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년만에 유럽챔프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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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은 스페인이었다. 과정도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이 독일을 물리치고 유로2008 챔피언에 올랐다. 스페인은 29일 오스트리아의 빈(비엔나)에서 벌어진 4년주기 유럽축구선수권대회 결승에서 페르난도 토레스의 전반 33분 결승골로 1대0으로 승리했다. 스페인은 1964년 스페인 땅에서 열린 유로대회에서 챔피언 트로피를 차지한 뒤 44년만에 유럽정상에 복귀했다.
유로대회 4번째 겸 12년만에 유로챔피언 트로피와의 재회를 노렸던 독일은 8강전에서 초강력 우승후보 포르투갈에 재갈을 물린 기쁨도, 4강전에서 돌풍의 핵 터키의 저항을 뿌리친 기쁨도 접고, 스페인의 챔프등극 조연자로 밀려났다.
이로써 알프스 이웃 오스트리아와 스위스가 공동 개최하고 유로대회 디펜딩 챔피언 그리스와 월드컵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 등 16개국이 출전한 가운데 지난 7일 막을 올린 이번 대회는 스페인과 독일의 마지막 승부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월드컵과 달리 유로대회는 3-4위전이 없어 러시아와 터키가 공동 3위가 됐다.
▶스페인 편도 아니고 독일 편도 아니고 축구 자체를 실컷 즐기고픈 제3자들에게 스페인과 독일의 결승전 쇼다운은 기대 반 우려 반, 잡탕예감이 들었을 것이다.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지더라도 재미있는 플레이를 하는 스페인이 올라선 것은 입맛을 돋게 하는 밑천이지만 이기더라도 재미없는 플레이를 하기 일쑤인 독일이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어째 좀 군침이 덜 돋는다 생각한 축구팬들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번 대회에서도 스페인은 판이 열릴 때마다 재미만점 경기를 펼쳤다. 심지어 조별리그 2연승으로 8강진출이 확정된 뒤에도 그리스와의 최종전을 2대0 승리로 장식하는 등 게임마다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연장전까지 간 이탈리아와의 8강전이 득점없는 무승부였지만,알맹이에는 재밋거리가 솔찬했다. 스페인이 1920년 이후 메이저 무대에서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 이탈리아를 상대로 한다는 것도, 이탈리아가 현역 월드컵 챔피언이라는 것도, 지중해상 라틴 라이벌의 대결이라는 것도, 또 자타공인 골키퍼지존 지안루이지 부폰(이탈리아)과 그 아성에 도전하는 세인트 이케르(이케르 카시야스)의 문지기 쇼라는 점에서도, 이 득점없는 무승부 경기의 재미는 골 쏟아진 여느 경기 못지 않았다(결과는 스페인의 승부차기 승리).
러시아와의 4강전은 또 어땠는가. 장대비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가까이 비쳐주지 않으면 도무지 햇볕 좋은 날 경기인 듯 착각할 정도로 경쾌한 몸놀림으로 볼을 톡톡 주고 착착 받고 90분 내내 볼거리를 제공하며 낯선 겨자색 유니폼을 입은 이베리아 반도의 이 축구사나이들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달려온 러시아 거인들을 3대0으로 찍어눌렀다. 세계언론을 장식했던 거스 히딩크 감독의 매직이며 안드레이 아르샤빈의 스타탄생이며, 러시아축구의 놀람교향곡은 결국 스페인 결승행의 위풍당당함을 더해주는 장식품 구실을 톡톡히 한 셈이 됐다.
▶One goal, just one goal. Nothing more, nothing less(한 골, 딱 한 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세계 축구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4년만의 유로축구 마지막 승부를 가른 것은 전반 33분 페르난도 토레스의 오른발로 빚어낸 그 한골뿐이었다. 그렇다고 독일선수들이나 독일팬들이 아, 딱 한골 때문에…라고 원통해할 계제는 전혀 못되는 경기였다. 내용상 두세골을 더 먹었대도 이상할 게 없는, 스페인의 완승이었다.
그러나 출발은 신중했다. 특히 2분쯤에서 10분을 조금 지날 때까지 스페인은 (결과적으로) 필요이상 조심스러운 플레이를 펼쳤다. 토레스를 최전방에 박아놓고 양 날개를 약간 처지게 배치한 뒤 미드필드를 두텁게 형성한 스페인은 볼을 잡아도 섣불리 나아가지 않았다. 자기진영이나 고작해야 하프라인 부근에서 횡패스 백패스로 빙글빙글 돌리기 일쑤였다. 독일 선수들을 황야로 끌어내기 위한 술수이기도 했겠지만, 초반의 팽팽하고 조심스런 분위기 때문인지 그것은 스페인 선수들이 큰물에 강한 독일의 관록을 잔뜩 의식한 탐색으로 읽혀졌다.
