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단 포병에 철수명령
오후 4, 5시경에 군단 고문관을 통해 미 1군단장 라어언 중장이 의정부에 있는 자기 사무실에서 만나기를 원한다는 전갈을 받았다. 이유를 물어보았다. 소식통에 의하면 내가 체포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생각하였다. 쿠데타는 한국 정치문제였다. 내가 비록 미 1군단에 예속돼 있지만 국내 정치문제로 외국 지휘관의 보호를 자청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이는 어렸지만 그래도 4개 사단을 거느리는 지휘관이다. 나는 그런 이유로는 갈 수 없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약 2시간이 넘어 어둠이 덮이기 시작할 때 다시 전화가 왔다. 공무를 위해 와달라는 내용으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내 숙소에서 차로 30분 거리였다. 헬기를 보낸다 하였다. 고문단에 속한 트럭과 차량 헤드라이트로 비춰주는 연병장에서 중형 헬기에 단신 탑승하였다. 미 1군단 헬기장에는 환자용 앰뷸런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밤이라 차 밖은 보이지 아니하였다. 차는 한참 돌더니 한 사무실 앞에 도착하였다. 라이언 장군의 숙소였다. 보안을 위한 처사로 경험 있는 미군이 다르다고 생각되었다.
라이언 장군의 말로는 소식통에 의하면 오늘 저녁 내가 체포된다는 말이다. 내가 그런 이유로는 자기 방문을 거절하니 공용으로 보자고 했다고 하였다. 서울 소식과 아울러 애급의 나기부 이야기를 해주었다. 역시 미군이 군사 쿠데타의 좌경성을 우려하는 듯하였다. 그러면서 내 숙소 대신 자기 숙소에서 당분간 머물 것을 제의하였다. 나의 가족 사항을 물으며 자기네들이 보호할 수 있다는 이야기와 필요하면 나의 망명도 가능하다는 암시를 주었다. 나는 왜 나에 대해 그리 관심을 갖느냐고 물었다. 미군 지휘 하에 있는 지휘관이 체포된다는 사실은 묵과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당신은 아직도 나를 어린 사람으로 군단장 취급을 하지 않는 것 같다, 만약 당신의 군단이 2차대전 때 독일군한테 포위됐다고 가정하고 당신이 헬기를 가졌다 한다면 당신은 혼자서 군단을 버리고 탈출할 수 있겠는가 물어 보았다. 그것은 철학 문제 아니냐고 반문하고 나왔다. 아마 당신이 나를 군단장이라 생각했다면 그런 제의는 못하였을 것이다, 나의 책임 회피로 화가 부하에게 전가된다면 나는 자격 없는 지휘관이 될 것이며 혁명의 실패에 대비한 대체 세력을 위해서도 나의 피신은 온당치 않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라이언 장군은 내일이면 좀 더 사정이 확실해질 터이니 오늘 밤만이라도 지나고 가라고 권고하였다. 나에 대한 불리한 말을 들으니 나도 기분이 언짢은 일이니 오늘 저녁은 나의 잠자리를 부대 내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일러 주었다. 내가 돌아가리라 생각 못했던 보좌관들이 치웠던 헬기를 다시 동원하는데 시간이 걸렸으나 나는 다시 그날 밤 군단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라이언 장군의 처사를 보아서는 나의 포병이 쿠데타 군에 가담했다는 환경에서도 나를 의심하는 기색은 감지하지 못했다.
나는 군단으로 돌아와 홍종철 대령을 불러 미 군단장이 알려준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내가 군단장으로 있는 한 나의 지휘에 어긋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는 주의와 함께 그를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나 작전 참모의 직책은 회복시켜주지 아니하였다. 주요 참모들을 소집하여 포병의 귀환 문제를 논의하였다. 군단 정면 방위를 위해 포병의 복귀는 시급한 문제였다. 포병 단장인 문재준 대령은 강직하고 정직한 성격으로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평소에 나라 되어가는 형편에 대한 분개를 토로한 적은 있었으나 쿠데타에 관해 기미를 나에게 준 적은 없었다. 나라에 대한 개인의 생각과 상관에 대한 복종심과는 별개 문제였으리라.
부대 복귀 명령을 부군단장 박창록 준장으로 하여금 육본에 가서 중대장 이상을 소집하여 하달시켰다. 그 당시 상황 하에서 이런 명령을 쿠데타 참석 지휘관들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생명을 거는 일이었으나 묵묵히 나의 지시를 받아준 박 장군의 용기와 군인 정신에 감사하였다. 박 장군은 그 일로 후일 구속되었다가 강제 예편되었다. 군인들이 득세하는 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한 박 장군에게 나는 평생의 빚을 느끼고 있다. 나는 또 군단 전차 대대장 이성재 중령에게 허가 없는 부대의 서울 이동을 제지토록 지시하였다. 생도 육사 10기생으로 유능했던 그도 후일 5.16 세력에 의해 구속되었다가 일찍이 강제 예편되었다. 나는 라이언 장군에게 이야기한 것 같이 그날의 잠자리를 본부 중대장 이병간 대위 숙소로 옮겼다. 본부 중대장이 베풀어 준 삼엄한 경비를 받았으나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날이 밝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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