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개혁개방의 꿈
서재필(1864-1951)은 충남 논산 출신 서광언 진사의 둘째 아들로 전남 보성의 외가에서 태어난다. 외가는 이조참판을 지낸 집안이다. 어려서 충남 대덕의 아저씨인 서광하의 양자로 가는데, 뛰어난 머리가 아까워 관찰사와 판서를 지낸 서울의 외가로 가서 공부하도록 한다. 1882년, 18세에 23명의 과거시험 합격자 중 최연소로 장원급제한다.
그런데 십대의 청년 서재필은 순탄한 관료의 길로 가지 않고 개화와 개혁의 선봉이 된다. 김옥균과의 운명적인 만남 때문이다. 당시의 사회는 밀려오는 서세 속에서 위정척사파와 개화파로 나뉘었고, 개화파는 다시 동도서기파, 급진파로 나뉘어 걷잡을 수 없었다.
바깥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쇄국 속에서, 서양의 우수성과 일본의 발전상을 알게 된 개화파는 조선의 대대적인 개혁을 주장한다. 유교 조선사회는 요즘 문제되는 20/80보다도 심한 5/95의 사회였다. 양반이 아닌 사람들은 대부분 문맹이었다. 제도와 사상의 총체적인 개혁과 국민수준을 높이지 않고는 발전을 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서재필은 회고록 ‘My days in Korea’에서 조선 5백 년을 백성들이 주인이 되지 못하고, 양반 중에서도 100개 가족이 나라를 좌지우지했다고 비판한다.
급진개화파의 맏형은 김옥균이다. 조선 개화당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박규수의 제자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나, 박식하고 재능이 많으며 시대의 흐름에 대한 통찰력을 갖춘 청년이다. 거기에다 카리스마가 대단하여 개화의 청년들이 맏형처럼 따랐다. 서재필은 그를 ‘대인격자요 처음부터 끝까지 애국자’라고 하였다. 박영효는 ‘김옥균은 글 잘하고, 말 잘하고, 시서화에 능하고, 교유에 능한 사람이다’고 하였다.
개화의 청년들은 페리함대 도착 이후 30년간 비약을 이룬 일본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옥균은 유럽 국가들이 수백 년 동안 경쟁적으로 노력을 계속하여 이룬 것을 일본이 한 세대 동안에 달성한 것에 감명을 받고, 일본을 모델로 개혁해야 한다는 의지를 굳힌다. 조선이 후진적 왕정의 늪에 있을 때, 일본은 이미 우편, 철도, 전신, 전보 등 서양문명을 갖춘 나라가 된 것이다.
물론 조선과 일본의 발달 정도가 당초부터 차이가 있기는 하다. 일본의 막부정권도 오랜 기간 쇄국의 늪에 있었지만, 조선과는 달리 오래 전부터 큐슈에 정착촌을 허용한 화란을 통해 유럽을 배우고 있었고, 개항과 유신 이후에는 대대적인 개혁개방을 한 것이다.
옥균은 서재필을 동생처럼 대한다. 재필은 김옥균을 존경과 흠모로써 따른다. 그렇게 김옥균은 서재필의 생애를 좌우한 스승이 된다. 개화당의 젊은이들이 갑신 쿠데타를 일으키는 동기는 한마디로 ‘청국의 종주권에 대한 분노’다. 그들은 1882년 임오군란으로 청에 의해 주권이 짓밟히고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이 붙잡혀 가야 하는 상황에 분개한다. 서재필이 과거에 합격한 해다.
나라의 주권을 지키는 데는 정예군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옥균은 서재필을 일본에 군사유학을 시키고자 한다. 1883년 5월 서재필은 김옥균의 계획에 따라 서구식 군사훈련을 배우기 위해 16명의 청년들을 이끌고 토야마 사관학교에 들어간다. 문관이지만 국방을 배우게 된 것이다. 13개월 훈련 후 귀국하여 고종으로부터 사관학교 창설 및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나, 청나라와 민비의 반대로 무산된다.
임오군란 이후 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서구문물을 택해야 한다는 개화당, 전통적 동맹인 청과의 결속을 지켜야 한다는 수구당의 대립은 더욱 심해진다. 당시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은 민 씨 집안의 그런대로 출중한 인재로서 가장 힘이 센 관료다. 개화의 필요성에 공감하던 그가 1883년 보빙사로 미국까지 다녀온 뒤 오히려 마음을 바꾼다. 개화보다는 권력 때문에 수구당으로 돌아간 것이다.
세계 일주에서 돌아온 민영익이 청나라 교관을 초청하여, 서재필과 일본 사관학교 유학생들을 쫓아내고 개화당을 처치하려고 한다. 그렇게 민영익은 역사 속에서 조선의 개화의 앞길을 막아버린 사람으로 남는다. 한 마디로 식견과 신념이 없는 사람이 지나친 권세를 가진 것이다.
위기에 처한 개화당은 살아날 길이 쿠데타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1884년 12월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이용한 쿠데타가 벌어진다. 주역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 5인이다. 서재필은 사관생도들을 이끌고 행동파 역할을 분담한다. 쿠데타 내각에서 서재필은 병조참판을 맡는다.
그러나 안남문제로 청불전쟁을 벌이는 상황이라 청국이 관여치 못할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김옥균의 거사를 지원하던 이노우에 일본 외상과 다께조 공사의 입장이 갈팡질팡한다. 더구나 주둔군 숫자도 일본측은 150, 청측은 1,500명으로 상대가 안 된다. 청군의 개입으로 쿠데타는 3일 천하로 허무하게 무너진다. 200여명이 사망하고 개혁파는 완전 몰락한다. 쿠데타 주역들 중 홍영식은 피살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간신히 인천에 있던 일본 배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한다. 한 세대 만에 선진국을 따라 잡을 수도 있다는 김옥균의 꿈은 100년이 지난 박정희 시대에야 이루어지니, 지난 역사의 아쉬움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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