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조화, 오직 모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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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스페인 차례다. 마침내 챔피언 차례다.
독일 선수단 맨 마지막으로 은메달을 목에 건 주장 미하일 발락이 입을 다물고 묘한 미소를 흘리며 내리막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장면을 보여주다말고, 중계카메라는 오르막계단 앞에 들썩이는 스페인 선수들을 멀리서 가까이서 찍어댄다. 긴장의 승부 와중에도 볼 것 다 보고 잴 것 다 재고 할 것 다 하면서 장난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여유만만 명품골(특히 러시아와의 준결승전 2번째골)을 출시하고 그보다 더 여유만만 골세리머니까지 선사했던 다니엘 구이사는 거기서도 장난스럽다. 스페인 국기를 휘두르고 이쪽저쪽 돌아보며 뭐라뭐라 떠들면서 껑충껑충 춤이다.
이윽고 오른다. 계단 타고 그들이 어와둥둥 오른다. 땅딸이 미드필더 사비 에르난네스(MVP)는 벌컥벌컥 물마시며 오른다. 결승전 유일골이자 4,400만 스페인 국민들의 44년 기다림을 끝내준 챔프고지 등정골 주인공 페르난도 토레스는 국기를 치마처럼 휘감고 오른다. 준결승전에서 발이 삐끗, 결승전을 벤치에서 지켜봤던 득점왕 다비드 비야(4골)도 국기치마를 휘둘렀다. 세스크 파브레가스 뒤를 따르던 안드레스 이니에스타는 은빛찬란 챔피언 트로피(앙리 들로네컵)에 살짜꿍 입맞춤을 한다. 사비 알론조, 다비드 실바에 이어 공격형 수비수 세르히오 라모스는 독일의 공격형 수비수 필립 람과 바꿔 입은 흰 유니폼 차림으로 챔프메달을 목에 건다. 운동장 어디에서 람은 “옷만 말고 내 몸도 함께였다면… 하고 바라봤을 게다.
도대체 저 너풀너풀 더벅머리를 언제 다듬나 싶었는데 몇년이 지나도 그대로, 에누리없는 태클무기도 그대로, 스페인의 튼튼수비를 지휘한 카를레스 푸욜의 목에도 기어이 챔프메달이 걸렸다. 루이스 아라고네스 감독. 이 백전노장 승부사는 그 야단법석 속에서 여전히 홀로 고요하다. 카메라 렌즈를 오래 붙잡아둘 만한 ‘쌈빡한 꺼리’를 좀체 빚어내지 않는다.
별 말도 없이 그냥 그 속도로 그 보폭으로 그 방향으로 뚜벅뚜벅 걷는 아라고네스 감독과 대비돼, 메달을 걸어주며 양팔을 유난히 크게 벌려 축하하는 플라티니의 제스처가 과장되고 요란스럽다. 지금이야 성웅 대접을 받지만, 아라고네스 감독은 유로2008 이전에 스페인 언론과 팬들로부터 잔소리에 비판에 칭찬에 손가락질에 온갖 것을 겪었다. 특히 10년불변 간판골잡이 라울 곤살레스를 제외시킨 걸 두고 별별 소리 다 들었다. 감독의 숙명이다. 10여년만에 처음 객석으로 밀려나 섭섭함을 되씹고 울분을 곱씹었을(지 모를) 라울은, 만일 그랬다면, 하필 그러자마자 스페인이 대망의 챔프고지에 오르는 걸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겠다. 운명이란 요물은 시시때때 이렇게 누군가에 별나게 심술궂다. 그걸 몸소 겪어서 아프게 알고, 듣고보고 해서 또렷이 알기에, 루이스 아라고네스 감독은 루이스만세 아라고네스만만세 합창이 이리 진동해도 저리 차분할 것이다.
애칭도 성스러운 ‘세인트’ 이케르 카시야스. 스물일곱 골키퍼 카시야스가 왼팔뚝에 노란 주장완장이 선명한 검은(검게 보이는) 유니폼을 입고 마지막으로 올랐다. 유럽축구연맹(UEFA) 미셸 플라티니에 이어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국왕도 카시야스를 아주 오래 끌어안았다. 소피아 왕비는 뺨을 내민다. 국왕과의 포옹에 이은 왕비와의 키스. 복터진 젊은 수문장이 앙겔라 마르켈 독일총리로부터도,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스페인총리부터도, 제프 블래터 세계축구연맹(FIFA) 회장 등으부터도 융숭한 축하를 받고나니, 다시 플라티니가 손짓한다. 그렇다. 유럽축구대왕 대관식의 화룡점정, 앙리 들로네컵(유로대회 챔피언 트로피) 전수식이 남았다. 플라티니 마음이 더 들떴나보다. 받을 카시야스는 저만치 있는데 줄 플라티니는 벌써 트로피를 들고 한두걸음 앞선다, 바로 앞 그리고 밑 특설무대 쪽으로. 곧 따라붙은 카스야스에게 플라티니는 몇걸음 안되는 짧은 여정에도 많은 말을 쏟아낸다.
