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아니, 영원히 미궁으로 남을 수도 있다. 벌써 20년이 되어간다. 그 천안문 사태의 진상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니 저 편벽한 곳, 티베트에서 일어난 일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을까.
상황은 단편적으로만 전해졌다. 학살의 참상을 알리는 일부 영상이 인터넷을 타는 정도로. 그나마 체계적으로 사태를 전한 게 이코노미스트지 보도다. 때마침 티베트를 방문 중이던 기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보도도 그러나 전체 그림은 전하지 못했다.
이후의 보도도 계속 산발적이다. 우선 희생자 수부터 헷갈린다. 군인지, 경찰인지 알 수 없는 무장집단이 요소요소에 배치됐다. 망명한 달라이 라마에 대한 중국 당국의 독설은 거침이 없다. 그 가운데 북경 올림픽 성화 릴레이는 예정대로 실시된다는 보도다.
시위가 확산되고 있는 모양이다. 북경의 입장이 때문에 상당히 곤혹스럽다. 그러나 사태 진압에 어느 정도 자신감도 가지게 됐다는 시그널로도 들린다.
하여튼 20년래 최대의 유혈사태다. 이 사태를 그러면 어떻게 보아야 하나. ‘문제는 티베트 경제야, 바보야’- 워싱턴포스트의 분석이다. 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나. 그 원인을 주로 경제문제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티베트인들이 겪고 있는 인권상의 차별도, 경제적 빈곤도, 분리주의자의 독립운동도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민족문제에 있다’- 다른 각도에서의 접근이다. 중국 정부가 취하고 있는 소수민족 정책에 대한 티베트인들의 깊은 좌절과 분노가 저변에 깔려 있다는 지적이다.
‘영혼의 울부짖음으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종교에서 찾아야 한다’- 또 다른 분석이다. 포커스를 중국의 체제에 맞추었다. 그 체제가 지닌 모순에서 티베트 사태의 근본 원인을 축출해 낸 것이다.
“중국의 오늘날 문제는 정부체계의 구조적 조정으로 해결될 수 없다. 아무리 그 개혁이 혁신적일지라도…. 진짜 문제는 ‘중국의 병든 영혼’이다.” 전국 인민대표회의라고 하던가. 말하자면 ‘국회’격인 기구다. 그 기구가 최근 정부 개편안을 만든 것과 관련해 나온 말이다.
이른바 대부제(大部制)를 도입해 정부의 몸집을 줄인다는 게 개편안의 골자다. 그러나 실상을 따지고 보면 당내 파워간의 세력다툼과 그 타협에 지나지 않는다.
탐욕과 부패의 문화가 지난 30년을 지배해 왔다. 그 체제가 피로현상을 보이면서 위기관리에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국의 지도부는 과거 시스템을 답습하고 있을 뿐이다. 정부기구 개편을 꾀한다면서.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모든 것이 가짜다. 믿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오늘날 중국사회는 도덕 부재의 사회다.” 중국 내부에서 들려오는 한탄이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중국의 전통적 도덕률마저 무너뜨렸다. 그 이데올로기도 사문화된 상황에서 싸구려 물질주의와 기회주의만이 판친다. 모든 것의 척도는 오직 물질적 풍요에 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현실로, 부패할 대로 부패한 게 중국의 공산체제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은 영혼은 방황한다. 안정을 희구하면서. 기독교 인구가 1억3,000만을 넘었다. 왜 그토록 급증했나. 그 안에서 위안을 찾기 때문이다. 기독교뿐 아니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일종의 기공체조에 불과한 법륜공에도 사람들은 열광한다. 듣지 못하던 메시지, ‘사랑과 배려’의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러면 티베트에서만 유혈사태가 발생했나. 달라이라마를 육화한 신으로 모신다. 거기서 체제 위협을 느낀다. 법륜공이 그토록 탄압을 받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중국 공산당의 관심사는 오직 권력유지에 있다. 그 ‘공산당 최우선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인권탄압 정도는 예사다. 티베트의 소수민족뿐이 아니다. 종교도 그렇다. 근 10억을 헤아리는 한족(漢族) 농민도 탄압에, 착취대상이기는 마찬가지다.
프랑스의 석학 기 소르망의 표현을 빌리면 ‘중국 공산당은 유교(儒敎)의 뒤에 몸을 숨기고’ 권력유지를 꾀하고 있다. 그 방법은 유아독존격인 중화민족주의를 유교 전통이란 가면을 쓰고 고취하는 것이다. 이번 티베트 사태도 그런 식으로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북경 올림픽 성화 봉송은 마침내 시작됐다. 그리스에서 성화가 채취됐다. 유럽과 아시아의 수많은 도시를 거쳐, 또 ‘티베트의 그 유혈의 현장’을 지나 북경으로 성화는 옮겨지는 것이다. 이 북경올림픽은 그러면 어떤 올림픽으로 앞으로 기억될 것인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재판’으로가 아닐까. 히틀러 나치가 그 사악한 파시즘 체제의 정치 선전무대로 사용했던 그 올림픽 말이다.
옥 세 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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