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2008 준결승 3대2 역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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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돌풍은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터키의 돌풍이 휩쓸고간 자리에 독일이 우뚝 솟았다.
2008년 여름을 뜨겁게 달군 알프스발 축구축제에서 터키 선수들이 발로 머리로 몸으로 써올라간 신데렐라 스토리에 독일이 마침표를 찍었다. 독일이 터키를 힘겹게 잠재우고 4년주기 유럽축구선수권(유로2008) 결승고지에 선착했다. 월드컵과 유로대회에서 각각 3회 우승에 빛나는 독일은 25일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유로2008 준결승에서 차포들이 줄줄이 빠진 터키에 고전했으나 고비고비 한치 높은 결정력을 과시하며 3대2로 승리했다.
이로써 독일은 유로대회 6번째 결승에 진출했다. 독일의 결승진출은 잉글랜드에서 열린 유로1996 우승 이후 12년만이다.
막강 전적을 자랑하는 독일이 2002년 한일월드컵 3위차지 말고는 세계축구사에 이렇다할 족적을 남기지 못한 터키에 밀리고 밀리다 경기종료 직전 결승골로 겨우 1점차 승리를 거두고 좋아라 날뛰는 장면 자체가 세계축구의 판도변화를 웅변하는 증명사진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터키축구 급속성장을 보여준 압축사진 같았다.
축구에는 승리 패배 무승부 셋만 있을 뿐이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경기 도중 거의 벤치에 앉지 않고 테크니컬 에리어에 서서 정열적 제스처와 고함으로 필드 안 선수들을 지휘하며 터키축구 성공스토리를 연출해온 파티흐 테림 감독은 독일전을 앞두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3연속 역전승 4강행을 기적(적)이라고 한 기자들의 경탄성 지적에 이렇게 응수했다. 그랬다. 터키의 준결승 진출이 결코 기적이 아님은 이전 것 다 빼고 독일전 퍼포먼스만 보더라도 충분히 입증됐다.
그걸 누가 상관하나. 문제될 것 없다. (다른 팀이라면 몰라도) 터키인데…
터키가 크로아티아와의 8강전에서 연장전 인저리타임 종료 10여초를 남겨두고 기적적인 동점골로 무승부를 기록하고 내친김에 승부차기에서 이겨 99% 놓친 듯한 4강행 탑승권을 따낸 뒤 ESPN 중계방송 진행자가 터키선수 네다섯명이 경고누적과 퇴장으로 다음 경기에 뛸 수 없음을 우려하자, 해설을 맡은 줄리 파우디(전 미국축구 여자대표팀 미드필더)는 이렇게 응수했다.
그랬다. 아니다. 더했다. 터키는 거기다 부상으로 인한 결장자까지 합쳐 조별리그 스타팅 라인업 가운데 니하트 툰자이 투란 등 무려 8명이 준결승전 엔트리에서 제외됐음에도 스나이더 빼고는 스타팅 라인업 전원이 뛴 독일을 상대로 오히려 우세한 경기를 펼쳤다.
▶전반전 = 슈팅수 15대3, 그중 유효슈팅수 11대2. 볼점유율 62%대38%. 코너킥 5대2. 파울 4대7. 골키퍼의 세이브 2대6. 전반전 45분은 완전히 터키의 압도였다. 전반전 기록만 보면 독일의 승리가 오히려 이변처럼 느껴질 정도다.
지난 2000년 터키의 대표클럽 갈라타사라이를 이끌고 UEFA컵 우승을 차지했던 테림 감독의 전술과 용병의 귀재답게 터키가 잠그기 뒤 뒤집기를 노리리란 예상을 깨고 초반부터 강력공세를 펼쳤다. 마치 러시아의 거스 히딩크 감독이 네덜란드와의 8강전에서 수비 뒤 역습 예상을 깨고 초전박살 압박공세로 네덜란드의 전열을 흐트린 뒤 그 여세를 끝까지 밀어붙여 승리를 거뒀던 것과 흡사한 작전이었다, 결과적으로 승부결과는 달라졌지만.
