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핵폭탄 안드레이 아르샤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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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대밭에 왕대 난다. 세계축구를 호령하는 왕별들은 대개 브라질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포르투갈 등 강팀에서 길러진다. 익히 알려진 이것 말고 다른 뜻도 있다. 빅스타는 빅무대를 통해 태어난다는 것이다. 근 20일동안 한컷한컷 승부드라마를 빚어내며 막바지에 접어든 유로2008 축구대회에서도 많은 별들이 알프스의 푸른 잔디를 수놓았다. 그중 가장 빛나는 별은 누구일까.
크리스티아누 호날두(포르투갈). 07-08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득점왕에 오르며 맨처스터 유나이티드가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왕중왕에 오르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한 그는 이번 알프스 축구잔치를 빛낼 별중의 별로 꼽혔다. ESPN 등 중계방송사들이 시청자들 눈길을 묶어두기 위한 예고방송에서 호날두의 현기증 나는 드리블 장면을 대표삽화로 끼워넣은 것은 당연했다. 그의 성가는 A그룹 첫판 터키전과 둘째판 체코전에서, 충분하지는 않지만 필요한 만큼은 입증됐다. 그러나 그의 질주는 거기서 멈췄다.
셋째판 스위스전을 벤치에서 느긋하게 구경하며 기를 보충했음에도 그는 허겁지겁 올라선 독일과의 8강전에서, 두세차례만 빼고, 거의 완벽하게 밀봉됐다.
터치라인 부근에서 프레드릭 등에게 갇힌 그는 볼 잡을 기회조차 드물었고, 어쩌다 볼과의 도킹이 이뤄질라치면 가차없는 태클과 바디체크로 저지당하기 일쑤였다. 비명을 지르고, 항의를 하고, 울상을 짓고, 고개를 절레절래 흔들고…. 0대2로 리드당한 상황에서 전반이 끝나갈 무렵, 순간적 문전돌파로 누누 고메스의 첫 만회골을 셋업한 것 말고는 그가 그 분수령 승부에서 보여준 목록은 대체로 이런 몸짓 손짓 표정연기로 가득찼다. 포르투갈의 2대3 패배와 함께 그는 알프스 축구잔치 무대에서 내려가 원치 않은 여름휴가에 들어갔다.
티에리 앙리(프랑스). 호날두 이전 루드 반 니스텔루이(네덜란드)와 함께 EPL 득점왕을 다퉜던 그의 처지는 더 처량해졌다. 1무2패에 고작 1득점 무려 6실점. 프랑스의 조별리그 탈락과 함께 그의 안타까운 발품은 끝났다. 하나뿐인 득점이 그의 발에서 빚어졌지만 1대4로 진 네덜란드전의 영패모면 위안골에 불과했다. 이탈리아와의 조별리그 최종전 뒤 잔디에 주저앉아 멍한 얼굴로 밤하늘과 스탠드를 번갈아 바라보며 시름을 달래던 이 득점기계도 지금 가동중단 휴가중이다. 은퇴한 지네딘 지단과 함께 프랑스축구 전성시대를 구가했던 릴리앙 튀랑, 파트릭 비에이라 등도 나이앞에 장사없음을 실감하며 터벅터벅 물러섰다. 지단의 후계자로 관심을 모았던 프랑크 리베리는 나름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이탈리아전 초반에 부상으로 실려나가 다시는 필드를 밟지 못했다.
디펜딩 월드컵 챔피언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카테나치오(빗장수비)의 핵 파비오 카나바로는 개막직전 훈련중 부상으로 아예 알프스 무대에 오르지도 못했다. 그의 수비짝꿍 마르코 마테라치도, 프란체스코 토티에 대한 향수를 금방 잊어도 좋게 만든 능란한 플레이메이커 안드레아 피를로도 부상에 발목잡혀 빛을 발할 기회도 얻지 못했다. 지안루이지 부폰 골키퍼는 탈락위기 이탈리아를 구하며 이름값을 했지만, 8강전에서 스페인 수문장 이케르 카시야스의 한치 높은 선방쇼의 조연역할에 그치고, 짐을 쌌다.