늘 둔한 듯하면서도 독일의 축구눈치는 알아줘야 했다. 스페인 선수들이 생각보다 많이 긴장하고 있구나, 간장이 졸아들고 오금이 후들거리는 이때가 기회다, 라고 여겼는지 독일은 볼을 잡으면 곧 전진모드로 변환했다. 굳이 저울눈을 들이대자면 독일이 좀 앞선 건 그 10여분동안이었다.
영리한 복서는 상대의 펀치를 한두번 가볍게 맞아본 뒤 그 펀치력을 가늠한다. 스페인의 초반 수세는 그런 효과를 냈다. 독일의 선 굵은 공격이 스페인의 오밀조밀 수비를 좀체 뚫기 어렵다는 것을 감잡은 것 같았다. 스페인의 빠르고 정교한 역습을 우려해 독일이 팔 걷어붙이고 공격에 나설 수 없다는 약점도 그 짧은 탐색기에 거의 들통났다. ESPN중계팀이 거듭 지적했듯이, 프리킥 코너킥 등 독일의 세트플레이 고공플레이만 정신 바싹 차리고 조심한다면 지상전에서 밀리는 상황은 없을 것 같았다. 루카스 포돌스키의 측면돌파는 이미 노출된 무기여서 준비를 단단히 해놨겠다, 터키와의 준결승 종료직전 결승골의 주인공 필립 람도 발 빠르고 기술 좋은 다비드 실바 등의 역습침투를 각오하지 않으면 함부로 수비자리를 비워두고 공격일선을 기웃거릴 처지가 못되겠다, 스페인은 그 10여분동안 많은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스페인이 특유의 발랄함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결승전은 아연 재미없는 독일경기에서 재미있는 스페인경기로 주파수를 바꿔나갔다. 준결승전에서 러시아의 왼쪽진영을 제 앞마당으로 마음껏 휘저으며 2골을 셋업한 미드필더 안드레스 이니에스타가 전반 14분 벌칙구역 왼쪽까지 침투해 토레스를 염두에 둔 크로스를 찔렀다. 토레스는 없었다. 그러나 독일수비수 크리스토퍼 메첼더의 발에 맞고 안으로 꺾인 볼은, 옌스 레만 골키퍼의 선방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자기편 급소를 쳐버릴 뻔했다. 메첼더는 미안함을 레만에 대한 박수로 대신했다. 독일의 수난, 스페인의 본격공세는 이제 시작이었다.
브라질 출신 마르코스 세나가 당장은 서두르지 않는 것 같으나 지나고보면 엄청 빠르게 뭔가 해치운 것을 느끼게 하는 능란한 볼배급을 하는 가운데 작은 이니에스타와 실바와 수시로 자리를 바꿔가며 덩치 큰 독일 수비수들을 괴롭혔다. 전반 23분. 독일의 간담을 서늘케한 토레스의 헤딩슛이 나왔다. 세르히오 라모스가 독일진영 우중간에서 문전으로 올린 볼을 토레스가 치솟아 머리로 방향을 틀어찍었다. 레만 골키퍼도 어쩔 수 없는 영락없는 골이었다. 그러나 골대가 레만의 친구, 독일의 구세주였다. 볼은 골대 밑동에 맞고는 데굴데굴 골문을 외면했다. 독일은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스페인의 루이스 아라고네스 감독은 초반 10분동안 초조했지만…이때부터 승리를 확신했다고 말했다.
물론 공짜승리는 없었다. 스페인은 곧 미하엘 발락에게 당할 뻔했다. 페널티 아크까지 접근한 발락이 때린 슈팅이 골문으로 향하는 순간, 육탄으로 막아냈다. 스페인은 움츠리지 않았다. 도리어 공세의 옥타브를 확 높였다. 세밀패스와 정교기술로 무장한 스페인의 낮은 포복 공격에 키 큰 독일 선수들이 헉헉댔다. 힘에 부치면 마음이 급해지는 법. 좀체 서두르는 법도 없고 수소이탈도 거의 없는 독일 수비라인이 평상시보다 몇걸음 전진했다.
