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였다. 오페라 표 두 장이 있었다. 오페라를 좋아하는 아내가 일등석으로 미리 사두었던 표인데 막상 공연 날 아내는 7,000 마일 떨어진 한국에 있었다. 그렇다면 누구랑 갈 것인가? 오페라를 좋아하는 동료 교수에게 이메일을 보냈더니 같이 가겠다는 연락이 금세 왔다. 아뿔싸! 그때 아들 생각이 났다.
대학 신입생인 아들은 오페라 공연 날 아침에 집에 올 예정이었다. 아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신시내티 오페라에서 노래하지 않는 엑스트라로 활약(?)해 왔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아들은 오페라 자체엔 그다지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 전 날 밤까지 기말고사를 치러야 했고 집에 오느라 장거리 여행도 하기 때문에 안 가겠다고 할 것 같았으나, 혹시 싶어 전화를 걸었다.
아들은 놀랍게도 가겠다고 했다. 흠, 나를 기쁘게 하고 싶어서 인가? 아버지날이 낀 주말인데 엄마가 없으니 아빠와 아들만의 시간을 갖으려는 것 같기도 했다. 양해를 구하고자 친구에게 전화를 거니, ‘나비부인’은 특히 아빠와 아들이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오페라라며 기꺼이 양보해 주었다.
‘나비부인’은 일본에 간 미 해군의 이기적 얘기다. 그는 일본 여인 ‘나비부인’과 결혼하여 잠깐 살림을 살다가 곧 미국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며 그가 돌아오기만 기다린다. 바닷가에서 그의 배를 기다리며 수평선만 바라본다. 그에게 어린 아들을 보여줄 수 있는 날만 기다린다. 마침내 그가 돌아오지만… 아, 여기서 얘기를 다 마칠 필요는 없겠다.
모든 오페라가 그렇듯 이 작품도 너무 과장되게 드라마틱하다. 지난 세기의 동양에 대한 서양인들의 시각은 세련된 2008년도 관객들에게 여간 지루하지가 않다. 나와 아들의 경우도 아리아들은 즐겼지만 내용은 지루했다.
3막에 이르자 아들은 눈을 감더니 머리를 끄떡이며 졸기 시작했다.
그런 아들을 보며 문득 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건 역전된 ‘나비부인’이 아닌가? 미국 아빠와 혼혈의 아들이 몇 천 마일 떨어져 있는 동양인 엄마 돌아올 날만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는 그녀가 탄 보잉 777을 보려고 지평선 만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집에 돌아와 이 칼럼을 쓰려고 앉았다. 대학 첫 해를 마치고 돌아온 아들과 함께 아버지날을 보내며 미국/한국에 대한 어떤 글을 쓸까? 혼혈의 아들은 어떨까.
아들이 태어나기 전 문화적 차이 때문에 장모님과 나 사이에 약간의 마찰이 있었다. 장모님은 큰딸의 첫 아이를 받으시려고 기꺼이 서울에서 오셨다. 사위가 할 일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시면서.
하지만 나는 출산은 부부의 프라이버시로 분만실에서 만큼은 장모님이 도와주실 일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진통이 시작된 늦저녁, 장모님은 진짜 진통 같지 않다며 주무시러 들어가셨다. 밤새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경황이 없어 장모님을 집에 두고 아내만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래서 분만실에는 내가 있게 되었으니, 결국 이 일은 내가 ‘이기게’된 것이었다.
그 후 장모님과 나는 서먹해졌다.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면서 전처럼 다시 스스럼없게 되는데 2년이나 걸렸다.
아이가 세 살 때 처갓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미국에선 순하고 방실거리던 아이가 어찌된 일인지 한국에 도착하면서 에너지가 넘치는 악동으로 변했다. 낮이 밤으로 바뀐 첫날밤, 비행기에서 잘 잤던 아이는 놀자면서 우리를 밤새 못 살게 굴었다. 다음날 장모님과 함께 있을 때 아이가 도자기를 깰 뻔해서 매섭게 야단을 쳤다. 아이 교육에 철저한 아빠의 모습을 처가 식구들에게 보여준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친지로부터, 처가 식구 특히 어른들 앞에선 그분들의 손자를 야단치는 게 아니라는 얘기를 후에 들었다. 아이가 천방지축으로 날뛰더라도 사위는 입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극장의 어둠 속에서 아들을 보며 두 문화에 익숙하고 두 언어에 능숙한 그가 몹시 부러웠다. 오페라 ‘나비부인’에 나오는 문화적 무지와 비교해보면 이건 상상할 수 없을 정도가 아닌가. 게다가 우리의 경우는 역전된 ‘나비부인’의 얘기이다.
4막에서 비극이 절정에 달하는 동안 아이는 더욱 깊은 잠에 빠져들었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그를 위해 행복하기 그지없다.
한국과 미국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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