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2일 승부차기 징크스’ 씻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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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디펜딩 월드컵 챔피언 이탈리아를 물리치고 유로2008 준결승에 진출했다. D조 1위 스페인은 22일 오스트리아 빈(비엔나)에서 열린 C조 2위 이탈리아와의 준준결승에서 연장전 포함 120분 경기에도 득점없이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4대2로 승리, 4강진입에 성공했다.
이로써 지난 7일 개막된 오스트리아-스위스 공동개최 유로2008 축구잔치의 준결승 매치업은 독일과 터키, 러시아와 스페인의 두판승부로 좁혀졌다. 독일과 터키는 25일(수) 스위스 바젤에서, 러시아와 스페인은 26일(목) 오스트리아 빈에서 맞붙는다. 25일 경기는 ESPN에서 26일 경기는 ESPN2에서 각각 당일 오전 11시30분(서부 표준시)부터 생중계된다. 이번 대회에서 조1위팀이 4강에 오른 건 스페인이 유일하다.
늘 세계축구 수퍼파워로 분류되면서도 큰 대회에서 평소실력에 걸맞은 실적을 좀체 내지 못했던 스페인이 유로대회 4강에 복귀한 것은 1984년 이후 24년만이다. 스페인은 당시 미셸 플라티니가 이끄는 프랑스에 져 준우승을 차지했다. 스페인은 무적함대라는 애칭이 무색하게 월드컵에서는 4강고지에 단 한번도 오르지 못했다.
스페인 입장에서 22일 이탈리아전 결과는 또다른 각별한 의미가 있다. 6월
22일 벌어진 빅매치에서 번번이 승부차기로 분루를 삼켰던 징크스를 떨쳐버린 것이다. 1986년 6월22일 멕시코 월드컵 8강전에서 벨기에에 패한 스페인은 1996년 6월22일 유로대회 8강전에서도 잉글랜드에 승부차기로 졌고 2002년 6월22일에는 광주벌 월드컵 8강전에서 한국에 승부차기로 져 4강고지를 몇미터 앞에다 두고 귀국행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스페인의 6/22 징크스 탈출의 든든한 버팀목은 당연히 이케르 카시야스 골키퍼였다. 후반 중반 문전혼전 중 수소를 이탈했다 잽싸게 되돌아와 루카 토니의 결정적 슈팅을 왼발로 막아내는 등 수차례 선방한 카시야스는 승부차기에서 다니엘레 데 로시와 안토니오 디 나탈레의 슈팅을 몸을 날려 막아내며 스페인 승리의 수훈갑이 됐다.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세계제일 지안루이지 부폰 골키퍼도 비야와 센나의 골같은 슈팅을 막아내는 등 120분동안 이름값에 걸맞은 활약을 하고 승부차기에서도 한차례 선방했으나, 카시야스의 ‘한번더 세이브쇼’에 입을 다문 채 라커룸으로 향했다. 카시야스는 골키퍼는 묵을수록 좋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30대 노장들이 판치는 수문장 세계에서 19세 때인 2001년부터 스페인의 사실상 주전골키퍼가 돼 2002년 한일월드컵 때 동물적 반사동작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22일 이탈리아전 내용상 스페인은 승부차기 이전에 경기를 끝냈어야 했다. 스페인은 중앙수비수 하비 알론조 등 한두명을 제외하고는 주전선수 전원이 건재한 반면, 이탈리아는 세계최고 수비수란 평판을 듣는 빗장수비의 핵 파비오 카나바로와 경기의 완급을 조절하는 플레이메이커 피를로, 미드필드의 족쇄맨 가투소 등 핵심멤버들이 부상이나 경고누적으로 빠졌다.
최상의 멤버를 갖추고도 빅타임 매치에서는 좀체 무리하지 않고 잠그기로 나서는 이탈리아는 상황이 이렇다보니 당연히(?) 초반부터 바깥나들이보다 집안문단속에 잔뜩 신경을 썼다. 미드필드 이음매(피를로와 가투소)가 없다보니 공격패턴은 주로 왼쪽수비수 그로소에서 단번에 최전방 토니로 넘어가는 식이었다. 미드필드를 거의 장악한 스페인은 비야와 토레스 쌍톱을 박아놓고 실바가 뒤를 받치며 부지런히 부폰이 지키는 이탈리아 골문을 넘봤다.