잔뜩 웅크리고 양손 커버링을 한 채 조심스레 잽을 던져보는 복서처럼 한 5분동안 주로 미드필드에서 잔패스 주고받기로 호흡을 고른 뒤 첫 포문을 연 것은 터키였다. 5분50초쯤 지나 독일문전 오른쪽을 파고든 터키의 첫 발사에 이어 1분도 안돼 또 터키의 발사가 이어졌다. 터키는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는 플레이메이커 하밋 알틴톱의 능란한 조율아래 공세의 도를 더욱 높였다. 독일은 신중하면서도 예리한 터키의 초반압박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측면 수비가 수시로 뚫렸다. 필드에서 뛰는 선수들도 아직 땀을 내기 전인 것 같은데 벤치의 요하킴 뢰브 감독은 벌써 목이 마르는지 연신 물병을 따 들이키며 큰 눈을 더욱 부릅뜨고 연신 끔벅였다. 12분쯤, 독일골문 문지방까지 접근한 터키가 보다 예리한 슈팅을 거푸 두방 쏘아댔다. 특히 벌칙구역 오른쪽에서 니어포스트를 겨냥하고 내지른 카짐의 왼발슈팅은 그야말로 칼이었다. 옌스 레만 골키퍼의 반사적 펀칭이 아니었다면 여지없이 독일 골네트를 갈랐을 것이었다. 참다 참다 못참은 듯 레만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수비수들에게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올리버 칸의 그늘에 가려 10년동안 2인자에 머물다 은퇴를 생각할 30대 중반에야 독일의 대표수문장이 된 과묵한 사나이 레만이 경기 도중에, 그것도 불과 10여분밖에 지나지 않은 즈음에 바로 앞 동료들에게 그토록 성깔을 부린 것은 좀체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21분28초. 기어이 올 것이 왔다. 근근이 버티던 독일골문이 열렸다. 덩치 크고 힘 넘치고 조직력과 노련미까지 갖춘 독일 선수들에게는 볼을 끌지 않고 반호흡 빠르게 탁탁 갖다대는 원터치 플레이가 쥐약이었다, 러시아가 스웨덴전에서 그림같은 원터치 연결로 2골을 뽑아냈듯이. 독일진영 오른쪽 깊은 지점에서 얻은 스로인 볼을 골라인 가까이서 등지고 있던 터키 공격수가 단번에 가슴으로 백패스를 해주자 공격에 가담한 오른쪽 윙백 사브리 사리올루가 지체없이 문전으로 크로스, 골문 오른쪽으로 달려든 세미흐 센튀르크 역시 잡고말고 할것없이 그대로 몸을 살짝 돌리며 오른발슈팅, 골네트 대신 크로스바를 때린 볼은 (터키 입장에서) 다행히 (독일 입장에서) 불행히 골지역 왼쪽으로 향했다. 바로 거기에 위구르 보랄이 있었다. 쇄도하던 보랄도 군발짓 없이 제기차기를 하듯 왼발로 걷어올렸다. 부랴부랴 몸을 튼 레만 골키퍼는 이판사판 오른발을 쳐들며 막아보려 했으나 볼은 그의 엉덩이를 스치며 금지선을 데굴데굴 넘었다. 그가 돌아서 볼을 와락 껴안았을 땐 이미 상황끝.
선제골을 얻어맞고서야 독일은 공세적이 됐다. 미하엘 발락의 중원지휘가 서서히 살아나고 루카스 포돌스키와 바스티안 슈바인스타이거의 측면공격, 미로슬라브 클로세의 중앙돌파도 비로소 제 눈금을 찾아갔다. 25분58초. 독일이 마침내 승부의 균형을 되찾았다. 독일축구 골사냥이 대개 그렇듯이 적자메우기 이 동점골과정 역시 군더더기 없이 간단했다. 역습기회에 빠른 발을 이용해 대번에 터키진영 왼쪽 골라인 부근까지 단독드리블로 쳐들어간 포돌스키가 문전으로 횡패스를 찔러주자 쇄도하던 슈바인스타이거가 수비수를 금세 추월해 오른발 아웃사이드로 볼의 옆구리만 살짝 긁어 골네트를 가르는 동점골을 완성했다.
▶후반전 = 승부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그리고 그가 정녕 공정하다면, 전반전에 터키는 2대1 내지 3대1로 앞섰어야 마땅했다. 밥상이 차려졌을 때 먹지 못한 것이 결국 후반전 열세로 나타났다, 물론 전반전 1대1 무승부도 전후반 통틀어 2대3 패배도 터키에게 결코 모욕이 될 수는 없지만.
