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에서의 7년>과 <라다크를 만나다>
1. 어느날 신문에서 다시 만난 티벳
티벳에 유혈사태가 또 발생했다. 티벳 사람들은 300만도 안되는 작고 황폐한 제 나라의 독립과 종교의 자유를 원했고, 중국 정부은 그들의 침묵을 원했다.
9세기, 기적을 행하는 군주라 불리던 티벳의 군주 트리송 드레첸과 그의 삼촌이자 중국의 군주였던 웬후시아오테 황티가 맺은 영원한 평화의 약속, 조캉 사찰 벽에 상호신뢰와 존중을 약속하며 새긴 아름다운 그 언약의 글이 비와 바람 앞에 풍화되기도 전에 사람 손으로 깨어진 지 벌써 60여년이 다 되어간다.
이제 한갖 화장실의 낙서만도 못한 대접을 받으며 파괴되어 버려진 고찰의 두터운 벽 위에 중국어와 티벳어로 쓰여졌을 조카와 삼촌의 혈연지정과 우정은 단지 혈육 간의 불가침 협정 정도를 훌쩍 넘어서는 것이었으리라.
모르긴 몰라도 그것은, 인종과 국가와 종교와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호존중하겠다는 굳은 약속이자 인간에 대한 아름다운 예의에 가까운 것이었을 터이며, 국부의 차이에 따라 문화의 우월성을 논하고, 타자화하고 정복하는 제국주의적 사고 방식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을 게다.
종교적 지도자가 정치적 지도자 역을 겸하는 티벳의 고유한 정교일치의 정치형태는 오랜 세월, 지정학적 이유로 티벳을 제 나라의 지도 속에 편입시키고자 노심초사하던 중국 정부에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이유’가 되었고, 결국 1950년 마오의 공산군은 “티벳 인민들을 제국주의자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킨다”라는 기치 아래 보부도 당당히 티벳을 침공하게 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인구의 5분의 1에 달하는 120만이 중국 공산군에 의해 살해당했으며, 인류의 유산인 6천 여곳의 고찰은 파괴되었고, 승려들은 모진 고문과 투옥 끝에 살해되었다. 욕심과 물질주의에 찌든 서구 사회로부터 동양의 정신주의와 무소유, 자연친화적 삶을 지켜오던 티벳은 이제, 300만 정도에 이르는 진짜 티벳사람들보다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티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중국인으로 붐비는 후발 자본주의적 풍경으로 넘치는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지난 10일 또 다시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2. <티벳에서의 7년> 그리고, <라다크를 만나다>
<티벳에서의 7년>은 오스트리아 산악인 하인리히 하러의 실화 소설이자, 1997년 장 자크 아노 감독이 하러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아 제작한 필름이기도 하다.
소설은, 임신한 아내를 뒤로 하고 히말라야 최고봉 중 하나인 낭가파르밧으로 원정을 떠나는 하러의 뒷모습으로 시작한다. 1939년, 하러는 가정을 꾸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낭가파르밧을 정복하려는 오만한 명예욕으로 혼란스러운 상태다. 강인하고 냉철하지만 철저히 개인적인 하러는 임신한 아내의 반대를 무릎쓰고 결국 히말라야 행을 결정한다.
그리고 등반 중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 하산하던 하러는 동료와 함께 네팔의 영국군 포로수용소에 수감 된다. 네번의 실패 끝에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하러는 동료인 페터와 함께 티벳으로 흘러들어 티벳인들의 영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와 조우하게 되고, 이후 정치적 격동기에 처한 티벳에서 7년간 머물며 달라이 라마와의 우정을 통해 영적 성숙을 얻게 된다.
물론, 이 소설 혹은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영화가 지향하는 호의적 메세지에도 불구하고, 서양문화가 바라보는 동양문화에 대한 타자화와 제국주의적 시각이 소설과 필름 이곳저곳에 잔재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것이 자의적인 것이었든 타의적인 것이었든 하러의 친위대 이력에 비추어, 소설의 진정성 문제를 논하는 것 또한 그러하다.
이에 비해, 헬러나 노르베리호지의 <라다크를 만나다>는 <티벳에서의 7년>과는 다른 지점에 서 있다.
친환경적 생활을 연구하기 위해 찾은 라다크와 사랑에 빠져 영구거주를 결정한 독일의 환경 운동가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자신의 책 <라타크를 만나다>를 통해 인디아의 강제 합병 이후 가속화 되고 있는 경제, 문화적 침탈로 해체되어 가는 라다크의 과거 전통적 생활 양식을 21세기의 현대인이 배워야할 자연친화적 생활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노르베리호지는 이 책을 통해, 지정학적 이점으로 인해 무력으로 라다크를 접수한 이래, 볼리우드 필름과 인도식 교육, 라다크에서는 애초 개념조차 없었으며 필요성조차 전무하던 자동차와 개스, 전기, 콘크리트 건물 등, 전방위적 문화, 경제적 침탈을 통해 라다크의 전통적 가치 및 가족주의적 인간관계와 친자연주의적 생활환경을 무너뜨리고 물질주의와 배금주의를 유포하고자 하는 인디아 정부에 대항하는 라다크의 힘겨운 싸움을 잘 그리고 있다.
노르베리호지의 시선은 라타크를 관찰하는 서구인의 시선이 아니라 라다크인의 그것과 꼭 같이 움직이고 사실을 묘사한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해 <라다크를 만나다>는 <티벳에서의 7년>을 넘어서는 지점에 우뚝 서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티벳에서의 7년>이 속된 말로 남의 일 같지 않은 이유란 바로, 우리 또한 무력에 의한 일제의 침략과 무단 통치라는 뼈아픈 역사를 간직한 민족이므로, 티벳 사람들의 아픔이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일 터. 신문 한 귀퉁이를 장식한 망명한 정부와 탄압받는 티벳사람들의 소식이 더욱 가슴 아픈 이유는 아마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읇조리며 키워온 감수성과 역사가 남다르기 때문일게다.
3. 노벨상과 올림픽
달라이 라마는 198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지만, 티벳의 현실은 변한 것이 없다.
잘 안다. 노벨상이 옛날의 노벨상이 아니라는 사실, 듣기 좋은 말로 ‘상징적 운운’하는 사실쯤은 말이다. 국제 기구는 중국의 눈치만 보며 티벳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고 있으며, 많은 나라들이 달라이 라마의 방문을 놓고 중국의 심기를 불편케 할까봐 지레 전전긍긍한다.
인류의 대제전인 2008년 뻬이징 올림픽을 준비 중인 중국은 티벳으로 향하는 도로를 봉쇄했으며, 라싸에 탱크를 주둔시키고 시위자 일제 검거를 위해 가택수색을 시작했다고 한다. 티벳의 수도 라싸는 사실상 계엄령 하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인종과 문화와 정치의 경계를 넘어 인류의 대화합을 이룬다는 올림픽이 열릴 땅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올림픽 보이콧을 운운하는 것이 아니다. 올림픽이 정치의 무기가 되어서도 안되지만, 올림픽으로 인해 무엇보다 중요한 인권문제가 파묻혀서는 안된다는 것 또한 움직일 수 없는 진실임을 우리는 잘 안다.
티벳을 생각하며, 두텁게 먼지 오른 서가 한 편에서 어렵게 찾아 낸 <티벳에서의 7년>과 끝이 나달타달하게 닳은 재생용지의 <라다크를 만나다>의 장정 속 푸른 하늘이 아프도록 눈에 와 박히는 하루다.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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