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돌풍도 히딩크 매직도 틀어막고
스페인, 사비 구이사 실바 후반연속골 3대0 완승
러시아, 엔진(아르샤빈) 봉쇄에 활로 막혀 돌풍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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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풍도 돌림병인가. 돌풍에도 단짝이 있을까. 유로2008에서 앞서거니 뒷서거니 깜짝승부 메들리를 펼쳤던 터키와 러시아가 차례로 놀람교향곡 연주를 멈췄다. 1패 뒤 3연속 역전승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터키가 준결승에서 독일에 2대3으로 져 결승고지를 몇미터 앞에다 두고 돌아선 바로 다음날, 역시 1패 뒤 파죽의 3연승을 거두며 4강고지를 점령했던 러시아는 스페인의 화력에 0대3으로 패퇴한 뒤 미처 못다핀 20년만의 결승진출 꿈을 훗날의 몫으로 접어놓고 귀국길에 올랐다.
4년 기다림 끝에 지난 7일 개막돼 연일 흥미진진 승부열전을 풀어놓았던 유럽축구 왕중왕전 유로2008은 이로써 29일 오전 11시45분(미 서부 표준시)부터 오스트리아의 빈(비엔나)에서 벌어질 마지막 승부 독일과 스페인의 결승전만 남겨놓았다. 독일은 지금은 선수단장이 된 올리버 비어호프의 연장전 골든골로 유로챔프 트로피를 차지했던 1996년 이후 12년만에, 그리고 유로대회 통산으로는 4번째 우승꿈에 부풀어 있다. 스페인은 1964년 스페인 땅에서 벌어진 대회에서 전설적 골키퍼 레프 야신이 버틴 소련을 2대1로 물리치고 우승축배를 든 이후 44년만에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다. 결승전은 ABC를 통해 생중계된다.
스페인은 강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비엔나의 에른스트 하펠 스타디온에서 펼쳐진 26일 준결승전 스코어(3대0)가 결코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강했다. 고양이보다 더한 반사동작으로 숱한 명품선방을 선보이며 ‘세인트 이케르’란 성스러운 애칭까지 듣는 이케르 카시야스가 있는 한 스페인의 최후방 골문은 거의 철옹성에 가까웠고, 불의의 발목부상으로 33분만에 필드를 떠난 다비드 비야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소문난 골사냥꾼 페르난도 토레스가 짝을 이룬 최전방은 러시아 방어진에 위협 그 자체였다. 스페인의 최전방과 최후방이 월드사커 탑클래스라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 이번만은 이번만은 하면서도 스페인이 빅무대에서 열정만큼 실력만큼 수확을 거두지 못하게 해온 미드필드와 포백수비가 확 튼튼해진 것이 실은 스페인이 유로2008에서 또 이번만은 하고 소리높여 외치게 하는 뒷심으로 보였다.
다듬다 만 듯한 긴 머리를 치렁치렁 휘날리며 목표물을 철저하게 미행하고 야멸차게 옭아매는 족쇄맨 카를레스 푸욜이 한가운데 버티고 선 수비라인은 아주 짱짱했다. 불과 몇년 전까지 약 10년동안 페르디난드 이에로 중심으로 포진했던 수비라인이 허약했다는 건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이에로 휘하의 수비라인은 우선 이에로부터 본업(수비)보다 부업(공격)에 더 눈이 가 있는 듯했다. 신나게 공격에 가담했다 역습을 당해 어이없이 골을 내주곤 했다. 푸욜 휘하의 방어진은, 세르히오 라모스를 뻬놓고는, 수소이탈이 별로 없었다. 우선 푸욜부터 스페인이 아무리 일방적으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형국이어도 제 마당 비워놓고 남 마당을 기웃거리는 일이 아주
드물었다.
스페인의 미드필드는 더욱 환상이었다. 사비, 마르코스 세나, 다비드 실바, 안드레스 이니에스타가 구축한 스페인의 허리진은 질척질척 미끌미끌 굵은 빗줄기 속에서도 볼을 잡으면 발랄하고 예리하게 길고 짧게 패싱으로 공격의 물꼬를 착착 뚫었고, 수비 때는 거의 빈틈없는 협력으로 봉쇄점을 에워싸고 연결고리를 차단하면서 러시아의 예봉을 미리 꺾었다. 특히 잠자는 거인 러시아의 깨어남과 용틀임을 주도한, 이제는 관객이 된 저 잔디위의 사커필 지휘자 지네딘 지단(프랑스)마저도 그를 보는 것이 즐겁다. 그는 위대한 다리를 지녔다고 격찬한 안드레이 아르샤빈 봉쇄는 압권이었다.
자타공인 현역 축구제왕 크리스티아누 호날두(포르투갈)가 준준결승전에서 독일 미드필더들의 자물쇠 압박에 갇혀 거의 90분 내내 영어의 몸이 됐듯이, 아르샤빈도 스페인의 톱니바퀴 허리띠에 묶여 특유의 폭풍질주를 별반 보여주지 못했다. 어쩌다 미드필드 깔딱고개를 넘어서면 가공할 태클로 무장한 족쇄맨 푸욜의 검문검색에 걸려 엎어지기 일쑤였다. 나는 바르카(바르셀로나)의 팬이다. 스페인리그로 가고 싶다고 했던 아르샤빈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리고 바르카가 아르샤빈을 향한 유혹손짓을 거두지 않는다면, 여름 지나 가을부터 바르카에서 한솥빵을 먹게 될 것이지만 그때는 그때 지금은 지금, 푸욜은 인정사정 볼것없이 아르샤빈을 괴롭혔다. 스페인이 3대0으로 앞서고 종료휘슬이 얼마 남지 않은 즈음, 페널티 아크 정면에서 패스를 받은 아르샤빈이 막 돌아서는 순간, 푸욜은 이번에도 거침없이 하이킥 사이드태클로 자빠뜨린 뒤 슬며시 손을 내밀었고 아르샤빈도 빗방울땀방울 얼룩진 얼굴을 욱신거리며 살포시 손바닥을 마주쳤다.
