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스 히딩크 감독의 매직이 다시 한번 번득였다. 조별리그 탈락위기에 몰렸던 러시아는 히딩크 매직에 업혀 유로2008 준준결승 고지를 향한 마지막 티켓을 거머쥐었다. 북유럽 강호 스웨덴이 그 제물로 바쳐졌다.
러시아는 18일 오스트리아의 스키리조트 인스부르크에서 벌어진 유로2008 조별리그 마지막 조(D그룹) 마지막 경기에서 스웨덴을 맞아 전에 없던 조직력과 체력을 바탕으로 2대0으로 완승, 딱 한장 남은 8강행 탑승권을 차지했다. 러시아가 유로2008 그룹 스테이지(1라운드 조별예선)를 통과한 것은 1991년 12월 옛소련 붕괴에 따른 러시아연방 독립 이후 처음이다. 러시아축구의 조별예선 통과는 비단 유로대회뿐 아니라 월드컵을 포함해도 1988년 이후 처음이다. 스웨덴과의 A매치에서 승리한 것도 러시아 독립 이후 처음이다. 이전 소련축구는 1988년 여름 유로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고 그해 가을 서울올림픽에서 우승한 것을 끝으로 급격히 퇴조, 월드컵과 유로대회에서 본선진출 자체가 무산되거나 어렵사리 본선에 오르더라도 조별예선 탈락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종종 잠자는 거인이라는, 한편으론 동정같고 또 한편으론 조롱같은 평판을 들었던 러시아축구가 지긋지긋 30년 부진을 털어내고 올해 여름 알프스발 유로축구 대잔치에서 8강행 막차에 오르게 한 마법의 손은 히딩크, 이 남자였다.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러시아는 스페인과의 D조 첫 경기에서 다비드 비야에게 이번 대회 최초이자 18일 현재까지 유일한 해트트릭을 허용하는 등 우왕좌왕하다 1대4로 참패했다. 디펜딩 챔피언이라고는 하지만 객관적 전력상 챔피언 대우를 받지 못하는 그리스를 상대로 한 2차전에서 러시아는 비로소 그리고 겨우 1대0으로 승리해 8강행 한가닥 희망의 불씨를 살리긴 했으나 마지막 상대는 스웨덴, 1994년 미국월드컵 3위 이외에는 빅무대에서 딱부러진 최상급 성적을 낸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1라운드에 만만하게 주저앉은 적도 없는 꾸준한 우등생팀이었다. 더욱이 18일 경기에서 스웨덴은 비기기만 해도 되고 러시아는 꼭 이겨야만 하는 불리한 상황이었다.
뚜껑이 열리자마자 러시아는 튀었다. 오랫동안 우리에 갇혀있다 초원에 풀어진 야생마들처럼 뛰었다. 스웨덴도 결연하게 맞섰다. 스웨덴은 1분만에 러시아 문전에서 러시아와 같은 슬라브계 골사냥꾼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희한한 뒷발질로 번개골을 노렸으나 그의 발에 맞은 것은 공이 아니라 러시아 수비수의 머리였다. 임무교대 공수연습을 하듯 밀고밀리던 싸움은 10분을 지나면서 러시아 주도로 변해갔다. 그 추동엔진은 안드레이 아르샤빈이었다. 지역예선 최종전 안도라와의 경기에서 거친 반칙으로 퇴장과 함께 2게임 출장정지를 당해 스페인전 패배와 그리스전 고전을 필드밖에서 지켜봐야 했던 아르샤빈은 1m68cm의 단신임에도 번개같은 스피드와 강철같은 체력, 보고 또 볼만한 현란한 기술은 아니지만 한순간 찔끔동작으로 수비수를 간단하게 따돌리고 질주하는 실속있는 돌파력과 문전동료에게 정확히 연결하는 패싱력으로 종횡무진 스웨덴 진영을 교란했다. 2게임 못뛴 몫까지 뛰는 듯했다. 특히 스웨덴의 왼쪽 미드필더와 수비수는 아르샤빈의 지칠 줄 모르는 오른쪽 돌파에 헐레벌떡 발품을 팔아야 했다.
