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십 노인의 조국 사랑
갑신정변, 독립협회, 3.1운동 등 세 번에 걸친 애국운동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낙심천만한 그는 독립운동에서 물러서고 만다. 1926년 62세의 노인이 된 그는 다시 의학공부를 시작한다. 그 나이에 펜실베니아 의대에 들어가 세균학, 병리학, 면역학, 비뇨학, 피부학 등을 공부한다. 이후에는 이런 저런 병원을 옮겨 다니며 의료에 종사하고, 2차대전 때는 미군들의 징병검역관을 하기도 한다. 물론 언론과 각종 매체에 글을 써 조국의 백성을 깨우치고, 미국인들에게는 한국을 알리고 동포들을 결집시키는 일은 계속한다.
1945년 드디어 조국이 해방된다.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한 해방이 못되고 남이 가져다 준 해방이다. 분단 이후 전쟁에서도 우리가 주도권을 쥐지 못하여 우리 역사를 우리 손으로 써본 적이 없는 떳떳하지 못함은 오늘날까지 계속된다. 미군정 치하에서 해방정국의 정치인들은 단합하지 못하고 이념문제까지 보태져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국민을 한데 모을 수 있을 만한 지도자로서 노투사 서재필을 모셔 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이승만과 불편한 관계인 주둔군 사령관 하지 장군이 직접 찾아와 도와줄 것을 권유한다.
1947년 7월 그리던 고국에 미군정 최고고문으로 돌아온다. 이미 늙었고 아무런 야심이 없으니 국민교육만 하겠다는 전제조건을 달았다. 실로 49년 만의 귀국이다. 민중은 조국의 개혁과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그를 뜨겁게 환영한다. 그러나 미시민권자로서 국내정치에는 아무런 욕심이 없다 하는데도 일부 사람들이 대통령으로 모시자고 한다. 정치적 혼란이 84세의 노인을 슬프게 한다. 같이 노인이 된 제자 이승만보다도 11살이나 위다. 하지장군은 그가 스무 살만 젊다면 얼마나 좋을까 탄식할 따름이었다.
미군정 당시 미국 기자들은 한국에 4명의 지도자(Big Four)가 있는데, 그들을 각기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승만은 세속정치인(Tammany politician), 김구는 군벌지도자(War lord), 김규식은 정치학자(Political scientist), 서재필은 현자(Saint)라 할 수 있다고 보도하였다.
1948년 9월, 귀국 1년여 만에 노인은 둘째 딸 뮤리엘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떠난다. 그 나이에도 다시 병원 문을 열고 진료를 하던 중 터진 한국전쟁 소식은 늙은 애국자를 절망케 하고 졸도케 한다. 남북이 따로 정부를 수립한 것이 애통하여 출국시 고별연설에서 ‘여러분들은 통일된 조국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강조했건만, 동족끼리 전쟁을 벌이고 만 것이다. 1951년 1월 그는 87년의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한다.
서재필은 어두운 시대에 태어나 너무 우여곡절이 많은 생을 살았다. 어려서 조국에서 20년, 두 번 중도 귀국하여 4년, 미국에서는 약 63년(필라델피아 지역에서 55년, 워싱턴에서 8년 정도)을 살았다. 부인 뮤리엘 암스트롱과의 사이에 스테파니와 뮤리엘 두 딸만 가졌는데, 지금은 부인은 물론 두 딸까지 모두 명을 달리 하고, 두 딸에게서도 자식이 없어 자손이 없다. 필라델피아 옆 미디아 시에 있는 그가 살던 집만이 ‘서재필 기념관’이 되어 가끔 한국 사람들이 찾아온다.
서재필 박사는 대중 지도자다. 19세기 말 이래 폐쇄된 조선 왕조와 국민들에게 새로운 사상을 심어 주고, 개혁을 부르짖으며 민중운동을 일으켰다.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며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또한 한글전용이라는 문화운동을 일으켰다.
외교와 관련해서는 미국 땅에 있던 최고의 민간외교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정부 요로에 지속적으로 만남이나 서한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고, 많은 유수한 미국인들을 사귀어 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라는 그룹을 만들어 조선을 돕도록 하고, Korea Review 라는 잡지를 만들어 미국민들에게 조선을 알리기도 했다. 한 사람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세계 여러 나라들의 대사관이 즐비한 워싱턴의 메사추세츠 거리, 한국의 대사관 건물을 지나 조금 더 걷다 보면 셰리던 서클이 나온다. 서클 위에 한국이 정부수립 이후인 1949년에 최초로 마련한 유서 깊은 해외공관 건물인 영사관이 서 있다.
이제 우리가 그 거리를 지나거나, 볼 일이 있어 영사관에 들릴 때면 낮이나 밤이나 늘 거기에 홀로 서 있는 한국인을 볼 것이다. 미주 한인들의 할아버지요 아버지요 아저씨인 서재필 선생이 오가는 한인들을 보고 서 계실 것이다. 그들에게 조국은 무엇이며 미국은 무엇인지를, 두 개의 정체성을 갖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말하고 싶은 듯, 아직도 살아있는 듯 생생한 모습으로 거기에 서 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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