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성기홍 기자 = 여당을 자만에 빠트리지도 않게 하고, 야당을 절망에 빠트리지도 않게 한 민심의 황금분할 선택이었다
4.9 총선 결과를 통해 드러내 보인 유권자들의 표심은 이렇게 요약해도 될 것으로 보인다.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에 자칫 의회권력을 지배할 수도 있는 절대 안정과반 의석까지는 주지 않은채 국정을 주도할 과반의석인 153석을 제공하면서, 제1야당인 통합민주당에도 대선 패배를 딛고 재기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틀이 될 81석을 줬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을 향해 너무 가혹한 채찍을 휘두르지 않았고, 너무 달콤한 사탕으로 ‘독선’의 길로 유혹하지도 않은 셈이다.
물론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18석), 친박연대(14석), 친여 무소속(17∼18석)까지 포함한 범보수세력이 200석을 웃돌아 보수화 경향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은 점은 분명해 보인다. 지난해 대통령선거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선택한 민심의 연장선이다.
통합민주당의 386 운동권 출신 의원들이 대거 탈락하고, 같은 386이지만 뉴 라이트 계열의 신진 정치인들이 대거 입성한 것은 의회내 진보.보수 세력의 지형 변화를 상징하고 있다.
진보세력은 확연히 퇴조하는 추세를 보였지만, 그럼에도 문국현, 권영길, 강기갑 후보 등 진보세력이 여권 실세를 꺾고 의회에 진출토록 함으로써 진보의 불씨는 미약하나마 꺼트리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원내 안정과반 의석 확보를 위해 논란을 불러일으킬 친박 무소속 당선자들의 복당은 허용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김광림(경북 안동), 강길부(울산 울주) 등 순수 무소속 당선자들을 영입할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이번 선거를 거치면서 과거 지역주의와 연결돼 있던 3김 정치의 영향력은 쇠퇴했지만 영.호남, 충청지역에서 지역주의의 벽은 아직도 높고 두텁다는 사실은 다시금 재확인됐다.
◇수도권 표심 한나라당 쏠림 현상 = 한나라당이 영남권에서 무소속 후보들에게 상당수 의석을 잠식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내 과반의석을 확보하며 승리한 데는 전체 111개 의석이 걸려 있는 수도권에서의 압승이 결정적이었다.
한나라당은 48개 선거구가 있는 서울에서 40석을, 51개 선거구의 경기도에서 24석, 12개 선거구의 인천에서 9석을 획득했다. 수도권 111개 의석 중 73석을 차지한 것이다.
수도권 표심이 한나라당으로 쏠린 것은 지난 17대 총선 당시 `탄핵풍’을 등에 업었던 열린우리당의 압승보다도 훨씬 크다.
서울의 경우만 해도 지난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서울에서 압승을 거뒀지만 32석에 머물렀다. 서울의 한나라당 40석은 1987년 개헌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 서울에서 단일정당이 거둔 최다 의석이다.
아직도 영.호남과 충청도 지역의 표심 유동성이 완고한 점에 비춰볼 때 서울 표심이 전체 총선 판세의 바로미터이고, 서울 지역의 여당 표 쏠림이 한나라당의 승리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여권 관계자는 영.호남, 충청도가 지역적 색채가 여전히 남아 있는데, 수도권에서 탄핵 역풍을 연상케 하는 정도로 의석이 나온 것은 지난 대선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며 서울의 정치 지형에 상당한 변화가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보수.진보 지형변화..`보수대연합’ 가능성 = 지난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152석을 확보했다. 당시 초선이 108명이었고, 상당수가 386 운동권 출신이었다. 그리고 며칠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퍼졌다. 우리 사회 리더 그룹이 진보세력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준 상징적 장면이었다.
그러나 4년만에 열린 총선에서 상황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당내 운동권 출신들을 통할해온 민주당의 김근태 의원이 패배의 눈물을 머금었고 임종석, 우상호, 이인영, 오영식 의원 등 전대협 의장을 지냈던 민주당의 386 운동권 대표 주자들이 낙선했다.
김근태 의원을 꺾은 신지호 당선자는 자유주의연대 대표 출신으로 뉴 라이트 운동의 기수로 알려져 있고, 인천 남동을의 조전혁 당선자도 뉴 라이트 운동을 적극 벌인 학계 출신이다.
한나라당외에 자유선진당 18석, 친박연대 14석, 친박 무소속 후보 등 친여 성향의 무소속 당선자가 17∼18명에 달해 정치적 성향을 보면 의회내 범보수세력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게 됐다. 범보수 세력을 모두 합치면 200석을 웃돌아 개헌 추진 의석에 육박하고 있다.
당장 한나라당은 원활한 국회운영을 위한 안정과반 의석 충족을 꾀하려 무소속 영입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정당의 퇴조는 확연했다. 지난 17대 총선에서 민노당은 10석의 의석을 확보하며 진보정당으로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원내진출에 성공하며 일약 원내 3당의 위치까지 발돋움하며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진보신당은 노회찬, 심상정 의원 등 진보진영 스타 의원이 모두 낙선해 원내 진출에 실패했다. 민노당도 비례대표를 합쳐 5석에 그쳤다.
