약간 등지는 식이어서 피해가 덜했다). 경기 양상은 투수전으로 바뀌었다. 둘 다 잘 던졌다. 박찬호가 3회말 마운드로 향할 때 중계팀은 2001년 10월5일 박찬호가 배리 본즈에게 한시즌 최다기록인 71호와 72호 홈런을 얻어맞던 장면을 보여줬지만, 박찬호는 공끝이 살아 숨쉬는 투심 패스트볼과 체인지업, 싱커볼로 자이언츠 타자들을 속속 요리했다. 올 시즌 홈구장에서 한번도 승리맛을 못본 지토는 1회초의 흔들림이 아득할 정도로 낙차 큰 커브와 체인지업으로 다저스 타자들을 줄줄이 물먹였다. 전광판에는 1회말부터 6회초까지 0만 10개가 이어졌다. 그리고 6회말. 박찬호의 유일 실점이 여기서 나왔다. 선두타자 더햄에게 1볼2스트라익의 유리한 상황에서 3연속 인사이드 승부구를 던졌다가 먹히지 않아 볼넷을 내준 게 탈이었다. 다음 타자 윈, 1루수쪽 바운스 큰 땅볼아웃. 후속타자 몰리나, 97마일짜리 강속구로 삼진. 그러나 박찬호는 애런 로왠드에게 우익수 진영 깊숙한 곳에 떨어지는 2루타를 맞으며 1점. 박찬호는 후속 타자 잔 바우커를 1루수 앞 땅볼로 처리하며 리드를 지킨 채 6회를 마쳤으나 다저스 불펜에서는 좌우 투수들이 몸을 풀며 조 토리 감독의 출격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7-9회 : 박찬호 타순에 대타 앤디 라로시가 등장했다. 지토의 2회이후 무실점 피칭은 7회까지 계속됐다. 무슨 영감이 들었을까. 해설자는 지토가 7회초 박찬호 라로시를 상대할 때 이번만 잘 막으면 승리를 챙길 챈스가 있다고 말했다. 해설자의 말 그대로였다. 자이언츠는 7회말 공격에서 바뀐 투수 비멜과 폴켄보그를 잇따라 두들기며 4점을 뽑았다. 2시간 9분동안 유지됐던 박찬호의 승리는, 유격수와 2루 사이를 꿰뚫은 루이스의 동점타로 날아갔다. 또 윈의 투수 키넘이 바가지 역전결승타로 지토의 홈구장 시즌 첫승이 무르익었다. 뒤이어 몰리나는 7회에만 3번째로 바뀐 코리 웨이드의 초구를 통타, 좌익선상으로 흐르는 라이너성 2타점 적시타로 쐐기를 박았다. 최근 11게임에서 방어율 1.65를 기록한 거의 완전무결 다저스 불펜은 실컷 늦잠을 자다 벌떡 일어난 듯한 자이언츠 방망이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대신 자이언츠 불펜은 타일러 워커와 브라이언 윌슨이 8, 9회를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지토 승리 지키기 임무를 100% 완수했다.
▷달라진 박찬호, 또다른 진면목 : 박찬호의 호투에 자이언츠전담 중계팀은 수차례 놀라움을 표시했다. 박찬호가 01-02 겨울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빅머니 계약 이후 부진에 빠져 샌디에고 파드레스, 뉴욕 메츠, 마이너리그, 샌디에고 파드레스를 전전했던 눈물의 오딧세이를 곁들여 한창때 피칭과 요즘 피칭을 비교하며 도대체 어떤 (부활)프로그램을 썼는지 궁금하다는 말도 했다.
박찬호의 달라진 면모에 하나 더 보탤 게 있다. 동료들의 플레이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자신의 피칭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예전의 박찬호는 조금은 신경질적이라 싶을 정도로 동료들의 플레이에 민감한 구석이 있었다. 2001년인가 2002년인가 여름에 다저스가 연승가도를 달릴 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경기에서 다저스의 상징이자 대선배인 1루수 에릭 캐로스가 베이스 뒤쪽에서 엉성한 땅볼타구를 잡은 뒤 간발의 차이로 타자주자를 놓치자 대놓고 화를 내던 장면이 생생하다, 바운스가 고약했던데다 타자주자가 헤드퍼스트 슬라이딩까지 불사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는데도.
박찬호는 또 다름아닌 자신을 응원하기 위해 몰려든 한인팬들에게 그다지 친절한 편도 아니었던 듯 싶다. 태극기를 흔들며 이름을 연호하는데도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지나쳐 속이 상했다는 한인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의 마운드 피칭은 물론이고 덕아웃 장면이라도 담아서 더 생생하게 더 알뜰하게 알리기 위해 한국에서 날아온 취재진이 카메라를 들이대는데 보란 듯이 큰 수건으로 얼굴을 감싸버리기도 했다.
TV중계 카메라에 잡힌 5일 AT&T 팍의 박찬호는 여유롭고 너그러워 보였다. 2루수 제프 켄트가 1-2루수 사이를 뚫는 안타성 타구를 잡아내고 이닝이 끝났을 땐 켄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어 마주치며 감사표시를 했다. 6회말 로왠드의 1타점 2루타는 우익수의 글러브에 걸렸다 빠져나간 것이었으나 박찬호는 우익수가 전력질주를 하고 몸을 날려 잡으려 애쓴 것만 해도 괜찮다는 듯 (적어도 화면상) 아무 내색을 않고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했다.
▷금요일과 일요일 경기결과 : 둘 다 다저스가 이겼다. 금요일 경기에서 난타전 끝에 10대7로 이긴 다저스는 토요일 경기 패배 뒤 일요일 경기에서 10안타씩 주고받았으나 3회와 5회 집중타 덕분에 각 2점씩 뽑는 등 응집력에서 우위를 보이며 5대3으로 승리했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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