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적 한국인들은 교육문제에 대해, 인생에서 두 번 장기적이고 집중적인 교육기간을 갖는다. 한번은 스스로, 다른 한번은 아이들 때문에.
국민 전체가 거의 교육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교육문제는 해결책 없이 반복되는 문제처럼 보인다. 새 정부가 가장 먼저 거론한 문제들 중 하나도 바로 교육문제이다. 그것의 정확한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자립형 사립고등학교’를 100개 쯤 만든다는 내용인 것 같다. 그 정책이 이미 확정된 것인지, 만약 확정되어서 실시되면 한국의 교육문제를 상당한 정도로 해결하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역사적으로 지난 100년 내지 150년 정도는 동아시아 3국, 즉 한국 중국 일본이 유럽과 미국을 열심히 따라온 시기였다. 이 시기에 동아시아 3국의 지식인들과 정책당국자들은 유럽과 미국의 현재는 곧 자신들의 미래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의 범위를 100년이나 150년이 아니라, 가령 300년이나 500년 혹은 1000년쯤으로 늘이면 어떨까? 그 속에는 미국이나 유럽의 풍경에는 없는 것들이 중국이나 한국의 역사 속에 나타난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대표적인 교육기관은 두 가지, 즉 향교와 서원이었다. 이 두 기관은 오늘날로 보면 똑같이 고등학교쯤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두 기관의 성격은 아주 달랐다. 향교는 조선의 건국(1392)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약 200년 동안의 대표적인 국립중등교육기관이었고, 서원은 16세기 후반부터 18세기 후반까지 200년 동안 대표적인 사립중등교육기관이었다. 향교는 국가가 세우고 운영했고, 서원은 개인이 세우고 운영했다. 이 두 기관의 대표성이 갈리는 것이 16세기 후반이다. 그 때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16세기 후반은 조선 건국 이후 지방에서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닦으며 성장해왔던 사람들이, 드디어 정치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던 때였다. 원래 향교의 입학자격에는 상민과 양반의 자식들 간에 구분이 없었다. 차별이 있는 신분사회에서 중등교육까지는 법적으로 그런 차별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더 이상 양반의 자식들은 향교에 나와서 공부하지 않게 된다. 상민의 자식들과 섞이는 것도 그들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고, 결정적으로 국가의 향교에 대한 지원이 갈수록 나빠졌기 때문이다. 좋은 선생도, 학습을 위한 적절한 지원도 점점 사라져갔다. 반면에 양반과 상민들 사이는 점점 더 큰 사회적 경제적 격차가 벌어졌다. 결국 양반의 자식들이 빠져나가고 국가 지원마저 줄자, 향교는 더 이상 정상적인 학교기능을 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양반들은 스스로 학교를 세우고 운영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서원이다. 나중에 서원이 당쟁의 온상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흔히 자본주의 사회를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보상이 돌아가는 사회라고들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어떤 사회나 그랬다. 무능력한 사람들이 지배층이 됐던 사회는 존재한 적이 없다. 단지 그 ‘능력’의 내용이 시대마다 사회마다 달랐을 뿐이다. 능력은 개인적이거나 생물학적이기 이전에 사회적이고 역사적이다.
그런 면에서 어떤 사회나 초기에 그 사회를 만든 사람들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사회를 만드는 동안 그 사회는 활기차다. 문제는 그들의 시대가 지나갈 때 쯤 나타난다. 그들의 생물학적 후손들이 저절로 그들과 같은 능력을 가졌기를 바라기는 어렵다.
그래서 어떤 사회의 초창기가 지나면 대개 명문학교가 등장한다. 앞 세대의 영향력으로 그 후손들의 사회적 능력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고, 앞 세대의 승리자들이 도달한 지점에서 그 후손들이 출발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특히 잘하는 학교가 소위 명문학교가 된다. 이런 흐름은 막기 어렵다. 더구나 개인의 욕망을 긍정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번 돈으로 자기 자식의 앞날을 위해 교육시키려는 것을 막을 근거는 없다.
그럼 나라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것은 능력 있는 부모와 조상을 갖지 못해서 공정한 경쟁의 기회가 제한되는 다수의 아이들을 위해 질 높은 교육을 제공하는 일이다. 이것이 가능할 때만, 교육을 통한 사회통합이라는 거창한 구호가 실제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 세계적인 수준에서 비교해 볼 때, 한국 정부의 교육에 대한 투자는 매우 낮다. 일례로, 전 세계에 어느 정도 사는 나라들 중에 한국처럼 사립대학이 많은 나라는 없다. 교육을 사적인 영역에만 맡겨놓으면, 장기적으로 교육은 사회통합 쪽보다는 완전히 그 반대 방향으로 간 것이 거의 예외 없는 역사적 경험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자립형사립고’ 정책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어떤 ‘정책’이라고 하기 어렵다. 이것은 저절로 나타나는 사회적 흐름을 그대로 방임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정철
UCLA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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