다만 대선 후보로 세차례 나섰던 민노당 권영길 의원이 지역구 재선에 성공하고 강기갑 의원이 경남 사천에서 여권 실세 이방호 사무총장을 거꾸러뜨린데서 위안을 삼을 수 있을 정도이다.
◇영.호남, 충청권 지역주의 여전 = `영남= 한나라당’, `호남=민주당’, `충청=자유선진당’이라는 권역별 3분 구도는 큰 틀에서 변함이 없었다.
이회창 총재가 이끄는 자유선진당의 충청권 돌풍은 예상보다 거셌다.
충남 10개 선거구 중 천안갑, 논산.계룡.금산 2곳을 제외하고 8곳을 선진당이 휩쓸었고, 대전에서는 6개 선거구중 유력한 차기 국회의장 후보였던 한나라당 강창희 후보를 권선택 의원이 이기는 등 5곳을 싹쓸이했다.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8개 선거구를 모두 휩쓸었던 충북지역에서도 선진당은 보은.옥천.영동에서 이용희 의원이 당선, 교두보를 확보했다.
그러나 대전.충남북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모두 14석을 얻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한석도 건지지 못해 지역정당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평가이다.
영.호남의 경우 무소속 후보들이 각각 상당수 의석을 잠식했지만, 공천 파동의 후유증의 결과물로 평가되며, 큰 틀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텃밭이라는 특징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호남 31개 선거구 중 무소속 당선자는 박지원(목포), 김영록(해남.진도.완도), 이무영(전주 완산갑), 유성엽(정읍), 강운태(광주 남구) 등이다. 무안.신안에서 막판까지 박빙의 승부를 벌이는 이윤석, 김홍업 후보는 모두 무소속이다. 나머지는 모두 민주당 후보가 당선됐다.
영남은 한나라당의 공천 후유증이 극심하게 드러난 곳으로 사실상 한나라당대 친박 무소속 후보간의 대결이 곳곳에서 벌어졌고, 상당수 지역에서 무소속이 당선됐다.
부산에서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한 김무성(남을), 유기준(서), 김세연(금정), 유재중(수영), 이진복(동래) 후보 등 무려 5명의 무소속 출마자가 당선됐다. 연제구에서도 공천에서 탈락, 친박연대 소속으로 출마한 박대해 전 연제구청장이 김희정 의원을 꺾었다.
부산에서 무소속 후보가 당선된 것은 지난 14대 총선때 서석재 전 의원이 사하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이래 16년만이다.
경남에서 최구식(진주을) 의원이, 울산에서 강길부(울주) 후보가 무소속으로 당선됐고, 대구.경북은 이인기(고령.성주.칠곡), 김태환(구미을), 성윤환(상주), 김광림(안동), 정해걸(군위.의성.청송) 등 무소속 후보들이 당선됐고, 나머지 지역은 모두 한나라당이 차지했다.
부산.경남권에서 여당과 친여 성향 무소속들이 휩쓰는 와중에서 민주당 소속 2명 의원의 당선은 지역주의의 벽을 넘어서는 `희망’을 이어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인 경남 김해 을에서 최철국 의원, 부산 사하 을에서 조경태 의원이 각각 한나라당의 `텃새’를 뚫고 재선 고지에 오른 것.
◇3김 영향력 퇴조 = 이번 총선은 각 당의 공천 과정과 총선 결과를 거치면서 1960년대 이후 40여년간 한국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여지껏 그림자를 짙게 드리워 왔던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김종필(JP) 전 총리 등 3김씨의 영향력은 현저히 퇴조했다.
YS는 지난 대선은 물론 이번 총선 과정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지만 영향력은 미미했다. 차남인 김현철씨를 비롯, 김덕룡, 김무성, 이규택 의원이 공천을 받지 못했고, 대변인격이었던 박종웅 전 의원도 공천권을 얻지 못했다.
김무성 의원이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됐지만 YS의 영향력이라기보다는 박근혜 전 대표의 영향력이라는 게 지배적인 분석이다. 총선에 변수가 되지는 못했다는 평가이다.
DJ의 경우 목포에서 박지원 전 비서실장이 당선됨으로써 공천 과정에서 약화된 체면은 일부 회복했다는 평가이다. 하지만 호남 지역에 미치는 그의 영향력은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 지배적 분석이다.
차남인 김홍업씨가 신안.무안에 출마했고, 이희호 여사가 지역구를 누비며 지지를 호소했지만 막판까지 박빙의 승부를 펼친 것에서도 이 같은 분석을 뒷받침한다.
지난 대선때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했던 JP는 한나라당 공천과정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고, 충청권 맹주 자리도 이번 총선을 거치며 이회창 총재에게 넘겨줘야 했다.
sg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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