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라며 인생과 권력의 무상함을 노래했던 고려학자 길 재의 마음을 헤아려 보며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개성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지난달 중순 국가조찬기도회 취재차 한국을 찾은 길에 주어진 일일 개성관광 기회였다. 허리 잘린 한반도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가 본다는 설렘이 있었다.
도라산 CIQ(남북출입사무소)에 도착해 현대아산 직원들로부터 주의사항을 듣고 반입금지 품목을 맡겼다. 종교관련 책자나 신문, 160mm 이상 렌즈를 장착한 카메라, 광학 24배줌을 넘는 캠코더, 10배율 이상의 망원경, 셀폰, 라디오 등은 가져갈 수 없다. 카메라는 디지털만 허용된다. 필름을 쓰는 아날로그는 찍은 사진을 한 장씩 확인할 수 없어서다.
일행 400여명과 관광 버스에 다시 오르니 능선이 나지막하고 부드러워 더욱 다정한 산, 푸른 풀밭, 한민족 본래의 마음 같은 청자빛 하늘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리곤 이내 군사분계선을 지난다. 별도의 선이 없고, 단지 ‘군사분계선’이란 표식만 있는 곳이다. 버스마다 2명씩 동승한 검은 양복의 북한 안내원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북한에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알기 어렵다.
이때쯤 안내원들의 본격적인 설명이 시작된다. 비교적 세련된 솜씨로 황진이와 서경덕 스토리를 흥미롭게 풀어내고 때론 ‘19금’ 조크도 한다. ‘아내의 눈물’이란 노래를 구성지게 부르고는 ‘아 목동아’ 등 총 3곡을 연이어 선사하는 ‘서비스’까지 제공한다. 하지만 첫 노래 후 남한 관광객의 갈채와 함께 앵콜 요청이 쏟아지자 “내레 ‘앵콜’이라 하면 못 불러주지만 ‘재청’이라 하면 부를 수 있디요”라며 자존심을 한껏 세운다. ‘비록 우리가 가난해서 외화벌이 관광을 허용하지만, 미 제국주의에 물든 너희들보다는 낫다’는 메시지처럼 들린다.
물론 강도 높은 경고도 빼놓지 않는다. 늘 목에 걸고 다녀야 하는 ‘관광증’을 훼손하면 최고 100달러 벌금을 내야 한다거나 관광지 내부를 제외한 바깥 모습을 버스 안에서라도 찍는 것을 절대 금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기자는 선죽교 옆에서 주차된 관광버스들 사이로 바깥이 살짝 보이는 사진(‘조선은 하나다’라는 현수막이 보이는 별 내용도 아닌)을 찍다가 “카메라를 빼앗기고 싶냐”는 협박을 받기도 했다. 체제 수호를 위한 안간힘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남한민심 파악 목적에선듯, 수시로 관광객들에게 질문을 퍼붓는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와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 같으냐’ ‘한미 FTA 성사 가능성은’ ‘6자 회담의 미래는’ ‘미 대선 민주당 후보로 누가 뽑힐까’ ‘미국 쇠고기 수입 문제는 어떻게 귀결될까’ 등이 단골 메뉴다. 이슈를 꿰고 있는 안내원들에게서 거듭 질문을 받으니, 관광안내 소책자에 ‘북한의 정치, 경제, 사상 등 서로를 자극할 수 있는 대화는 자제하라’고 적혀 있던 사실이 떠올라 억울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지친 관광객이 “남측(북한에서는 남한이란 단어를 쓸 수 없다)이나 미국 동포들은 먹고 사느라 바빠서 정치에는 별 관심 없어요”라고 하면, 이들은 “그게 왜 정치문제냐”며 정색을 한다. 자신들에게는 그것이 존재 자체와 관련된 본질적인 문제라는 뜻 같다.
북한의 참모습을 담을 수 없어 박연폭포, 선죽교, 숭양서원, 고려박물관 등으로 이어지는 짧은 여행에서 사적을 빼고는 민들레, 목단, 느티나무 등 자연의 얼굴만 찍어댔다. 물론 그 조차도 수십년 전 한국 소도시 같은 개성을 뒤로 하고 마을 입구마다 군인 한 명이 부동자세로 서 있는 길들을 돌아 나온 후 출입국사무소의 북한 군인에 의해 한 장씩 일일이 검열을 받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30만이 살지만 차량을 보기 힘든 개성 거리를 맥없이 걸어가는 일반 북한 주민들과는 단 한 마디도 못 나눠본 채 호텔에 산다는 스님이 ‘전시용’으로 근무하는 사찰 등 ‘보여주는’ 것만 구경하고 서울로 돌아온 저녁, 큰 싸움이라도 치른 듯 목이 뻣뻣하고 온 몸이 쑤셨다. ‘자유 반납’은 단 하루라도 이토록 힘든 것이라는 깨달음이, 때론 자유를 남용하는 한국내 미국 쇠고기 반대 시위대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촛불 물결’을 뉴스에서 보는 요즘 새삼 떠오른다.
김장섭 종교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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