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물 승자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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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이 아니었다. 독일이었다. 포르투갈의 7번(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이 아니었다. 독일의 7번(바스티안 슈바인스타이거)였다. 독일이 마침내 강호본색을 드러내며 포르투갈을 물리치고 유로2008 준결승 고지에 가장 먼저 올라섰다. 조별리그에서 거듭 불안을 노출하며 B조 2위로 8강에 턱걸이했던 독일은 19일 스위스 바젤에서 벌어진 A조 1위 포르투갈과의 준준결승에서 3대2로 승리했다.
독일에 유로1996 이후 12년만에 4강복귀를 안겨준, 포르투갈에 유로2004 준우승 이후 4년만에 우승고지에서 더 멀어지게 한, 승부의 갈림길은 빅타임 킬러본능 차이였다. 예비고사(조별리그)에서 팡팡 잘나갔던 포르투갈은 결정적 고비에 결정적 한방을 날리지 못해 경기주도권을 쥐고도 고배를 든 반면, 조별리그에서 휘청거렸던 독일은 결정적 고비에 결정적 한방을 팡팡 터트려 지면 끝장인 본고사(녹아웃 단판승부 2라운드) 승부의 시범을 보였다. 조별리그를 마무리하면서 신바람 연승으로 8강고지에 사뿐히 오른 포르투갈 네덜란드 스페인과 어기적어기적 막차를 탄 독일 이탈리아를 비교하며, 단판승부에 강한 후자쪽을 더 조심해야 한다고 지적한 그대로였다.
기록상 거의 모든 면에서 포르투갈이 앞섰다. 슈팅수에서는 2배 이상 앞섰다. 슈팅수 21대10, 그중 골문을 정확히 겨냥한 유효슈팅 10대5. 코너킥도 포르투갈은 8차례였으나, 독일은 3차례에 불과했다. 골키퍼의 세이브에서는 2대7, 독일의 옌스 레만 골키퍼가 그만큼 고생했다는 뜻이다. 볼점유율에서도 포르투갈(53%)이 독일(47%)을 눌렀다.
그러나 독일은 숨은 2인치까지 발휘했고 포르투갈은 남는 2인치마저 써먹지 못했다. 특히 독일은 포르투갈의 최대무기인 호날두의 활동폭을 크게 제한하고 최대약점인 공중전을 효과적으로 펼쳤다. 독일이 넣은 3골 중 2골이 헤딩골이었다.
조별리그에서 부진한 스트라이커 마리오 고메스를 아예 빼고 미로슬라브 클로세만 원톱으로 박아놓고 미드필드를 보강한 독일이 첫골을 얻은 것은 전반 21분. 포르투갈 진영 터치라인 부근에서 미하엘 발락이 수비수 2명 사이로 감각적인 전진패스, 볼은 터치라인을 따라 질주하는 루카스 포돌스키의 발에 걸렸다. 골라인 부근까지 단숨에 파고든 포돌스키는 가로막는 수비수를 피해 골문 바로 앞으로 우겨넣었다. 바로 이때 포르투갈의 천적 바스티안 슈바인스타이거의 킬러본능이 번득였다. 포돌스키와 보조를 맞춰 포르투갈 진영 우중간에서 대각선으로 치달은 그는 문전 수비수 2명 사이를 꿰뚫으며 지체없이 슬라이딩 오른발슛, 골문 왼쪽 구석을 헤집는 선제골을 터트렸다. 리카르두 골키퍼와 수비수들이 움찔할 틈도 없이 나온 골이었다. 2006독일월드컵 3, 4위전에서 포르투갈 골문을 2차례나 유린했던 슈바인스타이거의 포르투갈 물먹이기 쇼는 또 이어졌다.
