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열린 LA마라톤에서 윤정수군이 역주하고 있는 모습.
“마라톤 완주했는데 공부쯤이야”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부모들이 적지 않다. 아침마다 늦잠으로 학교 지각은 다반사인데다 시험을 앞두고도 속 편하게 컴퓨터 게임에 정신이 팔려 있고 채팅으로 시간을 보내버리면서도 태연히 10시도 안된 시각에 잠에 곯아떨어져 있는 자녀를 보고 있으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는 것이다.
“한국에 있는 친척 아이들을 보면 새벽 두세 시까지 과외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주말, 휴일도 없이 공부하는데 아무리 미국에서 학교를 다닌다지만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너무 편하게 공부하는 것 같아요.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점수가 더 오를 것 같은데 도대체 ‘긴장’하는 법이 없어요.”
어지럽게 늘어져 발 디딜 틈조차 없어 보이는 방에서 세상 편하게 늘어져 자는 아이, 게으르고 나태해진 생활습관에다 시험이 내일인데도 긴장하는 듯한 모습을 찾을 수없는 풀어질대로 풀어져버린 중고생 자녀를 보고 있노라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중고생 자녀의 늘어진 생활태도를 바꿔 긴장감과 자신감을 불어 넣어줄 수 있는 묘안이 어디 없을까?
자녀에게 마라톤 도전을 권해 보자. 인간 체력의 한계에 도전한다는 마라톤을 끝끝내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완주하고 나면 분명 딴 사람처럼 달라져 있는 아이를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지난 3월2일 LA마라톤을 완주한 뒤 스스로도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고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는 한인 학생들을 만나봤다.
LA마라톤 완주의 피로감이 어느 정도 가실 무렵인 지난 11일 ‘크레센타밸리 고등학교’(Crescenta Valley High) 11학년 윤정수군과 베벌리힐스 ‘엘로데오 스쿨’(El Rodeo School)(K-8) 8학년 김정원양을 만났다.
“자신감 얻은 것이 최대 성과”
크레센타밸리 고교 11학년 윤정수군
지난해 글렌데일 통합교육구가 주최한 ‘스콜라스틱 보울’에 학교 대표팀으로 참가, 우승을 차지했던 윤정수군은 지난 해 두 번째 본 SAT에서 2,300점 가까운 좋은 점수를 받았고 학교 GPA도 4점을 넘겨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고 머리 좋은 아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집에서는 좀 사정이 다르다.
“잠이 너무 많고 게으르다는 잔소리를 매일 같이 들어요. 11학년이 됐는데도 힘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늘 엄마의 불만이죠”
윤군은 스스로도 자신이 좀 잠이 많고 게을렀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해도 잠이 많은 것 같아요. 11학년이면 6시간 정도만 자야 될 것 같은데 사실 내가 8시간 넘게 자거든요”(인터뷰를 마친 후 윤군이 자리를 뜨자 윤군의 부모는 기자에게 정수가 하루 10시간 족히 잘 거라고 귀띔.)
자신이 달라지는 계기를 만들고 싶어 마라톤에 참가했다는 윤군은 처음으로 참가한 이번 LA 마라톤에서 4시간44분49초라는 호성적을 기록했다. 윤군은 마라톤을 완주하고 나니 세상에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훨씬 더 넓어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LA마라톤을 왜 뛰기로 결심했나?
사실 지난해 가볍게 한번 해본 말이었는데 날짜가 다가오자 아빠는 ‘쉬운 게 아니다’며 말리셨는데 엄마가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참가하라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마감일 직전에야 등록했어요. 사실 좀 겁도 났거든요.
-도중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
13마일 구간을 지날 때는 정말 힘들었죠. 달려온 만큼을 더 달려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19마일 지점에서는 정말 포기하고 싶었죠. 하지만 결승점이 다가오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고 즐거운 마음이 들어요.
-완주하고 나서 뭐가 달라졌나?