엔진(아르샤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마당에 러시아축구가 스웨덴전 네덜란드전에서 보인 러시아축구일 리 없었다. 세르게이 세마크, 콘스탄틴 주리아노프, 이고르 셈쇼프 등 나머지 미드필더들은 아르샤빈 구출이고 뭐고 스페인 공격을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최전방 로만 파블류첸코와 이반 사엔코는 후방지원이 번번이 끊기는 바람에 수없이 헛걸음을 반복하면서 바로 눈앞 스페인 골문을 여는 대신 저 뒤편 러시아 골문이 열리는 꼴을 세차례나 돌아봐야 했다. 왼쪽수비수 유리 지르코프의 분전도 빛을 바랬다.
게다가 하염없이 쏟아지는 장대비, 그 비를 맞고 흠뻑 젖은 잔디는 러시아의 또다른 생명줄인 원터치 기동력을 물먹였다. 날씨는 양쪽에 공평했다. 잔기술이 좋은 스페인 선수들은 금방 빗물 젖은 볼에 민감하게 적응해 그 와중에도 가볍게 톡톡 주고받으며 발랄함과 경쾌함을 별로 잃지 않았다. 미세터치가 부족한 러시아 선수들은 패스미스가 잦았고 그럴 때면 순식간에 아찔한 위기를 불러들이곤 했다. 이럴 때 숨통을 트는데는 프리킥 등 세트피스나 중장거리포가 제격이다, 전반 16분 파블류첸코가 때린 아크정면 프리킥이 수비벽 틈새를 비집고 크로스바를 살짝 넘어간 것처럼. 그러나 그런 기회는 자주 오지 않았다. 더욱이 중장거리포의 명수 콜로딘은 경고누적으로 엔트리에서 제외돼 벤치에도 앉지 못했다.
동에 번쩍 돌파로 서에 번쩍 슈팅으로 러시아 수비진을 거듭 골탕먹이던 유로2008 득점랭킹 1위 비야(4골)가 전반 33분 근육부상으로 아웃된 것마저 러시아에 전혀 위안이 되지 못했다. 대신 투입된 케스크 파브레가스(2어시스트)는 더욱더 펄펄 날았다. 벤치에 묵혀두기 아까운 고성능 무기였다.
빗속에 미끌미끌 이어지던 0의 균형은 후반 5분에 깨졌다. 러시아 진영 한복판에서 볼을 잡은 사비 에르난데스가 왼쪽으로 뛰어드는 이니에스타에게 대각선으로 쭉 밀어주고 문전으로 질주했다. 벌칙구역 왼쪽 모서리에서 이니에스타는 톡톡 한두번 접다 안쪽으로 쏘았다. 슈팅인 듯 크로인 듯 의도와 향방이 애매해 보였다. 수비라인과 골키퍼 사이 빈 공간을 지르며 먼쪽 골대를 향해 빠르게 저공비행. 감기는 각도가 완만해 놔두면 골대밖으로 벗어날 것 볼의 방향을 별안간 확 바꿔놓은 것은 이니에스타에게 볼을 배급했던 사비였다. 마치 볼이 그리 그곳을 지나칠 줄 알았다는 듯 들이닥치며 쑥 내민 오른발에 볼이 걸렸다. 돌연 방향을 틀어 골문으로 빨려들었다.
물먹은 발을 이끌고 만회골을 위해 안간힘을 쓰던 러시아에 스페인은 후반 28분, 또 한방 먹였다. 아크 부근에서 라모스의 패스를 받은 파브레가스가 연습하듯 차분하게 수비라인 키만 살짝 넘기는 패스를 말아올리자 다니엘 구이사가 훌쩍 뛰어들며 가슴으로 트래핑, 볼은 비에 젖은 잔디에 떨어졌다 어중간히 튀어올랐다. 아킨페예프 골키퍼가 덮치려고 달려들었다. 구이사는 연속동작은 유연했다. 그런 골키퍼를 보면서 오른발로 볼 아랫도리를 살짝 긁어올리며 비틀었다. 볼은 골키퍼를 넘어 골문 오른쪽 구석을 후볐다. 몸을 날리고 머리를 들이밀고 발로 내차고 온갖 용을 쓰면서도 몇차례 황금기회를 놓친 토레스 대신 투입된 구이사가 토레스에게 쉽고 부드럽게 골넣기 시범을 보이는 듯했다.
파브레가스는 후반 37분, 이니에스타의 로빙패스를 받아 골문앞 땅볼크로스로 다비드 실바의 쐐기골까지 어이스트했다. 러시아 골키퍼 아킨페예프는 13차례나 선방했으나 제집 드나들 듯 코앞까지 와 그 빗속에서 불을 질러대는 스페인의 화력을 다 감당하기엔 무리였다. 스페인은 후반으로 갈수록 경기주도권(볼점유율 65%대35%, 슈팅수 18대9)을 더욱 옹골차게 틀어쥐며 러시아의 반전극을 허용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종료직전 아르샤빈의 크로스에 이은 시체프의 헤딩으로 위안골을 얻는가 했으나 이마저도 귀신같이 냄새를 맡고 몸을 날린 카시야스 골키퍼의 거미손에 걸려들고 말았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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