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석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싸고 시작된 한국의 촛불시위가 화제에 올랐다. 시위 참가자들의 우려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출범 100일밖에 되지 않는 정권을 이렇게 까지 흔들어댈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들이 주류였다. 노무현 정권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자기 손으로 뽑은 정권이 채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주장질을 해 대니 누가 앞으로 온전하게 나랏일을 해 나갈 수 있겠느냐는 걱정 섞인 말들이 오갔다. “한국 사람들은 지나치게 감정적인 것이 문제”라는 진단도 빠지지 않았다.
촛불시위가 이어지자 보수진영의 비판적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국인들의 광기와 조급증 때문이라고 원색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는 논객도 있다.
시위자들과 견해를 달리 하는 다른 사람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그런 집단적 움직임이 못마땅한 것은 물론 섬뜩하게 조차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과연 감정적인가. 대답은 물론 “그렇다”이다. 평균적 수준의 감정을 넘어 간혹 과잉이랄 수 있을 정도로 격정적이기까지 하다.
한국 사람들은 원래 감정적인 면이 강하다. 민족의 심성은 진화론적으로 변화해 나가는 것이 아니다. 유목민 시대와 농경시대를 거쳐 이제 과학의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마음속의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감정적 심성은 수천 년 전이나 21세기인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합리성과 이성이 지배하는 시대에도 조금만 자극 받으면 이런 감정적 심성은 곧바로 분출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촛불시위를 ‘감정 과잉기질’의 표출이라고 우려하고 있지만 근원은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한국민들을 하나 되게 하고 전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던 ‘붉은 물결’의 뿌리와 같다. 당시 붉은 물결은 한국민의 자긍심이었다. 편협한 연고주의에 사로 잡혀 있던 대한한국을 일시에 하나 되게 했던 스펙태클이었다. 감정적이지 못한 민족은 결코 연출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우리는 이런 자신들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겼던가.
감정 혹은 이성만을 지니고 있는 개인과 사회는 없다. 이성적 측면과 감정적 측면을 함께 지니게 마련이다. 이성과 감정 가운데 어느 측면이 더 두드러지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감정이야말로 약자가 가진 유일한 표현 수단이자 언어일 때가 많다는 점이다. 강자들은 그들의 언어와 도구를 가지고 있지만 약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단지 감정을 통해서 자신들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강자에 의해 붙여진 ‘감정적’이라는 수식어가 곧잘 붙어 다닌다. 권력과 인종, 그리고 식민지 관계를 살펴보면 이것은 곧 바로 확인된다. 식민 시절 일본인들은 한국 사람들을 ‘감정적인 민족’이라고 폄하했다.
그렇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힘은 한국 사람들 특유의 감정적 심성을 토대로 한 집단적 에너지였다. 이런 기질은 쉽게 뜨거워졌다가 쉬 식어 버려 간혹 ‘냄비근성’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하지만 합리적으로 잘 설명되는 않는 한국인들의 놀라운 저력을 이끌어내 온 ‘신바람’은 이런 감정적 기질이 생성해 낸 에너지였다.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은 한국민들의 신바람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면서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반면 한국 사람들을 감정적이라고 깔봤던 일본인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며 TV 앞에서 조용히 응원하는 모습들이었다. 열기 넘치는 한국의 거리 응원과 대조되는 이런 모습에서 역동성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다.
수십만을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한 촛불시위는 좋든 싫든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 됐다. 감정적이고 집단적이고 폭발적인 한국 사람들의 기질에 인터넷이란 점화장치를 장착했으니 더 이상 누가 막아선다고 해서 막아질 일이 아니다. 21세기형 광장 민주주의라 할 만한 이 같은 흐름이 마음에 안 든다고 개발독재 시대의 가치관으로 재단하고 대응하려 하는 것은 역풍을 부르는 일이다.
한국 사람들은 지나칠 정도로 감정적이다. 불과 같은 뜨거움을 지니고 있다. 이런 국민들을 다루는 데는 불을 다루는 것과 같은 조심스러움과 섬세함이 있어야 한다. 불이 풀무질 잘 하는 솜씨 좋은 대장장이를 만났을 때는 생산적인 에너지가 되지만 잘못 다뤘다가는 불꽃이 마른 풀로 옮겨 붙어 파괴적인 결과가 초래된다.
한국민들의 기질이 ‘신명’의 에너지로 승화되느냐 아니면 ‘분노’의 에너지로 폭발하느냐는 다루는 이의 솜씨에 달렸다. 다른 무엇을 탓할 일이 아니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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