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증으로 4명이 하산하고 5명만 남은 대원들이 가이드와 함께 정상 도전에 나섰다.
밤새 내린 진눈깨비로 온천지가 하얗게 덮인 제2 캠프.
악명 높은 ‘바람골’ 얼굴마저 얼어…
1-22-08
어제 내린 진눈깨비로 온천지가 하얗고 엄청 추운 날씨다. 얼굴 닦는 물휴지서부터 로션, 볼펜까지 모두 모두 얼어버렸다.
오늘은 우리의 마지막 캠핑장인 베를린(Berlin, 5,933m)에 올라가는 날이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가이드들은 우리 먹이기 위해 저 멀리 중턱에 쌓인 눈을 퍼다가 물을 끓여 우리에게 따뜻한 물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정말 수퍼맨이 따로 없다.
오늘 아침도 역시나 가이드들의 혈압 재는 일과가 시작된다. 이럴 수가… 김 이사님의 혈압이 185라는 결과가 나왔다 한다. 산소 기록은 70도 되는 않는 낮은 수치를 보인다. 가이드가 건강을 이유로 하산을 권유한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김 이사님은 특히나 얼마나 가시고 싶어 한 곳이었을 텐데 조용히 가이드 말에 따르신다.
산이란 그 누구도 장담을 못하는 일 아니겠는가? 건강이 우선이지 정상 정복이 첫 번째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커다란 기둥이 뽑혀진 5명만 남은 우리 팀의 분위기는 썰렁하다 못해 침체 분위기에 빠진 듯 했다.
훗날 LA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우리와 같이 정상을 갔었다는, 괌에서 온 미국인이 우리 팀을 안다며 반가운 인사를 하면서, 또한 김중석 이사님의 안부를 물으며 들려주는 이야기가 팀 중 한 명이 정상 정복 후에 제 3캠프에 도착해 잠을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소식을 알려주니 등골이 오싹해지는 게 아닌가!
우리 모두 김중석 이사님의 판단이 얼마나 현명하셨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고산에서는 경험이 많은 가이드의 판단과 결정에 잘 따라야 안전 산행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이른 아침 정상을 향하는 전미선씨.
1-23-08
몇 시인지 모르지만 5시에 출발할 거라는 계획대로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라고 깨운다. 밤에 유난히 잠을 못 잔 그런 밤이었다. 서니 언니가 어제부터 몸 상태가 이상하신지 고소약을 복용하지 않은 걸 후회하신다.
어제부터라도 약이 있었다면 드셨을 텐데 그동안 몸 컨디션이 가장 좋으신지라 고소약을 아예 가지고 오지도 않은 게 큰 실수였다.
지난해의 페루 잉카 트레일(Inca Trail) 원정 때 고소로 고생을 하신 분이라 이번에는 멘도자부터 약을 복용하셨는데 건강 체크를 하시면 우리들 중 가장 좋은 상태를 보였다. 그런데다 가이드들은 그 고소약을 권하질 않는다. 나중에 우리들이 생각하건데 그 약을 복용하면 물 마시는 양이 배가돼야 하므로 그 물을 제공하기가 힘들어서 그런 것 아니냐며 우리 나름대로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이번 경험으로 훗날 이 산을 가려는 분들께 적극 권장할 점은 고소약을 그 누구의 어떤 말과 유혹(?)에 절대 넘어가지 말고 꼭 복용을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찌됐든 가이드들은 핫 티(hot tea)와 토스트를 아침부터 부지런히 제공을 해주는데 전혀 먹고 싶지가 않은 맘이다.
그래도 오늘은 정상에 오르는 날이다. 수분 공급과 고소 적응 차 뜨거운 물을 억지로 목으로 넘기고 추운 날씨에 발난로(toe warmer), 손난로(hand warmer) 등 부지런히 챙기고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중무장하고 나갔는데도 손가락 발가락이 정말 시리다.
모두들 등불(head lentern)을 켜고 서니 언니가 선발로 그 다음에 나를 세우고 그 다음 순서는 모르겠다. 하여튼 일렬종대로 출발이다.
내 머리 속에는 춥다, 정말 춥다란 생각밖에 없다. 이러다 정말 손가락, 발가락 중 하나 잘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는 해가 나와야지 좀 살 것 같은 곳인데 언제나 해가 나오려나. 폴(pole)을 잡고 있으려니 너무 손이 시려 폴을 접어서 배낭에 넣어버렸다. 그래서 주먹을 쥐고 가니 손 시린 건 해결이 되었다. 이젠 발가락이다. 벌써 발가락의 감각은 사라진 것 같다. 동상 걸리면 큰일이다 싶어 가면서 계속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래도 아직 움직이는 걸 보니 살아는 있는 것 같다. 지금도 이렇게 감각이 없는데 정말 자를 정도가 되려면 얼마나 더 추운 걸까? 상상하기도 싫다.
얼마를 갔을까? 결국 서니 언니가 가이드를 불러 못 가겠다고 선언을 한다. 조금만 더 해보자는 권유에 얼마를 더 가다가 다시 한번 서니 언니가 그만 가겠다고 한다. 결국 다른 가이드와 함께 베를린 캠프로 내려가신다.
성공하라고 인사하는 서니 언니가 부럽다. 나도 정말 따라서 내려가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다. 정말 내가 이걸 왜 해야 하지? 내려가려면 지금 내려가야 하는데! 등등 머릿속이 복잡하다. 하지만 고소도 아니고 어디 아픈 것도 아니고 단지 춥다는 이유만으로 내려간다고 하면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닌가!
바람골에서만 견뎌내면 갈 수 있다고 중간에 만난 설암산악회의 추 회장님이 말씀하셨는데 지금 여기가 그 바람골인가보다.
춥다 매우 춥다. 얼굴을 다 가렸는데도 내 입김으로 인해 마스크가 얼어서 그 얼음이 얼굴을 얼려버리고 있다. ‘악! 얼굴로 벌어먹고 살아야 되는데!’ 이 구호가 생각나면서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까맣게 타 들어간 얼굴 동상이 생각나면서 무슨 수를 써야 하는데 무슨 방법이 없다. 바람 막을 숨을 곳이 아무 데도 없다. 저 멀리 동은 터오고 있는데 산에 겹쳐 햇살은 언제나 여기 도착할지 까마득한 것 같다. 앞으로 가자니 까마득하고 뒤로 되돌아가자니 그것도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정말 오도 가도 못하는 이 상황이 또 전진하도록 만드는가 보다 하며 또 전진하는 수밖에 무슨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가다 보니 바람골도 헤쳐 나오게 되고 갑자기 환한 햇빛이 눈에 들어와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인 곳에 도착했다. 이곳이 인데펜덴시아(Independencia, 6,377m)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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