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과 유로대회 둘이 펼치는
한해 걸러 여름마다 축구축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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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공은 작다. 둘레 길이가 68.5 내지 69.5cm다. 이번 유로2008 공인구 유로패스(EuroPass)의 둘레는 69 내지 69.5cm밖에 안된다. 끝모를 허공계에서 지구별도 콩알이다. 그래도 축구공에 비하면야. 적도 길이가 4만76킬로미터쯤이다.
축구공은 가볍다. 기껏 450그램정도다. 방수처리 기술까지 엄청 좋아져 요새는 비를 맞아도 물에 잠겨도 거의 비 한방울 물 한모금 먹지 않는다. 궂은 날이나 맑은 날이나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엔 변화가 없다. 그에 비하면 지구는, 떠다니는 걸 누가 저울에 달아놓고 잰 것도 아니고 그나마 기준 따라 다르긴 하지만, 허벌나게 무겁다.
59조8천톤? 또 어떤 기준에 따르면 6,600,000,000,000,000,000,000톤?
그런데 한없이 가풋한 축구공이 한없이 묵직한 지구별을 적어도 2년에 한번씩, 그것도 땡여름에, 홀라당 삼켜버린다, 월드컵의 여름, 유로대회의 여름이다, 물론 축구의 ‘축’자도 모르는 사람들, 알아도 시큰둥한 사람들, ‘축’자만 나와도 역정을 내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겠지만. 월드컵과 유로대회 주기는 둘 다 4년이다. 서로 열기가 엉키기 않도록 혹은 영업권이 겹치지 않도록 사이사이 번갈아 판이 벌어진다. (아시아선수권은 익는 철에 대중이 없고 실력도 열기도 그만하지 않다. 다만 까딱하면 감독을 잡아먹는 측면에선 월드컵 못지 않다, 특히 한국 같은 나라에서. 남미선수권은 실력상 유럽선수권과 쌍벽을 이루지만 좀체 그 열기가 남미 넘어 세계로 범람하지 않는다.)
시상식은 축구공 속에 갇혔던 지구별이 도로 빠져나와 제 자리를 찾아가는 의식이기도 하다. 시상식 풍경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대체로 판박이다. 결승문턱을 몇미터 앞에다 두고 눈물의 보따리를 싼 스타들도 숱한데, 그 이전에 조별리그에서 물을 먹고 한참 오래전에 구경꾼이 된 강호들은 더 많은데, 아니 그보다도 훨씬 이전에 일찌감치 본선행 티켓다툼에서 미끄러진 바람에 푸른 초원 피끓는 향연을 객석에서 혹은 TV스크린 앞에서 지켜봐야 하는 축구도사들을 헤아리기도 벅찬데, 준우승 선수단은 마지막 승부까지 살아남은 기쁨보다는 그것마저 이기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대개들 죽상이다. 마땅히 이길 걸 진 듯한 표정들이다. 챔피언들은 물론 거꾸로다. 여러모로 미뤄 응당 이길 걸 이긴 것 같은데도 마치 질 걸 이긴 듯이 난리부르스다. 하긴 무대의 그들은 바로 그맛에 축구를 할 것이다. 거실이든 사무실이든 객석의 나는 그걸 엿보면서 곁맛을 다시느라 종료휘슬이 울린 뒤에도 눈을 떼지 못한다. 5월21일 비내리는 꼭두새벽(고로 22일) 모스크바 루즈니키 경기장에서의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뒤 시상식 때 그랬고, 이참 6월29일 빈(비엔나) 에른스트 하펠 슈타디온에서의 유로2008 마지막 승부 뒤 시상식 때도 그랬다.
아니나 다를까, 준우승씩이나(?) 차지한 독일 선수들이 영 마뜩찮은 표정으로 먼저 시상대에 올랐다. 거의 언제나 그렇듯이, 독일 선수들은 우람하다. 원체 종자가 큰데다가 깐깐하게 골라서인지, 필립 람이나 루카스 포돌스키 등 몇몇을 빼고는 하나같이 왕덩치다. 거구들이 웃음을 싹 지우고 움푹 패인 눈을 깜박거리지도 않으면서 화면에 떼거지로 클로즈업될 때면 나는 이따금 조폭영화 포스터 같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정말이지 독일 선수들의 집단무표정은 때로 섬뜩하다. 필드에서 맞서는 상대편 선수들도 독일팀의 독일선수들의 그 거대한 덩치에 그 차가운 눈빛에 게다가 그 화려한 전적에 싸워보기도 전에 조금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까.
