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 매직 때문에
이명박 허정무 아닌 밤중에 홍두깨질당하고
=====
▶싫든 좋든 소련은 강했다. 소련축구도 강했다.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에서 4강, 1970년 멕시코월드컵에서 8강에 진출했다. 이후 겨울잠을 자는가 했던 소련축구는 1988년 여름에 유로대회 준우승, 그해 가을에 서울올림픽 우승을 차지했다.
소련축구 제2의 전성기는 짧았다. 봇물 터진 민주화 바람에 막강 소련이 흔들렸다. 소련축구도 흔들렸다. 1991년 12월, 소련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국제무대에서 더 이상 소련축구도 없었다. 소련은 15개 공화국으로 찢어졌다. 소련축구도 독립 공화국 숫자만큼 조각났다.
축구뿐 아니었다. 다른 종목들도 마찬가지였다. 새로 태어난 공화국의 결정에 따라 이리저리 갈렸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지역 공화국들은 아시아의 길을 걸었고, 러시아 우크라이나 에스토니아 등 유럽지역 공화국들은 유럽의 길을 걸었다.
재미있는 일, 웃지못할 일이 속출했다.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수가 돼 국제스포츠 무대에서 양보없는 경쟁을 벌이는 건 다반사였다. 중앙아시아 공화국에 살고 있지만, 본래 러시아(슬라브)계라며 러시아 소속을 고집하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 터잡았지만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등 카프카스(코카사스)의 신생조국을 대표하겠노라고 러시아 삼색기 아래 뛰는 걸 거부한 선수들도 있었다.
특히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이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 출전하면서, 옛소련 대표로 유럽선수권대회에서 줄줄이 금메달을 차지했던 스타플레이어들이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거는 진풍경이 여러번 나왔다. 당시 우크라이나 태생으로 왕년의 소련축구 간판스트라이커였던 아나톨리 비쇼베츠가 지휘봉을 잡은 한국축구가 준결승전에서 소련붕괴 덕분에 첫선을 보인 우즈베키스탄과 격돌(한국이 0대1로 패배)한 것 또한 달라진 세상을 웅변했다.
나라 전체가 소용돌이에 휘말린 듯한 그 상황에서 러시아축구인들 온전할 리 없었다. 그 와중에 지역예선을 통과해 1994년 미국월드컵에 출전한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겨졌다. 88올림픽 우승주역 미하일리첸코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고, 90년대 중반까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첼시의 간판스타 중 한명이었던 칸첼스키스는 감독과의 불화로 보이콧한 상태에서, 어기적어기적 간 미국행의 끝은 조별리그 탈락. 이후 러시아축구는 더욱 깊디 깊은 겨울잠에 빠졌다. 월드컵이든 유로대회든 거의 명함을 내밀지 못했다. 러시아축구에는 잠자는 거인이란 별명이 붙었다.
▶쿨쿨 자던 거인이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 질주했다. 댓바람에 유로2008 4강고지까지 줄달음을 쳤다. 알프스의 나라 오스트리아와 스위스가 공동개최하는 이번 대회가 막을 올리기 이전까지, 잠자는 거인들의 종착역은 조별리그 울타리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됐다. D조에 속한 러시아가 스페인과의 1차전에서 1대4로 완패를 당하자 그러면 그렇지 하는 반응이 주류였다. 2차전에서 디펜딩 챔피언 그리스를 1대0으로 물리쳤을 때도 그래봤자 그리스 아니냐, 탈락확정 시기만 좀더 늦춰놨군, 하는 소리들이 나돌았다. 3차전에서 스웨덴에 질 것이란 예단에서였다. .
북유럽 최강에다 큰무대 우등생인 스웨덴은 그러나 늦잠 깨어난 질풍노도 러시아축구의 먹음직한 제물밖에 안됐다. 러시아의 2대0 완승. 운치기가 아니었다. 과정과 결과 모두 러시아가 압도했다. 스웨덴 감독도 꼼짝없이 인정했다.
