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영 자/MD 게이더스버그 거주
나는 1918년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하여 형제없는 외딸로 자랐다. 그 후 아버지는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20살 아래인 남동생이 생겼다. 집안에는 조부모님, 고모, 삼촌, 부모님 그리고 나 여섯 식구가 아버지만 쳐다보며 살고 있었다. 상급학교 진학이란 엄두도 내지 못하여 안타까워 할 때 마침 교회 부속 유치원 선생님이 이화전문 보육과 출신인데 ‘공부만 잘하면 이화여고에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 하여 곧 연락하여 입학원서를 받아 아버지도 모르게 원서를 접수시켰다.
어머니 하고만 상의하여 상경 여비를 장만하였다. 마침 떠나는 날은 아버지가 출장으로 부재 중 이었다. 주문진 까지 버스를 타고 그곳에서 배를 타고 원산으로, 다시 경원선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가야했다. 주문진에서 배에 오르기 직전 출장 가셨던 아버지가 부랴부랴 나를 찾아오셨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집으로 돌아갈 것 같아서 속으로 울며 걱정스럽게 아버지를 만났으나 아버지는 오히려 ‘미안하다 내 딸아, 가서 시험 잘보고 합격하여라. 하시며 봉투 하나를 건네주시고 다시 뒤도 안돌아 보시고 떠나 가셨다.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좋은 성적으로 이화여고보에 입학하여 4년간 졸업 때까지 많은 혜택을 받으며 선생님들의 사랑, 친구들과의 아름다운 우정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졸업하게 되었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 자격시험에 합격하였다. 부임지를 강릉 나의 모교로 신청하여 17세부터 15년간 근무하였다. 몇 년 후 때마침 부산 출신의 한 청년이 나타났다. 부산상고 시절 야구 핏쳐였다는 그는 학교 졸업 후 서울 서 훈련받고 강릉 금융조합에 근무하게 된 사람, 친정아버지도 운동을 좋아하셨고 삼촌도 그와 같은 팀의 선수였다. 때는 왜정시대, 일본인 교장, 선생들이 많은 때라 우리는 조심스럽게 데이트를 하였다. 그 시절에는 손 한번 잡아보지도 못했고 악수도 할 줄 몰랐다. 1939년 결혼한 후 10년 동안 친정의 도움으로 맞벌이 하면서 비록 넉넉지 못했으나 2남 2녀를 두고 평화스럽게 살아왔다. 그러나 누가 꿈에나 생각하였으랴. 1950년 6.25동란은 우리 민족의 큰 환란이었고 단란하였던 가정은 파괴되고 미망인의 수는 헤아릴 수 없게 되었으니 우리의 단란하던 가정도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남편은 당시 대한청년단 군 부단장이었고 때마침 회사일로 6월 초 서울 출장을 떠나 부재중이었다. 6.25 주일 아침 3.8선 가까이서 대포소리가 쿵쿵 울려오자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기에 과히 염려도 걱정도 하지 않았다. 아침에 가까운 거리에 나갔다 학교에 나가보니 아! 이게 웬일인가? 피난민은 강당에 가득차고 주먹밥을 해 먹이느라 야단법석이었다. 머리 위로 나르는 대포소리에 애기를 가슴에 안고 세 남매의 손을 잡고 풀밭에 엎드려 ‘이젠 우리 다 죽는구나. 하는 순간은 얼마나 많았던가!
1.4후퇴 후 전쟁의 와중에서도 큰 딸은 이화여중(당시 영도에 있었음)에 장학생으로 입학하는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이 꿈같은 소식, 입학은 했으나 박봉으로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 다행히 장학금을 받고 공부를 하게 되며 우리의 시름을 덜어 주었다. 그러나 생활은 여전히 궁핍하고 힘들었다.
