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강호 크로아티아, 오스트리아 맞아 고전 1대0 신승
8일 벌어진 B조 1차전 2경기에서 중유럽의 전통강호 독일과 발칸반도의 신흥강호 크로아티아가 각각 폴란드와 오스트리아를 누르고 첫승을 거뒀다. 월드컵 3회 우승에 빛나는 독일은 축구 이전에 역사적 구원이 얽힌 앙숙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폴란드계 선수들의 맹활약에 힘입어 8강행 첫 관문을 사뿐히 넘었다. 크로아티아는 낙승예상을 깨고 투지만점 공동개최국 오스트리아의 파상공세에 쩔쩔맸으나 경기초반 얻은 페널티킥 선제골을 잘 지켜냈다.
◆독일(1승) 2 - 0 폴란드(1패)
폴란드 분할 등 중세 역사까지 들추지 않더라도 독일과 폴란드의 관계는 앙숙 그 자체다. 폴란드 입장에서, 독일의 폴란드 괴롭힘의 역사였다.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인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나치독일의 폴란드침공으로 공식 점화됐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 같은 두 나라의 역사적 악연은 스포츠에도 여지없이 번졌다.
8일 저녁(현지시간) 아름다운 알프스의 나라 오스트리아 뵈르테르제 슈타디온에서 벌어진 유로2008 B그룹 독일-폴란드 경기는 실상 축구 이상도 축구 이하도 아닌 공차기 승부였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넘치는 주목을 받았다. 돈과 시간을 축내 오스트리아로 몰려든 두 나라 열성팬들이 너무 달아올라 킥오프 휘슬이 울리기도 전에 싸움판을 벌이는 등 위험행동으로 무더기로 체포되거나 격리됐다. 외신에 따르면, 그곳까지 가서 정작 경기를 못보고 유치장에 갇힌 양국 원정팬들이 족히 수백명에 이른 것 같다.
승부는 더욱더 희한한 운명의 장난과도 같았다.
독일에 상큼한 2대0 승리를 안겨준 2골이 모두 폴란드계 골잡이 루돌프 포돌스키의 발끝에서 빚어졌다. 지난 2006년 독일월드컵 조별리그에서도 포돌스키와 역시 폴란드계인 미로슬라브 클로제의 쌍포공격에 속절없이 당했던 폴란드는 이후 사령탑을 포함한 대대적인 물갈이를 통해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역대전적 4무11패) 독일에 설욕하려 했으나 또다시, 딴나라 사람이 된 같은 핏줄 스타들의 발길질에 완패를 당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던 폴란드축구의 전성기(74서독월드컵 3위, 82스페인월드컵 3위)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적어도 독일전에서 나타난 전력은 그랬다.
폴란드인들이 하필 독일에 터잡게 된 얄궂은 운명은 20세기 냉전에서 비롯됐다. 독일(서독)은 2차대전 패전에도 불구하고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며 급속히 부응했으나, 승자(연합국)쪽에 섰던 폴란드는 도리어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해 서슬퍼런 독재에 시달렸다. 자유와 번영을 갈구하는 폴란드인들에게 가장 가까운 탈출구는 서독이었다. 포돌스키와 클로제의 부모들도 공산치하 폴란드 탈출물결에 합류했다.
이번만은 각오로 초반부터 거칠게 몰아붙이던 폴란드의 목줄을 바싹 죈 것은 클로제였다. 옛동독 출신 통일독일 국가대표 1호 미하엘 발락의 스루패스를 받은 헤딩의 달인 클로제는 헤딩이 아닌 발로 문전을 돌파, 폴란드 골키퍼와 1대1로 맞서는 황금기회를 만들었으나, 직접슈팅 대신 보다 안전한 골을 위해 패스를 시도했다 무위로 그쳤다. 폴란드에도 기회는 왔다. 전반 8분쯤, 독일진영 오른쪽 측면을 파고든 로보진스키가 문전으로 예리하게 찔러준 크로스 패스를 댓바람에 쇄도하던 주라프스키가 골로 연결시키려 했으나 공이 발보다 조금 빨랐다.
전반 20분. 폴란드의 골문이 순식간에 열려버렸다. 옵사이드를 노린 폴란드 수비라인의 전진수비에 걸려들지 않고 이들과 동행하며 기회를 엿보던 클로제는 최종 수비라인을 꿰뚫은 고메즈의 침투패스를 낚아 문전돌진, 다시한번 골키퍼와 1대1로 맞섰다. 허겁지겁 뒤따라 들어오는 수비수들보다 한발 앞서 후배 포돌스키가 골지역 왼쪽으로 쇄도했다. 클로제는 지체없이 밀어줬다. 골키퍼가 방향을 잡을 겨를도 없이 가볍게 툭, 포돌스키의 발을 떠난 공은 폴란드의 골문 급소에 명중했다.