‘인간의 한계라는 마라톤을 완주했는데 뭘 못하겠나’하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특출나게 잘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결심만 하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이 마라톤 완주에서 얻은 가장 큰 성과이고 성취감도 맛보았어요. 학교 친구들은 징그럽다고 하더라고요. 선생님들은 깜짝 놀라시고. 대학에 가려면 앞으로 6개월이 가장 중요한 데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결심도 생겼어요. 사실 한국 친구들 공부에 비하면 내가 너무 쉽게 공부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대학준비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당장 5월에 있을 AP시험 준비에 몰두해야 되고 6월에는 ACT에 응시해야 해요. 그리고 여름방학에는 LA시의회에서 인턴활동을 하면서 올 가을 대입원서 작성 전까지 최선을 다할 생각이에요. 물론 잠도 줄일 계획이다.(윤군은 UC버클리, 또는 유펜이나 브라운대학에 진학하고 싶다고 말했다.)
“공부벌레 아님을 보여주려 참가”
베벌리힐스‘엘로데오 스쿨’8학년 김정원양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지난해 부모와 함께 미국에 온 김정원양(사진)은 첫학기부터 전과목 A학점을 받았고 미국 온지 1년도 되지 않아 ‘사이언스 올림피아드’ 학교 대표로 뽑힐 만큼 성적이 뛰어나지만 그보다도 13세 나이답지 않은 거침없는 말솜씨가 인상적이다.
영어 때문에 지난해 고생했지만 밤잠을 줄여가며 노력해 영어 문제를 극복했고 액센트를 트집 잡아 놀리는 것에 대해 ‘입장을 바꿔보라’며 따끔하게 대꾸해 아이들을 잠잠하게 만들었을 만큼 대범한 아이. ‘다부지고 똑 부러진’이라는 표현이 너무 잘 어울리는 여학생이다.
“영어를 못한다고 말을 안하고 있으면 오히려 더 바보 취급당해요. 할 말을 분명히 하니까 아이들도 더 이상 무시하지 못하더라고요”
참가 최저 연령인 13세를 갓 지나자마자 가까스로 등록해 참가한 이번 LA마라톤에서 7시간10분 만에 결승점에 들어오며 결국 전 구간을 완주해 내 부모마저 놀라게 만들었다.
-힘든 마라톤을 왜 참가했나
지난 해 신문을 보고 LA마라톤을 알게된 후 도전하고 싶은 욕구가 마구 솟구쳤어요. 그리고 학교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죠. 내가 맨날 책상 앞에서 공부만 하고 성적에만 관심 있는 ‘널드’(Nerd)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강했어요.
-7시간 넘게 뛰면서 무슨 생각을 했나?
아빠는 8마일까지만 뛰라고 하셨고 엄마도 ‘마라톤이 장난이니’하며 만류하셨지만 결국 해냈죠. 시작하기 전엔 힘들면 걸으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정말 혼이 빠질 만큼 힘들더라고요. 결승점에서 아빠 얼굴은 보이는데 맨 끝에 계셨던 엄마 얼굴이 안 보여서 짜증까지 냈죠. 딸은 이렇게 고생해서 마라톤을 완주했는데 엄마 얼굴이 안 보이니까 서운했죠.
-마라톤 완주 후 달라진 것이 있나?
엄마가 평소에 ‘3년 각시 하루 바쁘다’는 말을 자주 하세요. 준비는 오래하는데 제대로 하지 못하고 결국 닥쳐서야 허둥댄다는 말씀이죠. 책상 앞에 있는 시간은 많은데 집중을 잘 못해서 엄마 잔소리를 듣게 되요. 마라톤 완주 후엔 내 태도가 달라진 것 같아요. 마라톤이 인생 같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앞으론 ‘3년 각시 하루 바쁘다’는 엄마 잔소리는 사절입니다.
-학교 친구들 반응은?
다음날 다리가 아파서 ‘어기적’거리며 학교에 등교해서 친구들이나 선생님들 모두 알게 됐는데 다들 마라톤에 관심이 많아져 학교에 마라톤 붐이 일고 있어요. 벌써부터 5킬로미터 단축 마라톤 참가를 신청하는 학교 친구들이 많아졌어요.
-가을엔 고등학교 진학하는데 목표나 계획이 있나?
고등학교에 대한 기대감으로 좀 설레기도 해요. 앞으로 외과의사가 되고 싶어요. 최선을 다할 거에요.
<김상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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