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초의 일이다. 미국의 기독교 사상가 4명이 한 로마 가톨릭 추기경과 대화를 나누었다. 유럽과 미국 그리고 당시 소련에서의 기독교 신앙이 그 주제였다. 그때 그 추기경은 이런 주장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공산주의는 죽었다. 앞으로 닥쳐올 커다란 위협으로 특히 우려되는 것은 그노스티시즘(gnosticism·영지주의)이다.” 이 말을 당시에는 아무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계의 정치 지도에서 소련은 사라졌다. 그리고 인간의 한계로부터 탈출하려는 몽상적인 유토피아적 이상 추구가 요즘 한창 유행이다. 그노스티시즘이 비현실적인 완전 추구라는 새로운, 또 변형된 형태로 그 모습을 여기저기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추기경의 이름은 요제프 라칭거다. 그가 베네딕토 16세란 이름의 교황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했다. 교황의 방문에는 흔히 ‘역사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교황이라는 존재는 극히 상징적이다. 그 교황의 방문이다. 때문에 ‘역사적’이라는 수사가 따라 다니는 것인지 모른다.
백악관 남쪽 뜰에 이처럼 많은 인파가 모인 적이 없다. 교황 방문행사가 세운 기록이다. 이 백악관 남쪽 뜰 행사는 분명 역사적이었다. 단순히 기록적 인파가 몰려들어서가 아니다.
미국의 복음주의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화해를 상징했다는 점에서다. 세속 파워의 정상과 기독교 영적 파워의 대표가 만났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리고 그 만남이 일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이라면 역사적이었다.
일반적 기대는 교황이 이라크 전쟁에 대해 상당한 비판을 가하리라는 것이었다. 지난 93년 요한 바오로 2세가 클린턴 대통령을 만났을 때 낙태문제와 관련해 준열히 꾸짖었던 것같이. 분위기는 시종 화기애애했다. 부시는 현대의 세속주의에 대해 교황이 일찍이 경고한 구절을 그대로 인용해 환영사를 했다. ‘상대주의의 독재를 배격할 메시지를 교황 성하가 들려주기를 기대한다’고 했던 것이다.
‘상대주의의 독재’란 테마는 3년 전 교황에 선출되기 전 추기경으로 한 설교의 내용이다.
종교가 주장하는 도덕적 진리는 근본적으로 압제적이다. 때문에 이는 배격되어야 한다. 무신론인 세속주의의 공격이다. 그 공격을 당시 라칭거 추기경은 종교의 도그마를 ‘상대주의의 수퍼 도그마’에 예속시키려는 독재라고 반격을 가했던 것이다.
교황의 미국 방문도 바로 이와 무관치 않다. 공격적 세속주의에 대처할 미국과의 연대가 그 한 목적이다. 아이러니는 미국의 보수 세력과 복음주의 개신교가 그 굳건한 원군이 됐다는 사실로, 부시와 나란히 선 베네딕토 16세의 모습이 이를 극명히 보여주고 있다.
지난달 23일 부활절에 바티칸에서는 연례행사가 있었다. 교황이 직접 베푸는 영세다. 올해의 경우는 전 이탈리아가, 세계가 그 행사를 주목했다. 이집트 출신 회교도로서 이탈리아에서 필봉을 휘두르고 있는 유력 언론인이 영세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슬람권이 진동했다. 알라를 저버린 것 만해도 그렇다. 거기다가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고, 또 ‘회교는 폭력의 종교로, 근본적으로 악’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믿음과 이성’의 종교인 기독교를 찬양하는 글을 기고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목숨을 건 행위다. 그러나 그는 ‘공개적 개종’을 선택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교황의 설교가, 포교에 대한 교황의 적극적 자세가 그 답이다.
베네딕토 16세는 2년 전 레겐스브루크 대학에서 기독교를 ‘믿음과 이성’의 종교로 설파하면서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했다. 그 설교가 이 언론인을 움직였다. 반면 이슬람권은 회교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고, 오사마 빈 라덴은 교황이 새로운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고 비난했다.
이후 교황은 조용한 가운데 상당히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서방세계가 회교도에게 종교자유를 허용하는 것 같이 이슬람권도 기독교도에게 종교자유를 부여하라는 드라이브를 건 것. 동시에 회교도를 대상으로 한 적극적 포교에 나선 것이다.
베네딕토 16세는 부시와의 회담에서 주로 이슬람 세계에 있는 기독교도의 안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로마로 돌아가기에 앞서 9.11 테러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를 방문했다. 그 현장에서 교황은 9.11사태를 일으킨 장본인들의 개종을 위한 기도를 한 것이다.
테러에 대한 군사적 접근 방식은 찬성하지 않지만 악과 싸우는 그 영적 전쟁에는 앞장서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그 분명한 메시지 전달이 미국 방문의 또 다른 목표가 아닐까 싶다.
교황의 미국 방문은 그러면 어떻게 보아야 하나. 테러 전쟁의 도덕적 리더가 되어달라는 미 보수파의 초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코노미스트지의 논평으로, 틀린 지적은 아닌 것 같다.
옥 세 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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