후반 27분 폴란드의 골문이 다시 열린 것도 폴란드계 공격쌍포의 연쇄 사격에 의한 것이었다. 그 이전에 폴란드 문전에서 벌어진 골란스키(폴란드)의 결정적 실수, 혹은 슈바인슈타이거(독일)의 재치있는 가로채기가 독일 추가골의 도화선이 됐다. 공격에서 수비 모드로 전환하던 클로제는 페널티아크 정면으로 흐르는 ‘보너스 공’을 보자마자 벼락같은 오른발 논스톱 슈팅을 때렸다. 오발탄. 그러나 폴란드는 안도할 계제가 아니었다. 빗맞아 골문 대신 허공을 향해 치솟은 공은 하필, 포돌스키 앞으로 떨어졌다. 아니 포돌스키가 어느새 공 떨어질 명당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는 몸을 살짝 비틀며 지체없이 왼발 발리슈팅, 공은 더 이상 빼지 않고 폴란드 골네트 안쪽에 박혔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던가. 조국 폴란드의 골문을 두 번이나 유린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포돌스키는 월드컵 다음 가는 빅무대에서 연속 골을 넣고도 광란의 골세리머니를 하지 않았다. 에워싸고 축하하는 동료들의 함박웃음 속에서 그는 도리어 난감하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크로아티나(1승) 1 - 0 오스트리아(1패)
오스트리아의 빈(비엔나) 에른스트 하펠 슈타디온에서 8일 벌어진 오스트리아-크로아티아의 경기는 이변이면서 이변이 아니었다. 객관적 전력상 크로아티아의 낙승이 예상됐던 데 견부어 오스트리아가 시종 압도하는 등 과정은 명백한 이변이었으나, 오직 골로 말하는 결과(크로아티아 1대0 승리)는 결단코 이변이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의 삐딱이 축구팬들조차 오스트리아의 유로2008 본선참가는 축구에 대한 모독이라고 빈정거릴 정도로 축구대륙 유럽에서 중하위권에 처진 오스트리아가 98프랑스월드컵 3위 크로아티아에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렸다. 특히 후반에는 아예 반코트 연습경기를 펼치듯 몰아붙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마지막 2인치가 모자랐다. 좌우측면, 특히 오른쪽 날개의 능란한 돌파와 배급으로 쉴새없이 득점기회를 만들었으나 최전방 공격수들의 킬러본능은 대개 한치 앞이거나 한치 뒤였다. 용케 타이밍을 맞추면 수비수의 육탄방어에 걸려들거나 각도가 살짝 비틀려 공은 번번이 골문을 외면했다.
크로아티아는 전반 4분만에 루카 모드리치의 패널티킥 성공으로 앞서나가며 예상대로 낙승을 거두는가 했다가 속절없이 밀리면서도, 오스트리아 공격진의 마무리 실수와 로베트토 코바치와 요시프 시무니치 등 백전노장 30대 수비수들의 맹활약에 힘입어 이번 대회 첫 이변의 제물이 될 위기에서 벗어났다. 수비형 미드필더 니코 코바치와 호흡을 맞춰 골문 호위대를 형성한 이들은 경기후반 선수교체나 스팟킥 등 잠시 틈만 있으면 그라운드에 주저앉거나 허리를 굽혀 무릎을 짚을 정도로 파김치가 됐다. 유로96과 월드컵98에서 연속 득점왕에 올랐던 다보르 슈케르의 뒤를 이어 크로아티아축구 공격선봉에 나선 스르나는 몇차례 역습에서 날카로운 모습을 보여주긴 했으나 공격보다는 일선수비에 더 치중해야 했다.
그만큼 오스트리아의 공세는, 언제 다시 이런 경기를 보여줄 수 있으랴 싶게 파상적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독일, 폴란드를 상대해야 할 오스트리아로서는 크로아티전 패배가 더욱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후반 25분 안드레아스 이반슈비츠의 강력한 왼발슛, 33분 마르틴 하닉의 헤딩슛, 경기종료 직전 로만 키에나스트의 헤딩슛 등 막판공세 집중사격이 모두 과녁을 벗어나면서 오스트리아의 깜짝첫승 꿈도 과녁을 벗어났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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