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공화당의 공개토론에서 당시 존 매케인을 비롯한 경선 후보 4명의 대답이 일치한 질문이 있었다.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 어떤 형의 대법관을 임명하겠습니까. 후보들은 현직 대법관중 보수파들의 이름을 주문 외우듯 똑같이 반복했다. “존 로버츠, 새뮤얼 얼리토, 앤토닌 스칼리아…” 9명 대법관 중 현재 5대4로 보수에 기울어진 연방대법원을 완전 보수로 재편하겠다는 이같은 의지표명은 공화당 핵심표밭인 강경우파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기본 공약이기도 했다.
사법부, 특히 연방대법원에 ‘우리사람 심어두기’가 공화당 우파보수진영의 최우선 과제라는 건 새삼스런 이야기가 아니다. 2000년과 2004년 대선 당시 부시도 같은 질문에 스칼리아와 클레어런스 토마스, 두 보수파 대법관을 거명했었다. 그리고, 부시는 2명의 보수파 대법관을 임명함으로서 공약을 실천했고 그 결과는 대법원의 보수화라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지난 몇 년 연방대법원의 체질변화는 바로 민주당이 2008년 선거에서 백악관 탈환을 필사적으로 다짐하는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더 이상의 보수화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기 대통령은 1~3명의 대법관을 임명할 것으로 예상된다. 88세의 존 폴 스티븐스와 75세의 루스 긴즈버그는 고령으로 은퇴가 점쳐지고 워싱턴을 혐오하는 데이빗 수터가 고향인 뉴햄프셔로 돌아가기 위해 사임을 원한다는 것은 이미 대법원 주변에 소문난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진보파에 속한다. 이들이 떠난 후 빈 자리에 만약 ‘매케인 대통령’이 공화당 사람들을 채워 넣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확실한 진보는 스티븐 브레어 대법관 한 사람만 남은 채 8대1의 완전보수 연방대법원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진보적 민주당에겐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악몽이 될 것이다. 공화당 보수진영에선 승리의 환성을 올릴지 모르나 미국의 건전한 사회형성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연방대법원은 그러므로 11월 대선에서 경제나 이라크전 못지않게 중요한 이슈여야 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훨씬 더 중요할 수도 있는데 당장은 여론의 관심을 끌 뜨거운 이슈가 되기는 힘들어 보인다. 오히려 지난 해였다면 관심끌기가 쉬웠을 지도 모른다.
1년전 6월말로 마친 2006~2007년 회기는 이념대결로 채색된 연방대법원의 편향된 면모를 극명하게 보여주었었다. 진보파의 대표 이슈인 낙태권과 어퍼머티브 액션은 대폭 제한되었으며 주요케이스들이 대부분 보수와 진보로 맞선 끝에 5대4로 양분된 판결을 양산했다. 정치권 못지않은 이념양극화를 보인 대법원의 기류가 여론의 도마에 올랐으며 대법원의 정치화를 견제하겠다던 약속을 못 지킨 로버츠 대법원장에게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었다.
금년의 대법원은 사뭇 달라졌다. 회기마감을 열흘남긴 현재까지 50여건을 처리했는데 5대4로 양분된 판결이 두세개 남짓이다. 대부분 로버츠대법원장이 지향한대로 만장일치에서 7대2, 6대3으로 안정된 판결을 내놓았다. 1년전에 비해 초당적 분위기가 완연하다. 원인분석은 여러 갈래인데 그중 하나가 ‘대통령선거’다. 선거를 앞둔 회기에선 언제나 안정된 합의를 도출해낸 판결이 많았다는 것이다. 대법원 자체가 선거이슈로 부각되기를 원하지 않는 대법관들이 행동을 자제하는 때문이다.
지난 주 마침내 대법원에 대한 관심을 끌만한 판결이 나왔다. 관타나모 전범수용소 수감자들에게도 민간법정에서 재판받을 권리를 허용하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팽팽한 이념대결을 보이다가 중도보수인 앤소니 케네디가 진보편에 서는 스윙보트 역할을 하면서 끌어낸 5대4의 결과였다.
지난 며칠 분노한 공화당 보수진영에선 거센 비판이 쏟아졌으며 한 표 차이 ‘불안한 승리’에 가슴을 쓸어내린 민주당 진보진영에서도 대법원의 더 이상 보수화는 필사적으로 막아야한다는 각성이 일고있다. 단 1명이라도 보수파가 대법원에 더 입성한다면 진보이념의 대들보인 ‘민권 보장’ 역시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8대1 보수 대법원이라면 낙태합법화나 인종통합교육의 판결 또한 번복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매케인과 오바마 두 후보도 12일에 나온 관타나모 판결에 정식으로 반응을 보였다. 대법원 인선이 캠페인 이슈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법치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중요한 한걸음”이라는 오바마의 환영언급에 비해 매케인의 반응은 조금 복합적이었다. 대선 출마 전부터 관타나모 수용소자체를 반대했던 매케인은 처음엔 “매우 우려된다” 정도의 반응을 보였으나 하루가 지난 후 “미역사상 최악의 판결중 하나”라는 극단적 비난으로 강도를 높였다. 보수우파들의 표를 동원할 캠페인 이슈로 점찍은 것이다.
이제 금년회기의 대법원은 10여건의 케이스만을 남겨놓고 있다. 수정헌법 제2조 ‘개인의 권총소유권한’에 대한 해석을 내려야 할 워싱턴 DC의 총기규제법 관련 판결이 한번 더 논란을 부를까, 그 외엔 금년회기는 조용히 넘어갈 전망이다.
그러나 차기 대법관 인선은 이번 대선의 주요한 이슈로 살아남아야 할 것이다. 아직 여전히 사회적 약자인 소수민들에겐 다음 세대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칠 중요한 이슈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현 보수파 대법관들의 복제판으로 이루어질 공화후보들의 ‘이상적 대법원’보다는 ‘보통 사람들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법관’이라는 오바마의 인선기준이 마음에 와 닿는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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