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쳐보기에 열광하는 사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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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훔쳐보기의 병리학
심리학자 라플란치와 폰탈리스에 의하면, 훔쳐보기는 인간의 공격성향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본능(Thanatos)인 죽음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인 자기파괴 욕망은 삶 속에서 쾌락에 대한 탐닉과 공격성향으로 변형되는데, 이때 공격성의 표현을 담당하는 신체 기관이 눈이라는 기관에 의존적일 때 ‘훔쳐보기’라는 행위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바타이유식으로 말하자면, 죽음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단절에 대한 인간적 극복의 방식 중의 하나로써 눈이라는 기관에 고착된 양상의 공격/쾌락 성향,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현대 사회의 훔쳐보기의 수위는 정상과 병리의 이편과 저편을 아슬아슬하게 오가고 있으며, 모든 종류의 훔쳐보기는 ‘관음증voyeurism’이라는 병리학적 꼬리표를 달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피핑 톰(Peeping Tom)이라고도 앙증맞은 이름으로도 명명되는 이 병리학적 명칭의 어원은 11세기 영국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코벤트리의 영주 레오프릭의 농노에 대한 수탈을 목격한 아내 고다이버는 남편에게 농노들의 세금감면을 청원하자, 영주(농노의 손을 들어주는 아내에게 배신감이라도 느낀걸가?)는 아내에게 발가벗고 말을 탄 채 마을을 한 바퀴 돌면 청을 들어주겠노라 했단다. 그리고, 착한 여자 고다이버는 이 제안을 실행에 옮기게 되었단다. 고귀하신 몸인 영주부인 고다이버의 선행에 감동한 농노들은 모두 창문에 커튼을 치고, 그녀의 발가벗은 몸을 보지않기로 약속, 실천했단다. 그렇지만 어디에나 삐닥한 놈이 한 둘은 있게 마련인 것.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양복점 직원 톰은 영주의 부인 고다이버의 나체 쑈를 혼자 감상했단다. 그리고, 이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에서 ‘피핑 톰’이라는 용어가 탄생하게 된다.
어쨋든 ‘피핑 톰’이라 불리우건 ‘관음증’이라 불리우건, 현대 사회의 훔쳐보기는 비개연적인데다 무차별적으로 그 대상을 설정하며, 대량으로 소비된다는 차원에서 더욱 조직적이고 냉혹한 자본주의적인 성향을 가질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집단 관음증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에피데믹한 위험성마저 내포한다.
5. voyeurism과 영화의 차이
세상을 들끓게 하고 있는 진관희의 동영상은 우리 사회에 만연된 훔쳐보기 즉, 관음증에 대한 열광과 도덕적 불감증을 말해주는 하나의 척도다.
나 <백양 비디오> 로 시작된 우리 사회의 훔쳐보기 시리즈는 이제 유료 훔쳐보기 싸이트의 성행으로 관음증에 대한 도덕적 감각까지 상실하는 수위에 도달해 있다. 상품화된 훔쳐보기는 소비자들로 하여금 ‘돈 내고 보는데, 뭐 어때’ 혹은 ‘영화나 훔쳐보기 싸이트나 다를게 없지 않은가’라는 자기 합리화의 원천을 제공한다.
사실, 영화보기라는 행위 또한 기본적으로 ‘관음’이라는 행위의 재현이라 할 수 있음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관객은 관음자이며, 스크린은 불켜진 방의 유리창문의 상징에 다름 아니다. 결혼 첫날밤 이편의 신랑 갑돌이 신부 갑순이를 저편의 마을사람들로부터 분리하는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 문처럼, 스크린은 관객들로 하여금 훔쳐보기 즉, 관음의 즐거움을 주는 원천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 때의 카메라 앵글은 남성관객의 대리인으로서 여배우의 육체를 응시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여성 출연자는 언제나 응시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반면, 남성 출연자는 남성 관객의 대리인으로서, 남성적 카메라 시선의 창조자가 된다. 그리하여, 영화의 즐거움 곧, 관음의 미학이 탄생한다.
필립 모이스의 <슬리버>나 김기덕의 <나쁜 남자>와 같은 필름 속에는 이러한 응시의 가학적이며 피가학적인 성격과 그것이 조합해내는 관음의 쾌락에 대한 영상적 진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영화와 관음행위가 본질적으로 다른 이유는 영화적 관음행위는 훔쳐보기의 형식적 차원을 차용한 것이며, 대상과 응시자 간의 합의 하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래서 영화보기는 가짜 관음행위이다.
이에 비해, 관음증은 형식적이라기보다 더욱 내용적인 것이며, 응시 대상과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더더욱 문제적이다. 뿐만 아니라 관음이라는 행위가 응시자로 하여금 대상을 타자화, 물화하도록 이끈다는 사실은 문제적이지 않을 수 없다. 관음 중독자들에게 있어 인간과 세상은 인격과 의미가 탈락된 단순한 관음의 오브제일 뿐이다.
6. 오양과 백양과 장양, 그리고 진씨
다시 한 번, 진 관희의 그 대단한 비디오를 생각해 본다. 한국의 오양과 백양, 그리고 수많은 이니셜로 불릴 여성들의 육체와 사생활이 단순한 관음의 대상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분노를 가장한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오양과 백양들은 곧 스크린으로부터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고 남은 스크린 속 빈 공간은 우리 도덕심에 뻥 뚫린 작은 우물처럼 공허했다.
<파이란>으로 우리에게 낮익은 중국의 장양은 지금 이혼 수속 중이란다. 영화 속에서 눈부신 나체를 드러낸 장양과 사적인 비디오 속에서 벌거벗은 장양은 결코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곧 이혼을 ‘당’할 것이라고 외신은 보도한다.
그러면, 진씨는? 그리고 오양과 백양의 비디오를 촬영하고 유통시킨 사람들과 지금도 수많은 지하철과 공중화장실과 호텔에서 도둑촬영으로 열을 올리고 잇는 사람들은 어디로 갔나? 그리고, 그 도촬에 열광하는 소비자들은 또 어디로 갓단 말인가? 그는, 그리고 그들은 단지 사과의 인터뷰를 정중히 하는 것이나, 몇 개월 큱비 신세를 지는 것으로 도의적 책임을 다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프랑소와 오종의 <스위밍 풀>을 보라. <스위밍 풀> 속에는 훔쳐보기라는 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의 한계를 잘 말해준다.
도촬 때문에 공중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는 사회, 한 여름에도 치마를 입을 수 없는 사회, 거리조차 마음대로 걸어다닐 수 없는 사회에서 관음의 대상은 불특정 다수를 의미한다. 상상해보라. 우리가 한 밤 중에 어둠 속에서 관음하는 모니터를 가득 채우는 얼굴이 목욕탕에서 때를 벅벅 밀고 있는 나의 아내이거나, 백화점 화장실에서 일을 보는 나의 딸이거나, 누나이거나, 심지어 어머니라면, 세상의 그 어떤 호러무비도 순간의 공포를 따를 수 없으리라.
옛말에 눈은 마음의 창이요, 눈이 병들면 마음도 병든다고 했다. 건강하게 살고픈 우리, 우리 눈이 병들지 않았나 살펴볼 일이다.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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