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레이건의 등장과 함께 떠오른 보수주의는 최근까지 미국 정치를 이끈 주도적 이념이었다. 1992년부터 2000년까지 민주당의 빌 클린턴이 집권하기는 했지만 그가 92년 캠페인에서 들고 나온 슬로건은 ‘신 민주당원’(New Democrat)이었다. ‘큰 정부’, 대소 유화정책 등 전통적 리버럴리즘을 신봉하던 민주당원으로서는 대통령이 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 물결은 미국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노동당 총리로 최장수 기록을 세운 토니 블레어도 이름은 노동당이었지만 정책은 대처 이념을 이어받은 보수당과 차이가 없었다. 시장주의를 신봉한 그는 골수 노동당원들로부터 ‘배신자’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18년간 보수당에게 권좌를 내준 채 방황하던 노동당의 집권을 가능케 한 일등공신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독일의 메르켈이나 프랑스의 사르코지 등장도 유럽 대륙의 보수화와 맥을 같이 한다. 오랜 저성장과 고실업의 늪에 빠져 있던 이들 나라 경제는 시장 친화적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소생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세계 정치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보수주의도 한 때 역사의 퇴물 취급을 받던 적이 있었다. 뉴딜이래 민주당 집권이 계속되면서 이념 논쟁은 리버럴리즘의 승리로 끝난 것처럼 보였다. 미국을 대표하는 지성인 라이오닐 트릴링은 1950년 “리버럴리즘은 이제 미국에서 주도적 이념일 뿐 아니라 유일한 이념이다. 보수 반동적인 사고는 사회 전반에 걸쳐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진리”라고 썼다.
그러나 그 다음해 트릴링이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예일대를 갓 졸업한 25살짜리 풋내기가 ‘예일대의 신과 인간’(God and Man at Yale)이라는 책을 쓴 것이다. 이 책에서 윌리엄 버클리 주니어는 무신론과 리버럴리즘이 판치는 예일대는 교육기관으로서의 소명을 잊어버렸다고 통렬히 비판했다.
이 책 발간과 함께 지식인 서클에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그는 1955년 아직까지 보수주의 평론지의 대표주자격인 ‘내셔널 리뷰’를 창간했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밀튼 프리드먼과 같은 시장 경제 주의자, 러셀 커크 같은 전통적인 보수주의자, 위티커 체임버스 같은 반공주의자들의 사상을 소개하고 한데 이를 묶어 보수주의 이념의 토대를 닦았다. 수많은 보수주의 논객이 그 밑에서 연필을 날카롭게 깎았다.
그의 사상은 1964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뽑힌 배리 골드워터를 통해 뚜렷이 미 정계에 모습을 드러낸다. 골드워터는 그 선거에서 참패하기는 했지만 보수주의는 공화당의 지도 이념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고 마침내 1980년 레이건의 집권과 함께 미국과 세계를 바꾸기 시작한다.
집권 내내 ‘진보적 지식인’의 조롱을 받았지만 자유 시장 정책과 ‘강한 외교’가 미국 경제의 부활과 소련의 몰락으로 나타나자 레이건의 인기와 평가는 퇴임 후 더 치솟았다. 동유럽, 러시아, 중국 등 구 공산권과 해방신학과 민족주의가 기세등등하던 브라질 등 라틴 아메리카까지 시장 경제를 추구하는 것 모두 궁극적으로는 미국 보수주의의 결실이다.
버클리는 이념 전쟁의 선봉에 서 평생을 보냈지만 정치 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가 쓴 55권의 책 중들은 스파이 소설부터 요트 세계 일주기 등 다양한 소재를 망라하고 있다. ‘보수주의의 대부’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을 ‘리버럴리즘의 원수’라고 부른 슐레진저나 갤브레이드 같은 리버럴과도 친구로 지냈다.
그는 장장 50년 동안 매주 2편씩 5,600개의 칼럼을 썼으며 33년 동안 역사상 최장 프로그램인 PBS ‘파이어링 라인’(Firing Line)의 진행자를 맡았다. 뉴욕 시장 후보, CIA 요원, 유엔 대표부 대의원 등등 보통 사람은 여러 평생 살아도 다 못할 화려한 경력을 가진 윌리엄 버클리 주니어가 지난 주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죽는 순간까지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한다.
“진정한 혁명은 총칼이 난무하는 전쟁터가 아니라 생각하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난다”는 말이 있다. 세상을 바꾼 미국 보수주의와 버클리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의 명복을 빈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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