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들 끼리 모인 자리에서 미국 대선이 화제에 오르면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질문이 있다 - “그런데 백인들이 정말 흑인을 대통령으로 뽑을까요?”
‘인종’은 미 정가에서도 가장 꺼리는 이슈다. 인종논쟁에 휘말린 정치가가 살아남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주변에서 연기만 나도 물을 있는 대로 들이부어 조기에 진화하는 게 상책이다. 더구나 선거전을 치르는 후보가 논란이슈에 대한 ‘솔직한’ 대화를 자청하고 나서는 것은 그 위험부담을 감안하면 도박에 가깝다.
18일 버락 오바마는 이 ‘도박’을 감행했다. 그리고 일단 절반의 성공은 거두었다.
처음부터 오바마의 캠페인은 피부빛을 내보이지 않았다. 인종을 초월한 화합과 변화의 메시지를 강조하며 백인지역에서 승리를 거듭해왔다. 그동안 한두번 불거진 인종논쟁의 발화지도 클린턴 쪽이었고 미시시피 경선에서 90%에 달하는 흑인몰표를 얻었어도 인종선거로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갑자기 인종 폭풍이 몰아친 것은 지난 주였다.
20년간 오바마의 ‘영적 스승’이 되어온 흑인목사 제러마이어 라이트의 설교 동영상이 인터넷과 TV 스크린을 통해 미 전국에 공개되면서다. 흑인사회에서도 소수인 흑인해방신학파에 속하는 그의 설교내용은 과격했다. 특히 보통 백인들에겐 소화하기 힘들 정도로 ‘반미국적’이었다.
‘히로시마에 핵폭격을 감행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국가테러를 지지한’ 미국의 외교정책이 9.11사태를 초래했다고 선동하는가하면 흑인을 말살하려고 에이즈 바이러스를 퍼트린 미 정부가 흑인들에게 ‘갓 블레스 아메리카’를 노래하라고 하지만 무고한 시민을 죽이는 것은 ‘갓 댐 아메리카’라고 성경에도 써있다는 등 극단적 언사를 마구 쏟아냈다…
물론 오바마 진영도 조기진화에 나섰다. 그런 설교는 직접 못 들었다고 부인도 했고 그 내용을 비난하기도 하면서 거리두기에 애썼다. 그러나 비판은 계속 거세졌고 미디어의 추궁도 집요해졌다. 오바마의 캠페인은 출발후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주말을 지내며 오바마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정면승부를 택한 것이다. 짐짓 그 의미를 축소하고 있었지만 인종문제에 대한 솔직한 심경표시는 오바마가 오래전부터 각오하고 있었고 또 한편 하고 싶었던 과제이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성사된 오바마의 18일 인종관련 연설의 성과는 두가지 관점에서 짚어볼 수 있다. 미 최대의 난제인 인종문제에 대한 공개적 토론이라는 역사적 의미와 이번 선거전에서 어떤 변수로 작용할 것인가라는 당장 눈앞의 현실적 효과다.
그의 연설은 훌륭했다. 절제된 논리가 나무랄 데 없이 정연했다. 연설을 준비하던 이틀 동안 새벽 2~3시까지 원고를 고치고 또 고쳤다는 그의 고뇌가 화면을 통해 가슴 저리게 느껴질 만큼 감동적이기도 했다. 거의 모든 정치해설가와 미디어, 학자들이 ‘선거결과에 상관없이 역사에 남을 이 시대 최고의 스피치’라고 찬사를 보냈다.
‘이제 인종은 미국이 외면할 수 없는 이슈’라고 전제한 오바마는 인종을 초월한 사회를 실현시키기 위해선 인종주의 역사를 재인식하고 그 후유증을 직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라이트목사의 극단적 견해를 명백히 반대하면서도 개인적 관계단절은 거부한 그는 라이트목사 세대의 편향된 시각을 미 역사라는 큰 그림 속 한 부분으로 포함시켰다. 그는 백인들에게 인종역사의 희생자였던 흑인들의 분노와 고통을 이해하라고 호소했고 흑인들에겐 어퍼머티브 액션으로 개인적 희생을 치르는 백인들의 분노 , 범죄에 대한 백인들의 우려를 인종차별로 오해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역사의 유산으로 형성된 흑백의 분열과 시각의 차이는 서로가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용납해야만 좁혀지기 시작할 수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오바마집회 특유의 열광과 환호 대신 엄숙한 표정의 초청관객 200여명 앞에서 8개의 대형 성조기를 배경으로 차분하게, 그의 연설은 계속되었다. 사회정의를 위한 젊은 리더의 사명감이 곳곳에 배어 있는 그의 연설은 다시 읽고 다시 들으면 누구나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설득력도 뛰어나다. 그러나 30분의 긴 스피치가 30초 동영상의 강한 충격을 단번에 지워버리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의 이번 연설이 박빙의 접전을 계속하고 있는 캠페인에 별 도움을 못 줄 것이라는 우려는 여기에 근거한다.
그가 설득해야할 백인 부동층이 가장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미국의 화합을 공약으로 내건 오바마가 왜 선동적인 과격파 라이트 목사와의 관계를 20년 이상 지속하며 지금도 고집하는가이다. ‘만약 백인후보가 그랬다면 그의 정치생명은 이미 끝났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겐 ‘라이트목사는 가족과 같다’는 오바마의 해명이 별로 통할 듯싶지 않다.
오바마 연설의 캠페인 효과는 아직 그 결과를 측정하기 힘들다. 공화당 진영이 내심 쾌재를 부른다거나 민주당 지도층 일부가 힐러리 후보론으로 기울어졌다는 등은 루머일 뿐 구체적 성적표는 한달후, 펜실베니아 경선에서 나올 것이다.
위기에 직면했던 오바마는 정면승부를 감행했고 첫 시험대를 거뜬히 통과했다. 이젠 유권자들이 시험대에 오를 차례다. 미국인의 양식과 이성은 인종 초월을 위해 노력할 만큼 성숙되어 있는가에 대해 투표로 대답해야 할 유권자에는 백인들 뿐 아니라 우리 한인들도 포함되어 있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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