누군가 미친 듯이 헤집고 다닌다고 꼭 그가 골을 넣는 것은 아니다. 그의 움직임에 상대편의 신경이 쓰일 때 다른 동료들이 일을 해치우기 쉽다. 전반 24분 익어터진 러시아의 선제골은 그 자체로도 환상의 합작품이었지만 한거풀 벗기면 아르샤빈의 기민한 움직임에 스웨덴 수비수들이 어디다 신경을 써야할지 모르는 가운데 빚어낸 것이었다. 공격에 가담한 러시아 수비수 세르게이 이그나시에프가 스웨덴 진영 오른쪽 터치라인 부근에서 볼을 잡자 스웨덴 선수 3명이 에워쌌다.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아르샤빈은 문전으로 튀었다. 스웨덴 수비수들은 이그나시에프와 거의 일직선 코너플랙쪽으로 뛰어드는 알렉산드르 아뉴코프를 방치했다. 이그나시에프는 삼각수비 틈새로 아르샤빈 대신 아뉴코프에게 땅볼패스, 아뉴코프는 볼을 만지고자시고 할 것 없이 곧바로 스웨덴 골지역으로 뛰어들던 로만 파블류첸코에게 원터치 땅볼연결, 파블류첸코 역시 지체없이 오른발로 땅볼슛. 일이 되려면 헛발질도 약이 되는 법. 거듭 보여준 슬로모션은 파블류첸코가 본시 달려들던 관성을 이용해 볼을 골키퍼 앞으로 감으려 했던 것 같았으나 빗맞으면서 골키퍼와 골키퍼뒤쪽 골대 사이로 빨려들었다. 애초 이그나시에프에게 연결한 긴 패스까지 포함해 4명이 단 한번씩만 터치해 만든 멋진 골이었다.
히딩크 감독이 한골로 만족할 리 없었다. 중원을 장악한 러시아의 공세는 계속됐다. 후반 5분, 터진 골 역시 빠르고 정확한 패스에 의한 3중주 명품골이었다. 하프라인 부근에서 콘스탄틴 지리아노프가 스웨덴 벌칙구역 왼쪽 외곽으로 달려가는 유리 지르코프에게 찔러주자 수비수 2명을 따돌린 지르코프는 돌아서며 반대편으로, 좌우수비수들보다 한발앞서 볼을 찜한 아르샤빈는 볼이 약간 멀다싶자 그대로 미끄럼을 타며 오른발슈팅,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에 골키퍼가 갈피를 못잡는 사이에 볼은 골문 오른쪽 아래 구석을 훑어버렸다.
승리확인 쐐기골에 히딩크 감독은 특유의 어퍼컷 세리머니로 허공을 갈랐다. 스웨덴의 라예르베크 감독은 입을 꽉 다문 채 코만 어루만졌다. ESPN중계팀은 거스 히딩크 감독이 또 해내고 있다고 흥분했다. 그는 결국 해냈다. 내용상 2대0 스코어는 오히려 약과였다. 러시아는 탄탄하기로 소문난 스웨덴 미드필드와 수비진영을 제집 드나들 듯 유린하며 골대를 두 번이나 맞히는 등 수차례 추가득점 기회를 만들어냈다. 스웨덴도 최전방에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노장 헨리크 라르손을 박아놓고 미드필더 프레드릭 융베리와 요한 엘만데르 등이 부지런히 뒤를 받치며 반격했으나 러시아 수비라인은 번번이 뚫렸던 스페인전 때와는 전혀 딴판으로 짜임새가 있었다. 스웨덴이 볼점유율에서 56%대 44% 앞서면서도 0대2로 진 것은 러시아의 강압수비에 실속있는 전진을 그만큼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러시아는 총슈팅에서는 15대12로 약간 앞서고 유효슈팅에서는 6대6으로 같았으나, 코너킥에서 12대4로 스웨덴의 3배에 달했다. 러시아의 공세적 측면을 대변하는 수치다. 이고르 아킨페예프 골키퍼는 스웨덴의 슈팅을 10차례나 선방해 러시아 승리의 또다른 뒷심이 됐다.
융베리 경기가 끝난 뒤 스웨덴 감독은 러시아가 우리보다 훨씬 나았다고 실토했다. 히딩크 감독은 우리는 8강진출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히딩크의 조국 네덜란드와 8강전을 벌인다.
한편 초반 2연승 덕분에 일찌감치 D조 1위 8강행을 확정지은 스페인은 같은 시간 잘츠부르크에서 벌어진 그리스와의 최종전에서 골키퍼부터 골게터까지 거의 몽땅 2진을 내보내는 여유 속에서도 루벤 델 라 레드(후반 15분)과 다니엘 기자(후반 42분)의 연속골로 2대1 역전승을 거뒀다. 이로써 잉여1승까지 보태며 3전승으로 그룹 스테이지 공연을 마친 스페인은 천신만고 끝에 8강에 턱걸이한 숙적 이탈리아(C조 2위)와 4강행 티켓을 다툰다. 유로2004에서 만인의 예상을 뒤엎고 깜짝우승을 차지했던 디펜딩 챔피언 그리스는 전반 41분 앙겔로스 크리스테아스의 선제골로 체면치레 1승을 건지는가 했으나 스페인의 후반맹공에 속절없이 무너져 3전 전패를 당하고 챔피언 타이틀을 반납했다. 유로대회 디펜딩 챔피언이 조별리그에서 3전패를 당한 것은 처음이다. 그 이전에 개막전과 2차전에서 연속 패한 것도 처음이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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