플라티니?! 24년 전 이맘 때, 유로1984 결승전 뒤, 스페인은 다름아닌 플라티니와 그 친구들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의 독일처지가 됐지 않았던가. 플라티니의 프랑스는 그때 그 여름 마지막 승부에서 20년만의 우승꿈에 부푼 스페인을 2대0으로 짓누르고 프랑스축구 사상최초 메이저 챔프 트로피를 안았다. 플라티니는 결승전 결승골을 포함해 무려 9골을 넣으며 득점왕과 MVP가 됐다. 유로대회 9골기록은 지금까지 불변이다. 그게 깨지려면 얼마나 긴 세월을 보내야 할까. 그때, 스페인의 마지막 행보를 그토록 무참하게 가로막았던 플라티니가 지금, 막 정상에 오른 스페인의 챔피언 대관식을 저토록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챔피언의 길은 언제나 가시밭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교체멤버 빼고 11명씩만 쳐도 축구라면 난다긴다 하는 사내들이 도합 2,850분동안(총 31게임. *2일자 C2면에 연장전 3게임 포함 2,880분이라고 된 것은 계산착오. 연장전은 2게임으로 정정.) 그 자리를 넘보며 힘과 기량을 겨뤘다. 쏟아진 슈팅만 812차례다. 그중 394발은 겨눈 대로 골문을 향했고, 그중 골이 결국 된 것은 77개(승부차기 골 제외)였다. 슈팅보다 반칙이 훨씬 많았다. 그 바람에 1,047차례나 경기가 중단됐다. 옐로카드 경고장은 116차례 꺼내졌고, 레드카드 퇴장명령은 3차례 나왔다.
카시야스가 특설무대 돋음판에 올라섰다. 단하의 플라티니가 단상의 카시야스를 올려보며 챔피언 트로피를 바친다. 옥좌의 카시야스가 플라티니를 굽어보며 만면에 웃음을 띠고 받아든다. 받아들어 머리위로 치켜올린다. 함성이 터진다. 머리 위 트로피가 출렁출렁, 카시야스는 입을 쫙 벌린 채 뒤흔든다. 동시에 울려퍼진 함성의 바다에 폭죽이 터진다. 연기가 치솟는다. 입천장이 훤히 보일 만큼 벌어진 카시야스의 입은 그가 지킨 골문보다 큰 것 같다. 카시야스는 쪽쪽 키스를 퍼부은 뒤 라모스에게 건네준다.
바로 그때, 독일 골키퍼 옌스 레만의 얼굴이 화면을 메웠다. 어디선가 약간 비스듬히 쳐다보는 레만. 그가 천천히 눈을 감으며 어디론가 딴데로 트는 순간, 화면은 다시 챔피언들. 44년 기다림은 어디 가고 이제 4.4초도 기다릴 수 없는지 곧 있으면 제 차례가 올텐데도 챔피언 트로피에 어서 빨리 손을 대겠다고 야단이다. 트로피 몸통으로 밑동으로, 미처 닿지 않으면 그걸 잡은 동료의 손이라도….
또 그때다. 독일 미드필더 바스티안 슈바인스타이거가 두 눈 부릅뜨고 노려보는 장면이 클로즈업된다. 단상의 스페인 선수들, 스탠드의 스페인 팬들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심지어 속살 속마음까지 송두리째 마구 흔드는 것 같은데, 슈바인스타이거는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았다.
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비엔나)은 이날 밤만은 축구의 도시였다. 아니다. 축구음악의 도시였다. 준준결승서 준결승까지, 준결승서 결승까지 사이사이 두어날 쉼표를 포함해 총 23일에 걸친 2850분짜리 유로2008 축구교향곡의 피날레는 그런 희비쌍곡선 속에 연주됐다.
루이스 아라고네스 감독은 “남아공까지 월드컵까지 하소연을 거듭 거절했다. 거절한 게 아니다. 행여 누가 그런 소리 못하도록 “내가 떠난 뒤에도… “내 다음 후임자와 함께 더 큰 일을… 이런 식으로, 쐐기를 박고 차단막을 쳤다. 스페인축구가, 특히 그 감독이 갈길은 더욱 험난할 것이다, 2002년 월드컵 4강신화 이후 한국대표팀이 눈 높아진 팬들 등쌀에 선수고 감독이고 까딱하면 배겨나기 힘들어진 것처럼. 안그래도 높은 스페인 축구팬들 눈높이가 이미 하늘을 찔렀다. 그들의 성미는 그 얼마나 불 같은가. 월드컵에서 여태 4강고지도 못밟았지만, 유럽정상 스페인에 떠맡긴 숙제는 세계정상(월드컵) 뿐이다. 시간적 말미도 별로 없다. 당장 올 가을부터 2010월드컵 유럽예선이다. 유럽챔프 프리미엄도 보너스도 없다. 쉬운 상대도 별로 없다. 우승은커녕 지역예선도 벅차다. 거기서 미끄러지지 말란 법도 없다. 유로2004 챔피언 그리스가 2006월드컵 지역예선, 유로1992 챔피언 덴마크가 1994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쓰러졌다. 오늘 잘했다고 내일 혹시 그르쳐도 매를 덜 맞는 건 거의 없다. 더 맞기 일쑤다. 어제의 빛나는 성공 때문에 (그 이전 같으면 아무일도 아니거나 오히려 칭찬받을 일을 해놓고도) 오늘 고통에 신음하는 감독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번 대회 공동개최국 스위스가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음에도 스위스 축구팬들이 포르투갈과의 A조 최종전 직후 쾨비 쿤 감독에 대한 감사표시 플래카드를 펼쳐들고 운동장을 돌던 장면은 아주 예외적 사건이었다. 감독이라면 누구나 그걸 부러워했을 게다.
챔피언 제자들의 그 흥겨운 피날레 춤판에서 아라고네스 감독은 보이지 않았다. <끝>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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