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장애 부모 귀 역할 뿌듯”
효자상 조동구군
“청각 장애 부모를 위해 통역을 하고, 픽업을 하고... 미국생활의 불편을 꾹 참아내며 낮엔 열심히 공부를 하고 야간에는 일하는 착한 아이... 한국일보가 시상하는 효행상 후보로 이 학생을 추천합니다. 그 사람은 제 아들 조동구입니다.“
아버지 조남익씨는 숨기지 않았다. 1급 청각장애인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리가 되고, 귀와 입이 되어 살고 있는 아들 동구(23)가 누구보다 자랑스럽고 든든했기에 당당히 효자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씨가 자칫 오해를 살 수도 있는 일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조금만 더 설명을 들어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2004년 취업 이민으로 미국을 온 조씨의 가족들이 정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재봉 기술이 뛰어났지만 1급 청각 장애인이라는 장벽은 어딜 가나 앞길을 막았다. 근근히 파트 타임을 하는 것 외에는 안정된 직장을 갖기가 어려웠다. 지금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아들 동구는 정말 세상과 조씨 부부를 연결해주는 유일한 다리였다. 일반인과의 대화가 거의 불가능한 그들에게 동구는 큰 버팀목이었다. 공부하고 일하고 지쳐 들어오는 늦은 밤에도 이런 저런 부탁을 하면 군말 없이 척척해주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못난 부모 둬서 고생을 많이 한다는 생각에 미안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동구 씨는 이런 생활이 자신의 한 부분이 된게 오래 전이다. 그는 “사실 어떻게 내가 수화를 배웠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인가 우연히 자신이 수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손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체득한 것이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유치원 때까지 남보다 말을 조금 늦게 배우기는 했지만 지금은 물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모 때문에 말이 느린 아이를 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동구씨의 도움을 빌어 아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수화로 묻자 어머니 조정원씨는 “해준 것은 별로 없는데 이렇게 점잖게 자라 지금까지 수화 통역을 하며 도와주니 너무 고맙다”고 밝혔다. 어머니의 수화를 말로 옮기는 동구씨의 얼굴은에는 쑥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솔직히 아버지 어머니를 돕는 게 힘들 때도 있었다는 동구 씨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아니냐고 정색을 하며 “결혼해 독립을 해도 가능하면 부모님을 가까이서 모시고 싶다”고 말했다.
동구씨는 앞으로 컴퓨터 사이언스나 비즈니스를 전공해 꿈을 펼쳐볼 생각이다.
<이병한 기자>
“병수발.노모 봉양 당연한 일”
효부상 이승희씨
“그이가 내 어머니이고 내 남편이니까 딸로서 아내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효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에 이승희 씨(72, 비엔나)는 겸연쩍음을 감추지 못했다. 사람이 사람 된 도리를 했을 뿐인데 무슨 거창한 상이냐는 것이다.
불행의 색채라곤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이 할머니의 쾌활함에는 보통 여인으로선 감내하기 힘든 마음의 짐이 숨겨져 있다. 건강하던 남편 문희용씨(75)가 15년 전 중풍으로 쓰러진 것이다.
“너무 놀랐어요. 건강하고 활달하던 남편이 한 순간 거동을 못하는 반신불수가 된 겁니다. 사실 마음의 준비가 안된 상태라 어찌 해야 할 지 몰랐어요.”
그 후 남편은 휠체어 인생이었다. 그는 남편의 수족이 되기로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식사는 물론 샤워, 대소변 받아내기 등 모든 거동이 아내인 그의 몫이 됐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30파운드나 더 나가는 남편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은 노동이나 마찬가지였다. 휠체어 바깥의 세상과 고립된 환자의 영육과 마주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몇 해 전부터는 혼자 삶도 버거운 이승희 할머니의 등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더 얹혀 있다. 거동이 불편한 92세 친정어머니다. 남편과 사별한 후 필라델피아에서 혼자 사시던 노모를 모셔다 봉양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독립심과 자존감이 강한 분이에요. 자식들에 폐 끼치기 싫다고 혼자 사시는데 더 이상 그냥 놔두면 안될 것 같아 강제로 모셔오다시피 했어요.”
오랜 병수발과 노모 봉양의 와중에도 이 할머니를 지치지 않게 해준 건 그의 손길에 내장된 엄격한 내훈(內訓)의 힘에다 기도로서 일구는 종교적 낙관주의였다.
“내 남편이란 생각과 불편함에도 뜻이 있다는 믿음으로 스스로를 추스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주일이면 와싱톤중앙장로교회에 출석한다. 기도와 회개로 스스로의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것이다. 한편으론 권사중창단 부지휘자, 중앙씨니어센터의 찬양 및 율동 강사를 맡아 타인들에 즐거움을 준다. 서울대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KBS 합창단원으로 활약한 내공에 타고난 활달함으로 인기가 ‘짱’이라 한다.
그의 부지런한 천성은 노모와 남편 수발에 그치지 않는다. 그가 사는 비엔나 노인아파트에서는 통역사이자 운전기사로 통한다.
이승희 할머니의 1남2녀의 자식들은 훌륭히 성장해 주었다. 현재는 줄리어드대 출신의 음악 가족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그는 “누구든지 고난이 찾아온다”며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마음에 따라 그 고난의 깊이는 달라진다”고 말했다.
