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가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지난 두달 가까이 대형 악재들에 시달리며 침울한 분위기에 빠져있던 그가 활기에 찬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 왔다.
6일 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압승을 거둔 버락 오바마의 승리 연설은 이미 경선 아닌 11월 본선을 겨냥하고 있었다. 대세를 확인한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확보한 대의원과 전체 득표수 등 객관적 상황으로 전세가 판가름 났을 뿐 아니라 일단은 라이트목사 파문을 잠재우며 위기관리능력도 입증한 것이다.
아직 인디애나 승리가 채 확정되지도 않은 힐러리에게 축하인사를 보내는가 하면 “치열한 경쟁에서 맞섰지만 우리는 이 나라를 위한 비전을 공유하는 같은 당이며 8월 전당대회와 11월 본선에서 하나로 화합할 것을 확신한다”며 힐러리 지지자들을 향해 화합의 메시지를 전했다. 비판의 화살은 힐러리 아닌, 공화당 후보 존 매케인에게로 날아갔다. ‘민주당 후보’ 오바마에게 힐러리는 이미 공격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일찌감치 힐러리의 완패가 전해진 노스캐롤라이나와는 달리 인디애나의 결과가 CNN등 뉴스채널에서 공표된 것은 새벽1시(동부시간)가 다되어서였다. 거의 무승부에 가까운 힐러리의 신승이 알려지자 연이어 정치해설가들의 판세분석이 튀어나왔다. “끝났습니다!” 7일 아침 NBC-TV ‘투데이’ 사회자의 첫인사도 “굿모닝! 끝났습니까?”였다.
긴 경선의 막바지에서 후보지명을 눈앞에 둔 오바마에게 던져진 과제는 만만치 않다. 수퍼스타의 이미지가 탈색한 것 까지는 괜찮다 해도 신선한 ‘변화의 기수’에서 리버럴 엘리트로 탈바꿈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인종을 초월한 ‘화합의 리더’에서 흑인 몰표로 압승 거두는 흑인후보의 틀에 갇히는 것도 피해야 한다. 힐러리 지지자들을 끌어안으며 대형주 필패의 징크스도 극복해야 한다. 후보지명을 매듭짓기 위해 수퍼대의원들에게 공개지지 선언도 계속 독촉해야 한다. 이렇게 할 일 많고 갈 길 바쁜 오바마의 발목이 아직 힐러리에게 잡혀있다.
모든 미디어가 경선은 사실상 끝났다고 선언하는 7일에도 힐러리는 다음 주 경선지인 웨스트버지니아로 날아가 유세를 벌였다. 그 어느 때보다 활기에 넘쳐 “새로운 날, 새로운 주에서, 새로운 선거를 시작하는 겁니다”라는 그의 외침이 너무나 예사로워서 취재기자들이 오히려 머쓱해질 정도였다.
속사정은 다를 것이다. 6일의 경선은 힐러리 진영이 ‘판 뒤집기’를 별러 온 절호의 기회였다. 모든 상황이 파란불이었다. 오바마는 갖가지 검증에 걸리면서 휘청거렸고 클린턴일가의 특기인 경제가 최대 이슈로 떠올랐으며 지지층이 흑백으로 갈라지면서 대형주의 핵심표밭인 백인근로계층의 후보는 역시 힐러리가 아닐까라는 가설도 꽤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인디애나에서 압승을 거두고 노스캐롤라이나에서도 신승 혹은, ‘정신적 승리’라고 주장할 만한 아슬아슬한 패배의 전적은 올렸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전체 득표수에서는 반전의 여지를 가질 수도 있었다. 결과는 반대였다. 도약의 계기는 추락할 줄 알았던 오바마에게 주어졌다.
안으로는 파산지경에 이른 자금난이 목을 조르고 밖에선 사퇴압력이 노골적으로 가해지고 있다. 앞으로 남은 6개 지역 경선의 결과는 판도변화엔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중요한 일정은 5월31일 민주당전국위원회 회의다. 지난번 당 규정을 어기고 조기경선을 실시해 대의원 계산에서 제외된 플로리다와 미시간을 다시 포함시킬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다. 비공식적이지만 힐러리 승리로 기록된 곳이다.
이번 경선으로 전세는 완전히 바뀌었는데 힐러리 진영의 전략엔 새로운 게 없다. 수퍼대의원을 설득하는 근거도 그대로다 - ‘플로리다와 미시간을 포함시켜야 한다(설사 포함시켜도 숫자상 역전은 불가능하다는데), 오바마는 매케인에 대항할 본선 경쟁력이 약하다…’ 힐러리에게 가능성이 아직 남아있던 때에도 먹히지 않았던 주장이 대세가 판가름 난 이제 새삼 효과가 있을 리 있겠는가.
그러나 한편으론 클린턴부부가 최측근들과 이미 사퇴 여부를 토의하지 않았겠는가, 오바마와의 드림티켓으로 부통령직 가능성을 타진 중이다…등의 귀엣말들이 물 새듯 흘러나오고 있다. 힐러리 진영의 한 참모도 익명을 전제로 “승리로 가는 길이 이젠 솔직히 없다”라고 털어놓았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민주당원의 60% 이상이 경선 계속을 지지했었다. 선거에 대한 익사이팅한 관심을 불러 모으고 유권자들에게 후보의 실체를 보다 폭넓게 보여주며 후보 자신도 경선의 검증을 거치는 동안 본선에 대비한 내성을 기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더독 후보에게도 역전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장기예선의 효과가 득 보다 실이 많아지는 분기점을 지난 것이다. 경쟁이 과열되면서 분열과 불신의 후유증이 깊어지고 있다. 물론 몇 달 후 본선 무렵엔 많이 치유되겠지만 힐러리 지지자 중 절반이 오바마가 후보가 되면 찍지 않겠다는 정도다.
당 분열의 책임을 혼자 뒤집어쓰고, 만신창이가 되어 퇴장당하는 후보의 모습은 지지자들에게 상처로 남을 것이다. 이제 힐러리가 가야할 길은 지금 그가 가고 있는 길과 달라야 한다. 지칠 줄 모르는 투지는 찬사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떠나야할 때를 분별해내는 예지 또한 못지않게 존경받을 만하다. 힐러리의 ‘품위있는 퇴장’을 기대한다.
박 록 주 필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