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귀국과 유신반대 지휘
나의 박사과정은 한국에서 4남매를 오게 함으로써 생계의 부담이 늘어 71년 말에야 끝나 72년 2월에서야 경제학 박사학위를 얻게 되었다. 학교가 끝나자 다행히 졸업한 대학에서 연구 교수로 시작, 교수직을 받게 되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할 무렵 과연 상아탑에서 배운 나의 학문이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가 의아했으며 귀국 전에 미국사회에서 그의 적응을 시험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가톨릭 대학에서의 연구 생활과 교편을 잡기 시작하는 동기가 되었다.
학교가 끝나고 연구생활이 시작된 무렵 고국에 계신 장모님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임시 귀국하는 일이 생겼다. 10년만의 고국 방문이었다. 권불십년이라 했는데 아직도 군사혁명 정권이 계속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홍종철 대통령 홍보비서의 종용과 중재를 통해 박 대통령을 만나보았다. 홍종철 비서는 과거 내가 6군단장으로 있을 때 나의 작전 참모로 있었던 사람이다. 박 대통령은 나의 귀국 시기를 물으며 한국 체류기간 중 산업 시설들을 돌아봐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나는 막내가 대학을 가게 되는 3년 후 아니면 귀국키 어렵다고 대답하였다. 이는 그가 3선 집권이 끝나는 해였다. 나는 장모님의 중태를 이유로 서울에 위치한 국방과학연구소와 포항 제철, M1 소총을 생산하던 동래 병기창 시찰을 마감으로 장모님의 별세에 따른 장례를 끝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홍 비서는 나와 박정희 대통령을 인연지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준 사람이다. 나의 원칙주의적 사고방식으로 홍 비서의 뜻을 결실시켜주지 못하였음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는 얼마 후 청평댐 밑에서 낚시 중 아들이 물결에 휩쓸린 것을 구하려다 불귀의 객이 된 아버지이다. 조속한 귀국과 구체적 직장까지 제안해주며 국내 환경 조성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선배들의 호의도 미국 실사회에서 배운 지식 적용을 시험코자한 나의 생각을 바꾸지는 못하였다.
한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7·4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2, 3개월 후 박 정권의 종신 대통령제가 보장되는 10월 유신 체제가 공포되었다. 나는 또 하나의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5.16의 동기보다 더욱 악랄한 방법이 같은 사람들의 손에서 이루어졌음을 개탄하였다. 국민들은 군정 하에서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때맞춰 워싱턴에서는 교포들에 의해 10월 유신 규탄대회를 준비 중이었다. 군사 쿠데타를 방지 못하였던 나도 이를 반대한다는 의사를 정부 측에 전달하여야 할 책임을 느꼈다. 규탄대회 준비회의에 참석하였다. 준비위원회에서는 내가 대회장을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나는 학생 신분이며 정치행위에 희생된 자로 청치에 가담함은 일종의 보복행위밖에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정치적 행위를 기피하는 입장을 취해 왔었다. 나는 시위 후 나에게 정치적 행사에 관여해달라는 요청을 안하기로 약속받고 유신반대 궐기대회의 지휘 책임만을 맡기로 하였다.
72년 11월15일로 기억한다. 안병국 목사가 부회장으로, 그리고 고인이 된 장성남 씨와 유기홍 박사와 당시 신한민보 책임자이던 정기용 씨, 김응창 씨, 부성래 박사, 방숙자 여사, 황옥성, 고세곤 씨 등과 열거할 수 없는 다수의 유지들과 대학교 교수, 유학생, 그리고 학생회장들의 노력으로 350명이 궐기대회에 참석된 것으로 워싱턴 포스트 지는 보도하였다. 당시 2,000명 정도로 알려진 워싱턴 교포 인구로 보아서는 대단한 참석률이었다. 시위는 듀폰서클에서 시작하여 한국대사관까지 행진, 한국 정부에게 주는 궐기문을 전달하였고, 미국 정부와 국회에 우리의 입장을 전달하였다. 궐기문 초안에는 당시 국무부 통역을 맡고 있던 안홍균 씨의 수고가 컸다. 시위에 참석키 위해 LA에서 전 서울시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김상돈 씨와 초대 한국 총무처장과 불란서 대사를 역임한 전규홍 박사가 참석했으며 시위는 질서 있고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물론 정부를 위한 감시자도 시위 주변을 배회하며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고 들었다. 나는 규탄 대회 회장을 수락한 후 두 사람의 충고를 받았다. 하나는 당시 한국대사로부터 시위에 가담하는 것은 좋으나 지휘자의 자리는 피해달라는 요청이었다. 한국 대사로서는 의당 있을 수 있는 요구이며 어쩌면 본국의 요망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 하나는 같은 교회를 나가는 원로분의 충고이었다. 내가 시위를 지휘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 자신을 위해 너무나 큰 손실이 되니 재고해보라는 충고였다. 나는 이 시위로 3년 후에 귀국하겠다는 생각을 취소하고 미국에서 영주하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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