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으면서도 긴 여정이었다. 민주당 예비선거가 끝난 지 엿새 만에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버락 오바마 후보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며 가히 혈투 수준이라 할 수 있었던 두 후보 간의 경선은 유종의 미를 거뒀다.
클린턴 후보에게는 참 어려운 결정이었으리라. 이제 나이 예순을 넘긴 힐러리로서는 어쩌면 이번이 대통령직 도전의 마지막 기회였을 지도 모르고, 또 선출직 대의원 숫자 차이가 너무도 작았기에 크나 큰 아쉬움이 남았을 것이다. 지난 1년반 동안 혼신의 힘을 기울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의 장을 떠나기가 힘들었을 게 당연하다.
무려 1,800만 명이 힐러리에게 표를 던졌고, 이 숫자는 오바마 지지표와 거의 맞먹는다. 당이 정한 스케줄을 위반해 원래 배당된 대의원 숫자의 반 토막만 갖는 징계를 받은 미시건 주와 플로리다 주까지 따진다면 실제 유권자 표는 힐러리 후보가 더 많이 얻었다. 그러나 룰과 원칙은 후보가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가 아닌가.
필자는 예비선거가 시작될 당시 고심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초선 때부터 열성 지지자의 한사람으로 클린턴 부부와 가까운 개인적 인연을 맺어 온 관계로 볼 때 의리상, 그리고 도리상 힐러리를 지지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당시 정계는 힐러리가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는 게 당연하다는 분위기였는데도 내 마음은 버락 오바마라는 ‘콩밭’에 가 있었다. 2004년 보스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봤던 오바마 후보의 카리스마에 끌려 있었던 터라 머리는 힐러리에게, 가슴은 오바마에게 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준비된 대통령 후보 힐러리, 1992년부터의 인연, 대통령직을 훌륭하게 수행한 빌 클린턴의 지적인 부인, 양당을 아우르는 정치인으로서 나무랄 데 없는 뉴욕 주 연방 상원의원, 여성 대통령이라는 역사의 새로운 획을 긋는 상징성 등등 힐러리의 자격과 경력을 보자면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그런데도 마음은 오바마라는 훌륭한 인물과 그의 출마가 갖는 역사성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힐러리 상원의원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민주당에서 정치 자금 모금 능력이 있고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에서 나름대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은 미 전국적으로 2,000~3,000 명 가량이다. 최근의 사례를 보면 앨 고어 전 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 멀리하기’로 이 그룹을 장악하지 못해 쉬운 선거를 아쉽게 패했고, 존 케리 상원의원도 이들의 뜨거운 지지를 끌어내지 못해 주저앉고 말았다.
바로 이 그룹이 이번 예비선거에서 나와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분명히 힐러리를 열광적으로 지지했어야 할 텐데 힐러리가 정치자금 부족이라는 곤경에 빠지도록 방관했다. 왜 그랬을까. 그들중 반 이상의 마음이 나처럼 오바마라는 ‘콩밭’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수는 노골적으로 오바마 캠프로 떠났고, 그나마 의리를 지킨다는 측도 결국 흔들렸다.
지난 2월에 열린 수퍼화요일 선거 때 실탄이 모자란 힐러리는 오바마의 정치자금 공세를 막아 낼 재간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힐러리는 오바마와 대등할 정도로 선전했다. 하지만 힐러리의 내공도 결국 오바마의 ‘모래알 사단’에 결국 무릎을 꿇고 만 상황이 됐다. 출중한 두 후보가 동시에 출마한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11월 대선에서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돼 새로운 역사를 쓸 것이라고. 지금까지는 민주당을 상대로 한 오바마의 여정이었다. 앞으로는 민주, 공화를 막론해 전 미국과 나아가 세계를 상대로 한 오바마의 대장정이 시작된다.
그에게 흑인이라는 굴레는 적합지 않다. 흑인 피가 조금만 섞여도 흑인으로 불리는 미국이지만 엄밀하게 말해 오바마는 흑과 백을 넘어서는 다인종 인물이다. 오바마의 인생 역정은 오늘의 그를 있게 했다. 젊어서도 사색이 많고 고뇌에 찬 인물이었던 그가 이제 고뇌를 떨치고 미국의 미래를 책임지려 나섰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 한인 젊은이들을 가로막던 희망의 한계가 없어지고 ‘담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시간이 지금 다가오고 있다.
리처드 최
한미민주당협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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