눈매처럼 독일의 플레이도 차갑다. 스코어는 밑지고 있지 시간은 얼마 안남았지, 그래도 그들은 좀체 허둥대지 않는다. 필드의 축구인들이 배울 건 두툼해도 객석의 축구팬들이 즐길 건 얄팍하다. 딱 깨놓고 재미가 좀 없다. 하도 침착하니 인간미도 덜한 것 같다. 그 점에서 바스티안 슈바인스타이거가 축구도 잘하지만 다혈질인 듯 간간이 인간적 면모-어이없는 실수와 격렬한 항의 등-를 보여준 것은 반가웠다. 유로1996 결승전 때 독일이 체코의 공세에 수시로 뚫리고 찢어지고 헐거워지면서도 끝까지 침착성을 잃지 않고 한땀한땀 기워나가더니 올리버 비어호프의 연장전 골든골로 챔피언 트로피를 차지하는 걸 베를린특파원 출신 선배와 지켜보면서 역부로 사투리를 잔뜩 섞어 대충 이런 농담을 나눴었다.
아따 저것들은 사람을 잡을 때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천천히 끝까지 정확히 쑤셔번질 거여. 우덜 같으면 아무리 살기등등 작심을 해도 찌르는 순간 손에 전해지는 뭉툭한 첫 느낌에 등골이 오싹해지고, 그게 아니라도 핏기만 보이면 기양 간뎅이가 쪼그라들어서 더는 못헐 것인디. 저것들한테 군복 입히고 철모 씌워 놓으면 영락없이…
(이런 에피소드가 독일축구에 대한 근거없는 편견을 심어줄까봐 덧붙이면, 그들은 상대를 평가함에 있어서도 참 냉정한 것 같다. 이참에 옌스 레만 골키퍼는 스페인과의 결승전 뒤 심판판정에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스페인의 우승자격이 충분하다고 인정했다.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의 승승장구를 두고 심판을 매수했네 약물을 복용했네 별별 소리들이 다 나올 때, 한국과의 준결승을 앞두고 독일수문장 올리버 칸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KO시켰다, 그럼 말 다한 것 아닌가. 거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우리는 (한국과의 경기에서) 한두차례 불리한 판정을 받을 수도 있다. 잘못된 게 아니다. 그걸 일컬어 홈 어드밴티지라 하지 않는가.
그 분위기에 눈물겨울 정도로 고마운 멘트를 날린 칸은 그러나 필드에서는 저런 귀신이 다 있나 싶게 기막힌 선방으로 한국의 신데렐라 스토리를 준결승 고지에서 멈추게 했다. 특히 전반 9분 골문 왼쪽 구석을 향하는 이천수의 벼락슈팅을 반대편에 있던 칸이 어느새 몸을 날려 막아낸 건 내편 네편 떠나 압권이었다. 다시 봐도, 이천수가 사전에 그리 그렇게 차리라고 귀띔을 해줬어도 못막을 것 같은데.)
어쨌거나 독일축구는 핏기도 없이 기름기도 없이 실속이 있다. 잘한다. 정밀기계 같다. 한국언론은 거의 습관적으로 독일축구에 2차대전을 연상케 하는 전차군단이란 별칭을 붙이지만, 미국언론에서 그런 별칭을 본 기억이 없다. 정밀기계란 수식어는 가끔 봤다. 그놈의 독일축구가 잘 돌아갈 땐 착착척척 인간들의 축구놀이가 아닌 것 같다.
재미없기로 치면 이탈리아도 그 축이다. 그런데 이탈리아축구는 기름지게 재미없다. 살랑살랑 끈적끈적, 그림으로 사진으로 영상으로 본 이탈리아 동쪽 연안 아드리아해 잔물결처럼, 이탈리안 요리에 듬뿍 뿌리는 어떤 드레싱처럼. 독일축구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축구도 눈 크게 뜨고 보면 감탄스런 구석이 즐비하다. 특히 수비장면 슬로모션을 보면 미드필드진부터 수비진까지 요소요소 포진해 볼과 사람의 흐름을 ‘둘 다 아니면 하나라도’ 차단하는 카테나치오(빗장수비)의 진면목이란…. 90년대의 치렁머리 미남 파올로 말디니며, 이번에 부상으로 출장하지 못한 빡빡머리 쾌남 파비오 카나바로의 수비장면을 보노라면, 우승은 수비로 하는 것(Defense wins championship)이라는 이탈리아의 축구철학에 절로 수긍이 간다.
그러나 누가 이기든 지든 모름지기 골풍년이 장땡이란 생각으로 TV를 지켜보던 시절, 나는 이탈리아축구를 독일축구처럼 연신 하품을 해가며 봤다. 더구나 생기기는 오살나게 잘생긴 것들이 (축구의 한 축은 힘이다. 예전의 골사냥꾼 크리스티안 비에리정도 말고는, 살랑살랑 끈적끈적 이탈리아축구에서 힘을 실감하기는 힘들다. 느낄 때가 있다면, 거의 예외없이 배우같은 그들의 용모를 보고 나도 몰래 내 속에서 꿈틀대는 그 힘, 지금은 고인이 된 기형도 시인이 고백한 대로 ‘질투는 나의 힘’이 전부 아닐까) 축구클럽이 아니라 연기학원을 다녔는지 심판 셋 눈 여섯은 물론 사방팔방 카메라 렌즈까지 감쪽같이 속여가며 반칙을 다반사로 하고 반대로 저들이 당할 때는, 아니 당하기는 고사하고 옷깃조차 스치지 않았는데도, 전치 8주 중상이나 입은 듯이 옆구리를 감싸쥐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쓰러져 부린 엄살을 미끼로 프리킥 따위를 냉큼냉큼 얻어내는 걸 보노라면, 내 일 아닌데도 참 얄미웠다.