그럼에도 이탈리아 수비는 썩어도 준치. 카나바로와 마테라치 결장으로 생긴 수비라인 공백을 잠브로타가 곱절파이팅으로 메꿔나가며 스페인에 결정적 한방을 허용하지 않았다. 카나바로가 현재 세계축구 공격투톱 중 최상의 카드라고 치켜세웠던 스페인의 비야와 토레스는 무수한 슈팅챈스에서 머뭇거려 볼을 빼앗기거나 블로킹을 당했다. 특히 비야는 후반 중반 이탈리아 벌칙구역 왼쪽으로 침투했다 그로소 등 2명의 수비수 사이에 갇히자 패널티킥을 유도하려고 접촉이 거의 없었는데도 벌렁 나자빠졌다가 패널티킥은 고사하고 도리어 옐로카드를 받았다(허버트 하벨 주심은 양팀 선수들의 엄살에 속지 않기로 작심한 듯 엄살성 기미가 있으면 상대의 반칙이 명백해 보여도 좀체 휘슬을 불지 않았다). 비야와 토레스가 비교적 부진한 가운데 실바의 공격이 돋보였다. 2선공격을 맡은 실바는 부지런히 이탈리아 문전을 드나들며 기회를 만들고 예리한 슈팅으로 부폰을 시험했다.
문제는 스페인의 저효율 슈팅남발. 모두 27개의 슈팅 가운데 골문을 향한 것은 10개에 불과했다. 이는 부폰 골키퍼를 의식해 구석으로 차 빗나갔다고 볼만한 것도 더러 있으나 대개는 이탈리아 문지방까지는 그럭저럭 접근한 뒤 정작 문턱을 넘을 단계에서 결딴을 내지 못하고 다시 뒤로 돌리거나 퇴각해 중장거리포를 난사한 때문이다(이탈리아의 슈팅수 12개, 그중 유효슈팅 6개). 코너킥에서도 스페인은 8대3으로 앞섰다. 외견상 분명히 스페인이 앞섰음에도, 간담을 서늘케 한 슈팅은 엇비슷했다(기록상 세이브는 카시야스 6개, 부폰 9개).
스페인은 26일 같은 장소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러시아와 결승행 티켓을 놓고 격돌한다. 스페인은 D조 개막전에서 다비드 비야의 해트트릭 등 4골을 몰아쳐 러시아를 4대1로 완파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공수 모두 허점투성이였던 2주일전 러시아가 아니다. 킥오프 휘슬부터 파이널 휘슬까지 도무지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번개같은 스피드를 바탕으로 한순간에 득점기회를 만들고 여차하면 스스로 득점포를 가동하는 기폭제 아르샤빈이 복귀한 뒤부터 팀칼러가 확 달라졌다. 조별리그 탈락위기에 놓였던 러시아가 D조 마지막 경기 스웨덴전에서 2대0으로 완승을 거두고 준준결승에서 초강력 우승후보 네덜란드를 3대1로 격파한 추동력 역시 아르샤빈의 종횡무진 활약이었다.
게다가 기막힌 전술과 용병술로 잠자는 거인 러시아축구에 활력소를 불어넣은 히딩크 매직이 어떤 조화를 부릴지 모른다. 스페인리그(프리메라리가) 최상클럽 레알마드리드 등에서 지도자생활을 한 거스 히딩크 감독은 한국팀 사령탑을 맡은 2002년 한일월드컵준준결승에서 스페인에 시종 몰리면서도 치명적 약점을 드러내고 않고 0대0 무승부로 버틴 뒤 승부차기 승리를 거둔 바 있다.
스페인이 이탈리아를 승부차기 끝에 밀어내고 준결승에 진출하자 세계 각국 거의 모든 언론매체들은 스페인의 이탈리아전 88년무승 한이 풀렸다고 보도했다. 스페인이 1920년 앤트워프올림픽에서 이탈리아를 2대0으로 꺾은 이후 월드컵 올림픽 유로대회 등 큰 무대 빅 매치에서 이탈리아에 단 한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그 한풀이를 했다는 얘기다.
틀린 얘기다. 이번 경기결과에 관계없이 스페인의 이탈리아전 무승매듭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왜? 승부차기 승부는 다음 레벨 티켓주인이나 타이틀 주인을 가리는 구실만 할 뿐, 공식기록상 무승부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국제축구연맹(FIFA)의 이같은 규정 때문에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팀이 월드컵이나 유로대회에서 우승할 수도 있게 돼 있다. 유로 대회를 예로 들면 이렇다. 만일 같은조에 편성된 A, B, C, D팀 중 A팀은 2승1무(승점 7), B팀은 3무승부(승점 3), C팀과 D팀은 각각 2무1패(승점 2)를 기록하면 A팀과 B팀이 8강에 오를 수 있다. 그런데 B팀이 준준결승, 준결승, 결승에서 모두 무승부를 기록하고 승부차기로 이겨 챔피언 타이틀까지 거머쥘 수 있는 것이다. 역으로 B팀이 결승전에서 승부차기 패배를 당한다면 공식기록상 ‘단 1승도 못올리고 준우승 겸 단 1패도 당하지 않은 채 우승을 못하는 팀’이 된다.
물론,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이탈리아의 경우 과거 월드컵에서 극단적 수비축구를 구사해 3무승부로 2라운드에 진출한 적은 있다.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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