26분. 포르투갈 진영 좌중간에서 얻은 프리킥을 골문 오른쪽으로 감아차 클로세의 헤딩추가골을 어시스트한 것. 슈바인스타이거의 절묘한 프리킥과 클로세의 폭발적 헤딩력이 돋보인 작품이자 포르투갈의 제공권 취약점을 여과없이 드러낸 골이었다.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감독이 독일의 세트플레이를 조심해야 한다고 했던 것을 입증하듯, 포르투갈 선수들은 클로세의 헤딩을 훼방놓기는 고사하고 아예 멍하니 바라만 보며 이륙조차 하지 않아 단독점프 공중폭격을 자초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조금만 침착했더라면, 킬러본능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선제골 주인은 응당 포르투갈일 수 있었고, 그랬다면 십리도 못가 0대2로 끌려가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두고두고 아쉬울 황금기회는 전반 19분에 있었다. 시망의 찔러주기 전진패스로 독일방어벽을 우회해 손쉽게 골지역 오른쪽까지 점령한 보싱와는 문전으로 쇄도하는 주앙 모티뉴를 겨냥해 낮고 빠른 크로스를 날렸다. 볼은 바깥으로 휘며 모티뉴 양쪽 2명의 수비수를 피해 마치 지남철이 붙은 듯 모티뉴에게 향했다. 레만 골키퍼가 몸을 날리기엔 조금 멀었다. 모티뉴는 큰 기술을 발휘할 필요도 없었다. 수비수의 제지도 받지 않았다. 달리는 관성으로 그냥 엎어지면서 이마만 갖다 대면 골이 될 것이었다. 레만 골키퍼는 보싱와쪽 골대에 바싹 붙었다가 돌아서지도 못한 상태였다. 모티뉴 앞 골문은 텅 비었다. 그런데 웬걸. 모티뉴가 기껏 헤딩모션을 취하다말고 오른쪽 무릎 혹은 허벅지를 들이밀었다. 떨어지는 볼과 치솟는 무릎의 만남은 포르투갈에겐 치명적, 독일에겐 행운이었다. 볼은 붕 떠오르며 코앞 골문을 놔두고 크로스바를 넘어버렸다.
오금이 저린 포르투갈이 만회골을 빚어낸 건 40분, 족쇄수비에 갇혀 활개를 못펴던 호날두가 독일 벌칙구역 왼쪽 모서리에서 시망의 대각선을 받자마자 수비수를 간단히 속이고 골지역으로 직진, 골키퍼와 1대1 상황에서 발사했다. 볼은 그러나 레만 골키퍼가 반사적으로 휘저은 왼손 끝에 걸려 골문 대신 바깥으로 흘렀다. 바로 거기에 포르투갈의 원톱 누누 고메스가 있었다. 한두걸음 빠져나와 돌아서며 왼발슛, 볼은 수비수 메첼더가 내민 발등을 스치며 골문안에 꽂혔다.
이 골로 되살아난 포르투갈의 희망에 재를 뿌린 독일의 3호골은 후반 15분에 터졌다. 이번에도 세트플레이였고, 키커는 또 슈바인스타이거였다. 쐐기골 주인공은 발락. 포르투갈 문전에 도사린 발락은 터치라인쪽 좌중간에서 슈바인스타이거의 프리킥볼이 날아드는 순간, 바로 앞 수비수를 살짝 밀어 공간을 넓혀놓은 뒤 마음놓고 헤딩, 결정타를 날렸다.
포르투갈은 후반 42분 헬더 포스티가의 헤딩골로 다시 한걸음 따라붙었으나 수비벽을 두텁게 하고 버티기에 들어간 독일의 골문을 더 열어제치기엔 시간도 힘도 모자랐다. 마음이 급해진 포르투갈은 오발탄 중장거리 슈팅을 연발하며 기회를 낭비했다. 인저리타임이 되자 포르투갈은 두서없이 홈런성 파울볼성 슈팅을 두세차례 더 날리는 등 조급증을 보이다 되레 포돌스키에게 4호골을 얻어맞을 뻔했다.
끝내기 휘슬. 지난달 21일 모스크바의 그날 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뒤 빗속에 멍하니 하늘만 바라봤던 발락(첼시)은 동료들고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었고, 그날 밤 그 자리서 빗속의 댄스축제를 벌였던 호날두(맨U)가 대신 눈물어린 눈을 밤하늘에 고정한 채 터벅터벅 라커룸으로 향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브라질에 통산 5번째 우승을 안긴 뒤 포르투갈 사령탑을 맡아 유로2004 준우승, 2006월드컵 4위 등 포르투갈축구의 중흥기를 이끈 스콜라리 감독은 이날 패배로 포르투갈대표팀 지휘봉을 놓는다. 그는 다음 시즌부터 첼시 사령탑을 맡는다. 브라질 출신 스콜라리 감독과 포르투갈의 달콤한 인연은 잘하면 오는 29일(결승전)까지 연장될 수도 있었다. 그것이 스콜라리와 포르투갈의 목표였고 누구도 그것을 거품이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열흘 짧아졌다, 가을에 시작되는 다음 시즌부터 첼시에서 동고동락하게 될 플레이메이커 발락 휘하의 독일 때문에. 발락의 맹활약을 바라보는 스콜라리 감독의 심정은 어땠을까.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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