1994년 미국월드컵 때 한 일터 옆 부서에서 일했던 영화평론가 임재철과 나는 이탈리아가 볼거리라곤 별로 없이 꾸역꾸역 결승까지 올라가는 꼴을 함께 보면서 “저놈의 이탈리아는 세계축구에서 제명시켜야 한다고 주거니받거니 했었다, 아리고 사키 감독이 필드밖에서 지휘하고 말총머리 수퍼스타 로베르토 바조가 필드안에서 휘저은 그때의 이탈리아축구는 이탈리아축구치고 꽤 공격적이었음에도 말이다.
유로2008에서 나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4강고지 근처에 얼씬거릴 수 없기를 바랐다. 싫어서도 지루해서도 아니다. 축구를 보는 눈이 눈꼽만큼은 밝아졌는지 이제는 그들의 플레이에서 재미와 놀라움을 무시로 느낀다. 내가 만일 감독이라면, 화려하게 지는 다른 팀들보다 볼품없이 이기는 그들의 축구를 주요 수업교재로 삼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이번 알프스 축구잔치 4강고지에는 ‘스페인 네덜란드 포르투갈 + (독일과 이탈리아 아닌 아무팀)’이 남기를 바랐다. 만날 그 나물에 그 밥이 아니기를 우선 바랐기 때문이요, 아무래도 세 나라 축구는 구경하는 재미가 더 있다는 게 둘째 이유였다.
각 나라에 관련된 이유도 있다. 본선도 아니고 2010년 남아공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조추첨 결과를 놓고 죽음의 조에 들었네 아니네 궁상을 떠는 나라의 축구팬인 주제에도 나는, 스페인이 그 열정 그 투자에 빅무대에서 번번이 좋은 성적을 못낸 게 왠지 안타까웠다. 네덜란드는 시골소년 TV월드컵 첫구경에서 눈에 콱 들어버린 팀이다. 요한 크루이프가 이끌었던 1974년 서독월드컵 때다. 초등학교 때 도덕책인가 국어책인가에 나온, 구멍난 제방을 손가락으로 팔뚝으로 온몸으로 막아냈다는 네덜란드 소년의 애국적 스토리도 친네덜란드 정서에 한몫을 했고, 풍차의 나라 튤립의 나라 따위 막연히 좋은 이미지도 그런 감정을 거들었다. 그런데 네덜란드도 기막히게 잘하면서 (유로1988 우승 빼고) 메이저 우승과는 기막히게 연이 안닿는 팀 같다, 이번이야말로 기회다 했더니 러시아에 나가떨어질 줄이야. 포르투갈에 대해서는 긴 말이 필요없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때문이었다. 굳이 한명 더 보태자면 데쿠였다. 포르투갈이 A그룹에서 쌩쌩 1위를 차지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독일이 B그룹에서 크로아티아에 지고 어쩌고 하면서 2위가 돼 불길하다 했더디 결국 독일에 발목이 잡혔다.
다행히 스페인은 끝까지 살아남았다. 끝까지 살아서 끝까지 이겼다. 그리고 시상식. 연단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 양쪽으로 늘어서 여전히 덩실덩실 춤추는 스페인 선수들을 뒤로 하고, 옌스 레만과 바스티안 슈바인스타이거와 미하일 발락이 뚜벅뚜벅 올라갔다. 독일선수단 끄트머리였다. 레만과 슈바인스타이거는 시상대 초입에 놓인 스페인몫 챔피언 트로피에 슬쩍 손을 대보며 지나쳤다. 미셸 플라티니 유럽축구연맹(UEFA) 회장은 그들에게 차례로 은메달을 걸어주었다. 발락에게 걸어줄 때는 요란한 제스처를 섞어가며 무슨 말을 꽤 길게 했다(사진). 발락은 씩 웃었다. 또 웃었다. 눈두덩이 마른 핏뭉치도 실룩거렸다. 스페인 선수들은 어서 빨리 오르고 싶은지 연신 춤판을 벌이면서 흘끔흘끔 시상대를 올려다봤다. 챔피언 대관식, 결승전 종료휘슬 그 순간 ESPN 중계자의 외침처럼 4,400만 스페인 국민들이 44년동안 오매불망 기다린 유럽축구제왕 대관식은 44초도 남지 않았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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