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처음 왔을 때, 점심시간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혼자 식사하는 모습은 나에게 몹시 낯설었다. 지금은 그런 모습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그들 틈에 끼어서 나도 가끔씩 혼자 식사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나의 점심시간 풍경은 아주 달랐다. 분야마다 성격이 다르겠지만, 대개 인문학은 작업의 대부분을 철저히 혼자서 해야 한다. 이 때 점심시간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정신적 긴장을 풀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각자 3,000~4,000원만 가지면 두서너 가지의 찌개와 5~6가지 이상의 반찬이 차려지는 훌륭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맛있는 식사를 더 풍성하게 했던 것이 온갖 주제의 ‘수다’였음은 물론이다. 우리의 점심시간은 늘 유쾌했다. 심지어 어떤 때는 내가 점심 먹으러 학교에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 넓지 않은 인간관계지만, 이곳에서 미국인들과 만나면서 느껴지는 것이 있다. 참 친절하기는 한데, 왠지 좀 피상적이라는 느낌을 반복해서 받는다. 물론 현재 나의 느낌을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곳에 이민 온지 꽤 오래된 친구들도 비슷한 말들을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만의 느낌이거나, 완전히 오해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닌 듯하다. 요즘은 가끔씩 ‘개인주의’라는 단어가 무슨 뜻을 가진 말인지 이해될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기본적으로 한국인들의 인간관계는 미국인들이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과는 좀 다른 것 같다. 한국인들은 다른 사람과 개인적으로 가까워지면 서로 개인적인 영역-프라이버시라고도 부르는-을 조금씩 무너뜨리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이 좋게 작용할 때 우리는 이것을 ‘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이란 상대방이 먼저 요청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형편을 헤아려서 미리 배려하고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이때 상대방의 프라이버시는 쉽게, 그리고 우호적으로 훼손된다. 이렇게 서로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해서 서로 용납하는 관계를 우리는 ‘끈끈한’ 관계라고 부른다. 한국인들은 ‘쿨’한 관계보다는 ‘끈끈한’ 관계를 좋아한다. 한국인의 관점에서 ‘쿨’한 사람은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이기 쉽다. 이런 ‘끈끈한’ 관계에서한국인들은 사람 사는 ‘정’을 느끼고, 외로움을 물리친다.
이런 모습은 심지어 가장 이해타산적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직장에서도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해 전에 한국인과 미국인의 직업에 대한 의식을 비교한 예를 들었던 적이 있다. 미국 사람에게 “당신의 직업은 뭐죠?”라고 물으면, 그는 “나는 회계사입니다”, 혹은 “나는 엔지니어입니다”라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에게 “뭐 하세요?”라고 물으면, 답변은 아주 달라질 때가 많다고 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대기업 이름)에 있습니다”라고 말한단다. 얼핏 보기에 한국 사람들의 말은 동문서답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아주 절묘하게도 이 말은 한국적 맥락에서 틀렸다고 보기 어렵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가 보다도, 어디에 속했는가가 더 중요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직업 정체성을 느끼는 방식이 미국인들과는 좀 다르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어떤 면에서 한국이, 미국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나 ‘법’이 지배하는 사회-미국이 어느 수준에서 그 ‘민주주의’나 ‘법’에 의해서 지배되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가끔씩 받는다. 이 말은 한국이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거나 사회적으로 무법천지라는 말이 아니다. 또 이 말은 그런 상태가 좋다거나, 혹은 나쁘다는 말도 아니다.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원칙적으로, ‘민주주의’나 ‘법’에 의한 지배라는 이념은 개인이라는 단위에서 출발한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그 단위가 개인보다는 집단이나 조직일 때가 많다. 이때 조직 안에서 ‘개인’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설사 그 ‘개인’의 행위에 문제가 있어도 그것은 집단을 위한 행동일 뿐이다. 때문에 그런 경우에 처한 사람은, 자기 혼자 잘 살자고 한 행동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사회적 환경에서 오로지 개인에게만 어떤 책임을 묻기는 힘들다.
그런데 이러한 조직이 과연 사회 전체적으로 민주적일 수 있을까. 나는 이런 맥락에서 ‘민주적인 가정’이라거나 ‘민주적인 기업’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가정과 기업이 민주적이지 않은데, 또 살면서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가 민주적이지 않은데 국가만 민주적일 수 있을까도 의문이다.
그런 것을 보면, 민주주의가 작동하려면 개인주의가 필수불가결하고, 개인주의가 만연한다면 우리 모두는 외로워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면에서 외로움은 민주주의의 대가일지도 모른다. 사실 인간이 정치적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운 시간은 기껏해야 100~200년이지만 외로움과의 싸움은 기억할 수도 없는 오랜 시간 전부터였지 않은가.
이정철
UCLA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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