▶히딩크 매직. 한동안 뜸했던 거스 히딩크 감독에 찬사가 세계언론을 장식했다. 6년 전 그 붉은 유월의 추억 때문에 지구촌 코리안들도 다시금 매료됐다. 알프스발 히딩크 매직은 1절로 끝나지 않았다. 준준결승에서는 스웨덴보다 훨씬 값어치있는 제물을 유린했다. 네덜란드, 죽음의 3조에서 디펜딩 월드컵 챔피언 이탈리아를 3대0으로, 월드컵 준우승팀 프랑스를 4대1로 격파하고 동유럽의 복명 루마니아에는 1.5진을 내세우고도 2대0 완승을 거두는 등 이번 대회 조별리그에서 가장 강력한 화력을 선보인 오렌지군단이었다. 더욱이 히딩크의 조국이었다. 히딩크 매직에 대한 흥분된 반응과 입체적 조명이 봇물을 이뤘다. 불길을 이뤘다.
▶그 불똥이 엉뚱한 데로 튀었다. 스웨덴 네덜란드 같은 필드안 제물 말고도 숱한 필드밖 제물들을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유탄을 맞은 이들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허정무 감독(한국대표팀)이 대표적이다. 히딩크 지도력 재조명 기사들이 줄을 잇는 가운데 하필 지도력 부재시비에 휘말린 둘의 덩치를 더욱 왜소하게 만들었다. 23일에도 그랬다. 영국의 더 타임스와 한국의 한 스포츠전문지 기사가 몇바퀴 굴러 색깔과 무늬를 달라하더니 이 대통령과 허 감독의 아픈 곳을 찔렀다.
더 타임스 기사는 러시아에서 히딩크 감독의 인기가 워낙 높아 (물론 그는 네덜란드 국적이어서 출마자격이 없지만) 당장 대통령선거에 출마한다면 압도적으로 당선될 것이라는 구절로 한국네티즌의 이명박 생각에 불을 지폈다. 한국야후 관련기사에서 아이디 ansdudtm이 이 기사를 비틀어 미국산 쓰레기도 수입하는데 히딩크 대통령 수입하는 것은 왜 안되냐고 선창하자 아이디 ansdudtm은 히딩크는 명예시민증도 있으니까 가능하지 않나, 수입하자 대통령으로라고 제창했고, usck6981은 명박 아저씨! 히딩크 아저씨한테 지도력 좀 배우고 오셔유라고 조롱했다. sjmc2005는 한걸음 더 나아가 한국에서 직업란에 정치인이라고 적는 사람 십만명 하고 히딩크 하고 바꿨으면 좋겠다. 필요하면 더 줄 수도 있다고까지 했다.
2010남아공월드컵 아시아예선에서 졸전을 거듭한 한국대표팀 허정무 감독 비판은 더욱 가혹하다. 히딩크 감독이 2002 한국팀과 2008 러시아팀을 비교해달라는 질문에 한국과 러시아 선수들의 정신자세와 자질을 칭찬하며 둘 다 가르칠만한 팀이라고 했다는 답변이 전해지면서 허정무 뭇매질은 더 사나워졌다. 한국이 지난달 요르단과의 서울경기에서 2대0으로 앞서가다 2대2 무승부를 기록한 뒤 허 감독이 선수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듯한 발언이 한 것과 비교됐기 때문이다. 차마 옮기기 민망할 정도로 육두문자에 가까운 독설이 쏟아졌다.
딩크 성(형), 그런데 허정무는 요새 한국 얘들이 수준 낮아 못 가르치겠데여. 그럼 접무(정무)가 성보다 수준이 훨 높은 거에요? 헐. 호날두, 베컴 모아다 가르치라 하면 허정무는 도대체 뭐라 할라나?(parkjwon99) 히딩크에게 좀 배우세요. 겸허하게 반성하면서 ‘국민의 기대가 커서 힘들다’ 이런 엉뚱한 말 하지 마시고 제발. 월드컵 탈락하면 허 감독은 공공의 적이 될지도 몰라요(cpcjm) 정도는 매우 점잖은 편에 속한다.
이명박 대통령이나 허정무 감독은 히딩크 감독의 알프스발 승전보에 유탄세례를 맞으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과연 좁은 세상, 역시 얽히고 설킨 세상이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