서울 수복을 앞둔 해 크리스마스 지나고 며칠간의 휴가를 얻어 막내 젖먹이를 데리고 강릉 친정에 가서 사정을 이야기 하고 며칠 같이 있다가 잠자는 아기를 남겨두고 모진 마음을 먹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봄에 서울이 수복돼 YWCA 연합회에 와보니 헐기는 했으나 큼직하고 회의실 사무실에도 몇 개 있고 거기에다 부설로 살림 할 수 있는 방과 부엌도 있었다. 고문 P 선생님의 숙소와 내가 아이들 데리고 살 수 있는 큰 방 하나 부엌도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 하나씩 데려와서 남산국민학교에 전학시켰다. 식구가 둘에서 셋, 넷으로 늘어났다. 새벽에 일어나서 연탄불이 꺼졌을 때 난감하던 일, 점심 변또 싸던 일, 어려움도 많았다 2년 후에 큰 아들도 올라와 남산국민학교 - 서울 중. 고등학교, 울기도 잘하던 둘째딸, 오랜 외가 생활을 끝내고 남산, 이대부속 중. 고등에 .... 세 아이들이 탈 없이 건강하게 공부 잘하여 주니 그지없이 기뻤다. 친정 부모님의 도움, 선생님, 선배, 친구들의 그 많은 빚을 다 갚을 길이 없고 다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1963년 큰 딸은 이화대학 사회사업과를 졸업하고 미국 메릴랜드주 애나폴리스에 가게 되었다. 나의 의형님인 Dr. Lim이 초청하여 왔고 다른 공부를 단념하고 X_RAY 공부를 2년간 마치고 병원에서 일하다 그 후 Fairfax 병원으로 전근하였다. 아들은 고려대학 2년을 마친 후 육군에 입대하였고 제대 후에 복교하였으나 공부가 안된다고 68년 도미하여 메릴랜드에 있는 가발 가게에서 일을 배우며 computer 공부를 하여 71년 내가 왔을 때 한 달을 같이 살다 다른 주를 두루 다니며 일터를 찾다가 Texas에 정착하여 30여 년간 살고 있다. 이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스튜어디스로 일하던 둘째도 비행기에서 만난 청년(내가 좋아하던 C 선생님이 잘 아시는 가정)과 결혼하여 딸 형제를 갖고 은퇴 후 애리조나에 살고 있다. 젖먹이로 내 등에 그렇게 오래 엎혀 다니던 막내도 아들 형제를 두고, 형제 중 제일 먼저 며느리를 보았다. 손자, 손녀들도 변호사, 실내장식가, 회사원, 그래픽 디자이너 등 7개 주에 흩어진 가족 수는 꼭 20명이다.
나는 71년 미국 메릴랜드에 살면서 오던 해에 큰 백화점 여점원으로 꼭 10년을 일하고 나니까 65세가 되었고, 그동안 시민권도 받고 저소득자로서 온갖 혜택도 받으면서 깨끗한 아파트에서 노후를 즐기고 있다. 나는 메릴랜드 상록회 초창기 멤버로서 20년간 봉사하고 상록대학 영어강사도 하다가 85세에 은퇴하였다.
가정상담소 일도 이태영 박사가 오시어 개설하고 교포사회에 많은 공헌을 하고 있는데 이사, 고문 등으로 봉사하였다. 지난 90생일에는 가족 20명중 15명이 모여서 하루를 감사하며 즐기고 헤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나이 많은데도 건강합니까?” 물으면 “젊어서 고생한 것과 평생을 먹고 사는 문제로 일 많이 하여서겠지요.”하고 대답한다. 미국 와서 세계 각국 여행도 많이 하였다. 나는 참 외로웠으나 행복한 삶을 누렸다고 생각한다. 현재는 보행이 불편하여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사랑의 마음, 의료복지센터’에 매주 6일간 나가서 많은 혜택을 받으며 ‘과연 미국은 노인들의 천국’이라고 재삼 느낀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본향으로 돌아가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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