해프타임 15분동안 한숨을 돌린 독일이 달라졌다. 전반전에 신통치 않았던 4-2-3-1 변칙 포메이션이 비로소 먹혀들기 시작했다. 최전방 클로세의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양날개 포돌스키와 슈바인스타이거의 측면공격이 더 예리해졌다. 전반에 별로 안보였던 발락이 화면에 자주 비쳐졌다. 그의 플레이메이킹이 궤도에 올랐다는 증거다. 왼쪽 수비수 필립 람의 공격가담이 눈에 띄게 늘었다. 때문에 터키의 오른쪽 수비수들이 이 작고 빠른 윙백의 출몰에 거듭 혼쭐이 났다.
후반 33분. 강풍우로 뜻밖문제가 발생해 ESPN 생중계가 잠시 중단된 사이에 람이 역전골을 말아올렸다. 왼쪽 측면을 돌파해 문전 한가운데로 띄워준 크로스를 헤딩의 달인 클로세가 날아올라 방향을 비틀어 터키 골네트를 가른 것. 근 30년 묵은 축구중흥 비원을 이번에도 이루지 못하고 조별리그 탈락 뒤 귀국한 폴란드 선수들과 폴란드 축구팬들이 폴란드계 포돌스키가 동점골을 어시스트하고 폴란드계 클로세가 역전골을 성공시키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폴란드는 조별리그 첫판 독일전에서 포돌스키에게 2골을 얻어맞고 완패, 일찌감치 김이 샜었다.
좌간, 독일의 터키 요리는 쉽지 않았다. 터키는 터키였다. 팍팍하고 질겼다. 다시 연결돼 클로세의 역전골을 뒤늦게 비쳐주며 중계팀이 독일승리를 기정사실로 못박는 듯한 말을 주고받는 사이, 터키의 터키다움이 또 발끈했다. 후반 41분, 독일진영 오른쪽 깊숙이 엔드라인까지 파고든 사브리 사리올루가 미끄러지며 문전으로 크로스를 깎아주자 세미흐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수비수보다 먼저 발을 갖다대며 우겨넣었다.
이번에는 테림 감독이 펄쩍펄쩍 뛰고 뢰브 감독이 부동자세. 이 순간 독일팬들은 몸서리치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터키가 또 역전승을? 중계팀도 얼른 말을 바꿔 닳고 닳은 터키의 3연속 역전승 퍼레이드를 나열하며 남은 시간 4분이 4번째 드라마를 만들기에 결코 모자람이 없는 시간임을 암시했다. 그러나 독일에는 이날의 히어로 람이 있었다.
후반 역전골을 어시스트한 그는 거개들 터키의 대반란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후반 44분, 터키 진영 왼쪽에서 미드필드 한복판 토마스 헤첼스베르거에게 볼을 밀어준 뒤 쏜살같이 문전으로 돌진해 터키 최종 수비라인을 뚫고 리턴패스를 낚아챈 뒤, 달려나오는 레츠베르 루스튀 골키퍼와 니어 포스트 사이로 결승골을 꽂아넣었다. 루스튀 골키퍼는 니어포스트쪽 각도를 확 좁혀놓은 뒤 반대쪽에 무게중심을 뒀으나 람이 이를 역이용, 볼을 안으로 감아 우겨넣는 바람에 손을 쓸 겨를이 없었다.
람은 웃옷을 벗을 듯 출렁거리며 벤치쪽으로 내달렸다. 동료들도 내달렸다. 뢰브 감독이 덩치에 걸맞지 않은 엉성한 막춤을 추며 왔다갔다 어쩔 줄 몰랐다. 시간은 이미 45분 넘어 인저리타임. 독일팬들은 비로소 마음놓고 승리가를 불렀다. 마침내 종료휘슬. 터키의 진군은 거기서 멈췄다. 그러나 그들은 플러스 알파까지 보여주며 이번 축구잔치를 빛냈다. 우레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운동장을 돌며 환호에 답례한 테림 감독은 패배의 눈물도, 주전선수 대거열외에 따른 핑계도 내색하지 않고 우리 선수들이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뢰브 감독은 승리의 웃음을 어찌하지 못하면서도 솔직히 터키가 더 잘 싸웠다고 깨끗이 인정했다. 줄리 파우디 ESPN해설위원은 제3자 축구팬들의 심정을 이렇게 대변했다. 이번에 터키가 해낸 일을 많은 이들이 오래오래 추억할 것이다.
결승전은 오는 29일(일) 오전 11시45분 오스트리아 빈(비엔나)에서 벌어진다. 결승전은 ABC를 통해 생중계된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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