<이종국 기자>
“혼혈아들 홀로 신앙으로 키워”
장한어버이상 김순연씨
“한국서 온갖 조롱과 수모를 당하던 (혼혈) 아들이 미국에 와서 아버지를 만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가 가장 기뻤습니다.”
장한 어버이상 수상자로 선정된 김순연 씨(79).
미군과 사귀면서 아들을 낳은 후 온갖 편견과 수모를 딛고 키우며 일생을 헌신해 온 점이 높이 평가됐다.
김 씨는 한국전쟁 당시 고향이던 강원도 철원의 한 부대 앞에서 4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행상을 하던 중 강도를 만나 칼에 찔려 사경을 헤매는 큰 부상을 당했다. 때마침 미군 트럭에 의해 발견돼 20대 미군 병사의 수혈 덕에 생명을 건졌고, 그 인연으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아기까지 낳았다.
하지만 아기가 100일 되던 무렵 남편은 갑작스런 발령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소식이 완전히 끊겼고 그 때부터 김 씨와 아들에 대한 모진 시련은 수십년이나 계속 이어졌다.
김 씨는 “동네 아이들로부터 ‘양키’라고 놀림과 따돌림을 당하면서 매일 울면서 들어오는 아들 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 괴롭고 속상했다. 게다가 친정 식구들은 아들을 고아원에 보내라. 한살이라도 젊을 때 새 인생을 시작하라며 보이지 않는 압력을 계속 했다”고 어려웠던 당시를 회상했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막연해 수차례 죽으려고 저수지에 갔지만 자신을 믿는 친정어머니 생각에 눈물을 훔치며 돌아오곤 했다는 것.
김 씨는 “하지만 죽으면 죽으리라. 내 인생의 목표는 아들 잘 키우는 것”이라며 어금니를 꽉 다물며 인내와 신앙으로 아들을 꿋꿋하고 듬직하게 키웠다.
마침내 그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1985년 미국으로 이민간 아들로부터 5년 만에 필라델피아에 있던 아버지와 상봉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 김 씨는 “얼마나 기뻐 울었는지 모른다.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시기였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아들인 김유택씨는 현재 건축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워싱턴 다문화가족회를 통해 혼혈인 시민권 자동부여 법안 통과와 혼혈인 차별 철폐 등 혼혈인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어머니로서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수상 소감을 밝힌 김 씨는 1994년 아들의 초청으로 미국에 왔으며 지금은 버지니아 섄틸리에서 5명의 손자, 증손자들과 함께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며느리 김진희 씨는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항상 시어머니를 생각하며 견뎌 나간다”며 “어머니 날을 맞아 오직 아들 하나를 위해 희생과 사랑을 바친 어머니께 감사를 돌려 드린다”고 말했다.
<박광덕 기자>
“봉사할수 있어서 되레 감사”
사회봉사상 차인섭씨
“이렇게 상을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 앞으로 더욱 열심히 봉사하라는 상으로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겠습니다.”
사회봉사상을 수상한 차인섭(63·훼어팩스 거주)씨는 지난 10여년간 한인 노인들에게 무료 이발을 하는 등 숨은 선행을 해왔다. 노인들 사이에 ‘봉사 이발사’로 통하는 차 씨는 “이발을 해주고 나서 할머니·할아버지들이 환하게 웃고 만족해 할 때, 또 언제 오냐며 물을 때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고맙고 감사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87년도 미국에 도미한 차 씨가 처음에는 메릴랜드 벨츠빌에 있는 사진공장에서 10여년간 일을 하면서 틈틈이 이발 봉사를 했다. 한국에 있을 때 미용사로 일을 한 경력을 살려 자원봉사를 한 것이다.
봉사활동을 적극 시작한 것은 98년 병으로 인해 하던 일을 그만두고 99년도에 버지니아로 이사 와서 부터.
차 씨는 “왼쪽 폐 안에 기관지 염증이 있어 직장근무를 할 수 없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차 씨는 현재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1주일에 4일간 하루 3시간씩 이발 봉사를 하고 있다.
월요일은 봉사센터 시니어아카데미, 화요일은 중앙시니어센터, 수요일은 워싱턴·버지니아노인연합회, 목요일은 메릴랜드지역 데이케어 센터를 방문한다. 이전에는 애난데일 소재 구세군교회에서도 이발 봉사를 했다.
이렇게 10여년간 워싱턴지역 노인 단체를 방문, 이발 봉사를 하다 보니 그를 모르는 한인 노인들은 거의 없다.
차 씨는 “노인들이 저를 찾아와서 아는 체할 때 봉사의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이발 봉사 외에 시간이 나면 노인 아파트에 가서 몸이 불편한 독거노인들을 대상으로 이발도 해주고 설거지도 도와준다.
또 매년 어머니 날, 추수감사절, 추석, 크리스마스 때는 애난데일 에버그린 노인 아파트 앞 슬리피 할로우 마노 양로원을 방문, 한인 노인들에게 한국 음식도 해 주고 있다.
지난 2003년부터 2년간 매주 6시간씩 한인봉사센터에서 자원봉사도 한 차 씨는 “봉사로 인해 내 삶이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차 씨는 남편 차수영씨과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이창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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