▶그래서 조금은 더 넓어진 뒷마당에서 사단이 벌어졌다. 전반 32분에서 33분으로 넘어가는 찰나, 일자로 늘어선 독일 수비라인 틈새로 사비는 직각 전진패스가 파고들었다. 토레스가 확 뛰었다. 람도 따라 돌아서며 갈길을 막았다. 불과 1초도 안되는 사이에 속도와 속도, 힘과 힘의 맞부딪힘. 그 순간만은 날쌘 람보다 토레스가 더 날쌔고 힘셌다. 막힌 토레스는 즉각 람의 오른쪽으로 돌아 반스텝 앞섰다. 그 사이에 볼은 문쪽으로 더 흘렀다. 레만이 낮은 자세로 뛰쳐나왔다. 토레스는 사력을 다해 1.5스텝. 레만에 빼앗길세라 안그래도 긴 다리를 쭉 내뻗더니 볼의 밑동을 긁어올리며 발목을 왼쪽으로 비틀었다. 볼은 덮치는 레만의 몸을 살짝 넘어 고도를 조금 높이더니 토레스가 꿈꾼 그곳으로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날아가 골문 왼쪽 구석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손으로 놓친 레만은 본능적으로 발을 높이 쳐들었으나 볼은 이미 사정권 밖이었다. 대신 회심의 발사직후 몸 대 몸 충돌을 피해 훌쩍 뛰어오른 토레스의 사타구니를 강타할 뻔했다.
▶페르난도 호세 토레스 산츠. 잘 다듬은 긴 머리만큼이나 긴 이름의 이 스물네살 축구사나이는 이 골로 스페인에 44년만에 유로챔피언 트로피를 안겼다. 스페인이 그 뜨거운 축구정열과 천문학적 투자에도 1964년 유로챔피언 등극 이후 유로대회든 월드컵이든 정상고지를 한번도 밟아보지 못했으니, 더욱이 월드컵에서는 4강고지조차 밟아본 일이 없었으니, 토레스의 이 골을 두고 ESPN이 결승전 기사 제목을 스페인의 고통을 끝낸 토레스의 골이라고 한 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토레스의 마음고생을 끝내준 골이기도 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리버풀에서 뛰는 이 호리호리한 체격(6피트/154파운트)의 토레스는 07-08시즌 24골을 넣은 특급골잡이다. 아라고네스 감독이 지난 10년 이상 스페인의 대표골잡이 라울 곤잘레스를 떨궈내는 모험을 한 것도 토레스와 다비드 비야의 신무기 조합의 골생산성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토레스의 알프스 골사냥은 그러나 순탄치 않았다. 러시아와의 개막전에서 골맛을 본 그는 이후 번번이 골 같은 슈팅만 양산했을 뿐, 정작 그 많은 스페인제 골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크로스바를 살짝 넘어가고, 골대를 살짝 빗나가고, 아니면 골키퍼의 선방에 막히고, 지난 26일 러시아와의 준결승에서도 토레스는 때로 잔디를 쥐어뜯으며 때로 하늘을 쳐다보며 아슬아슬 득점포 불발을 아쉬워했다. 그리고 매번 그는 애만 쓰고 골이 없이 70분을 전후해 벤치로 물러나 동료들의 골사냥을 구경하기 일쑤였으니….
▶독일은 반격에 나서야 했다. 그러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스페인의 플레이가 더욱 예리하고 경쾌해진 것이다. 후반 들어서도 스페인은 공격고삐를 늦춰주지 않았다. 사비의 중거리슈팅(8분)과 실바의 근접슈팅(11분)이 연속 독일골문을 위협했다. 독일은 4분 뒤 발락이 페널티 아크 정면에서 회심의 일발을 날렸으나, 골대를 빗나간 뒤 다시 수세에 몰렸다. 라모스(22분)와 이니에스타(23분)의 연타에 더 주저앉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케빈 쿠라니(후13분)와 마리오 고메스(후34분)의 투입도 스코어변화는 고사하고 스페인 압도분위기를 움직이는 데 전혀 도움이 못됐다. 후반 종반으로 가면서 독일의 특장인 평정심이 흔들렸다. 바스티안 슈바인스타이거는 무리한 돌파를 시도하다 여러차례 볼을 빼앗겨 가슴 철렁한 역습을 초래했고, 좀체 볼을 거저 내주지 않는 발락도 서너차례 볼을 빼앗기거나 패스미스를 해 자기편 리듬을 끊었다. 스페인 우세는 기록(총슈팅수 14대4, 그중 유효슈팅 8대3, 코너킥 7대4)으로 거듭 확인됐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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