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정가에 Sister Souljah moment란 용어가 등장한 것은 1992년이었다.
정치가가 자신을 지지하지만 반사회적 과격한 주장을 펴는 개인이나 그룹에 대해 공개적으로 밝히는 결별 선언을 뜻하는 이 말은 4.29 폭동의 산물이기도 하다.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에 출마한 빌 클린턴은 흑인사회의 폭 넓은 지지를 받았었다. 지지자 중 하나로 랩 뮤지션이자 사회운동가이며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시스터 소울자가 워싱턴포스트와 가진 인터뷰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4.29 폭동에 대한 반응을 묻는 기자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흑인이 흑인을 매일 죽이고 있다는데, 한 주를 정해놓고 백인을 죽이는 건 어때요?” 물론 긴 설명 중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미디어들이 이 부분만 발췌해 다투어 인용보도하면서 분노와 비난이 들끓었다.
한 달 만에 클린턴은 시스터 소울자를 향해 공개 비판을 가했다. “…그녀의 말에서 ‘백인’과 ‘흑인’을 바꾸어 놓는다면 아마 데이빗 듀크(백인우월주의자)가 한 말로 생각될 것이다” 그녀 자신은 물론 흑인사회 지도자들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으나 더 많은 중도파, 백인 유권자를 의식해야 하는 클린턴에겐 피해 갈 수 없는 결별 선언이었다.
‘시스터 소울자 모먼트’는 종종 있었다. 2000년 대선 캠페인에서 공화당 후보 조지 W. 부시가 중도 유권자들에게 호소하느라 극우 보수파에 대해 비판을 가했을 때, 역시 공화당 후보 존 매케인이 극우파 리더인 팻 로벗슨 목사를 과격 좌파의 루이스 패라칸과 싸잡아 비난했을 때…그리고 이틀 전엔 버락 오바마 후보가 가장 수위 높은 ‘시스터 소울자 모먼트’의 기록을 수립했다.
29일 오바마는 결국 20년 ‘영적 스승’ 제레마이어 라이트 목사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만약 오바마가 ‘경험 많은’ 노련한 정치가였더라면 한 달 전에, 아니 대선 출마를 결심했던 순간에 벌써 단행했었을 일이다.
지난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는 그야말로 라이트 목사의 ‘4일 천하’였다. 한달여전 ‘갓 댐 아메리카’ 동영상으로 오바마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라이트 목사는 미 전국 뉴스미디어의 각광을 독차지하며 독설의 웅변을 서슴없이 토해냈다. PBS와의 인터뷰, 전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 연설에 이어 28일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의 발언은 이번 라이트목사 ‘퍼포먼스’의 하이라이트였다.
루이스 패라칸의 과격단체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경호를 받으며 등장한 그는 미국의 외교를 테러행위로 비유하며 9.11은 미국 테러리즘의 결과라고 주장했고, 흑인학살을 음모한 미 정부가 에이즈 바이러스를 퍼트렸다는 억지주장도 굽히지 않았다. 미국의 현실을 반영한 자신의 발언에 대한 비난은 자기 개인이 아닌 흑인교계에 대한 공격이라고 강조한 그는 오바마가 자신을 비판하며 거리를 두는 것도 ‘당선되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라고 일축해 버렸다.
‘갓 댐 아메리카’ 논쟁에서 당분간 벗어난 줄 알았던 오바마 진영에겐 속수무책의 악몽이었다. 타이밍이 너무 나빴다. 펜실베니아 패배이후 백인 근로계층을 끌어안기 위해 경제문제에 집중하고 있던 중이었다. 접전지역 인디애나 공략에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던 오바마 캠페인은 무방비 상태에서 강한 일격을 당한 셈이었다. “힐러리가 라이트에게 감사카드라도 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비아냥이 나돌 정도로 라이트 목사의 오바마 때리기는 그가 의도했던 안했던, 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워싱턴포스트의 흑인칼럼니스트 유진 로빈슨은 라이트목사를 비난하는 칼럼의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산다. 라이트 목사는 이제 오바마의 십자가가 되었다’
지난 3월 라이트 목사의 과격 설교가 악재로 떠올랐을 때만 해도 인종문제 스피치로 논쟁을 잠재우며 목사와의 개인관계는 보호하려 애썼던 오바마였다. ‘희망의 담대함’을 일깨워준 그 목사를 통해 흑인 커뮤니티와 아프리카 등 자신의 뿌리와의 유대를 다져온 그에게 결별선언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필요할 때 분노할 줄 아는 파이팅 스피릿도 보여야 했다.
감정표출을 자제하는 쿨한 오바마로서는 상당히 강력한 어휘를 동원한 비판과 결별 선언으로 사태는 일단 진정되었다. 물론 끝난 것은 아니다. 두 가지 변수가 있다. 하나는 라이트 목사의 반격 여부다. 그의 이번 ‘깜짝 출현’이 지난 달 오바마가 자신의 발언을 비판한 데 대한 보복이라는 루머가 사실이라면 또 다른 반격을 우려해야 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유권자의 반응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권자의 반응에 따라 움직일 수퍼대의원들의 마음이다. 그 시험대가 다음주 6일의 예선이다. 특히 47% 대 47%의 지지율로 두 후보가 팽팽히 맞서고 있는 인디애나의 선거결과를 주목해야 한다. 한미민주당협회의 리처드 최씨는 예상결과를 3가지로 분석했다. 오바마가 승리할 경우, 경선은 사실상 끝난 것이다. 힐러리가 신승할 경우, 라이트 목사가 오바마에 끼친 손상은 성공적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증거다. 힐러리가 압승할 경우, 힐러리에게도 후보지명의 승산이 되살아 날 것이다.
아들 같은 신도의 ‘영적 스승’에서 무거운 ‘십자가’로 전락한 목사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선거결과에 앞서 정말 궁금하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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