니하트 케비치(터키)의 다이하드 투혼은 놀라웠다. 육중한 상대선수들의 가공할 태클과 몸싸움을 능란하게 피해가며 순도높은 막판골로 터키의 3연속 역전쇼를 주도했던 그는 정작 허벅지의 가느다란 심줄의 심술(햄스트링 부상)에 독일전을 눈앞에 두고 조기귀국행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크로아티아의 간판스타 다리오 스르나는 터키의 3번째 역전쇼 제물이 된 뒤 그라운드를 떠나지 못하고 펑펑 울다 결국 떠났고, 루마니아의 희망 아드리안 무투는 이탈리아전에서 고난도 기술로 선제골을 넣었으나 종료직전 패널티킥을 놓치면서 반쯤 잡은 8강행 티켓을 날려버리고 고개를 떨궜다.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골사냥꾼 니스텔루이는 러시아와의 8강전 막판 그림같은 슬라이딩 헤딩슛으로 1골을 따냈다. 그러나 그의 골은 네덜란드의 퇴장을 30여분 늦춰놓은 것에 불과했다. 연장전에서 터진 러시아의 2골, 그것이 월드컵과 유로대회에서 별 재미를 못보다 이번에 기어이 해내는가 싶었던 니스텔루이의 사실상 빅무대 은퇴를 앞당겼다. 네덜란드의 붙박이 수문장 에드윈 반 데 사르 역시 그것으로 오렌지 유니폼과 결별했다.
러시아의 용틀임, 그 진앙이 바로 안드레이 아르샤빈, 그가 바로 유로2008에서 가장 빛나는 별일 것이다, 26일 벌어지는 스페인과의 4강전 결과에 관계없이.
네덜란드를 격침시킨 연장전 2골도 하나는 아르샤빈의 폭풍질주에 이은 절묘한 크로스로 빚어졌고 또 하나는 어느새 수비틈새로 파고든 그의 기막힌 롤리팝(골키퍼 가랑이 사이로 넣는 골)으로 맺혀졌다. 조별리그에서 스페인에 1대4로 깨지고 그리스에 겨우 1대0으로 이겨 헐떡거리던 러시아가 강호 스웨덴과의 최종전에서 느닷없이 2대0 완승을 거두고 8강고지에 올라선 것도 실은 90분 내내 스웨덴 진영을 황야의 적토마처럼 휩쓸고다닌 아르샤빈의 몫이 태반이었다. 이 경기의 두 번째 쐐기골은 그의 골이었다.
잠자는 거인 러시아의 요란한 깨어남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듯이 아르샤빈의 거침없는 질주 역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6독일월드컵까지 약 10년동안 세계최고 플레이메이커로 프랑스의 아트사커를 지휘했던 지단의 아르샤빈 칭찬릴레이를 들어보자.
“러시아 대표팀의 10번은 훌륭한 선수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주목하는 선수다. 그는 처음으로 메이저 대회에서 뛰고 있다는 점에서 더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그와 같은 스타일의 축구를 구사하는 선수를 보는 것이 즐겁다. 그는 위대한 다리를 가졌다.
칭찬릴레이뿐 아니다. 서유럽 빅리그 명문클럽들의 영입손짓이 줄을 잇고 있다. 그의 무한질주에 업혀 올해 UEFA컵 깜짝우승을 차지한 제니트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의 딕 아드보카트 감독은 아쉬움을 애써 쓰다듬으며 “지금이야말로 그를 떠나보낼 때라고 아르샤빈과의 이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작은 체구(5피트8인치/137파운드)에도 번개같은 스피드와, 지칠 줄 모르는 지구력, 수비숲 빈틈을 송곳처럼 헤집는 킬러패스와 드리블, 게다가 보급로 역할을 하다 어느새 상대문지방까지 파고들어 직접 골을 꽂아넣는 득점감각까지 갖춘 이 스물일곱 뉴스타가 26일 다시한번 그라운드에 오른다. 스페인과의 4강전이다. D조 개막전 대패 뒤 리매치다. 그는 지역예선 최종전에서 받은 레드카드 때문에 스페인전 패배를 필드밖에 지켜보는 신세였다. 다비드 비야, 페르난도 토레스 등 소문난 스타군단 스페인이 뉴스타 아르샤빈의 발끝에서 시작되는 러시아돌풍을 잠재우고 결승에 진출할 수 있을까. 경기는 26일 오전 11시45분(태평양 표준시)에 시작되고 ESPN2의 중계방송은 이보다 앞서 11시30분부터 시작된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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