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럴 수가…”
요즘 힐러리 클린턴 주변의 분위기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이 한마디는 민주당 경선에서 버락 오바마 보다는 힐러리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냈던 많은 한인1세들이 갖는 의문이기도 하다.
힐러리의 민주후보 당선확률 80%라는 정치 분석이 정설로 통하던 것이 5개월 전이었다. 그런데 1억달러의 자금, 700명의 스탭, 전국 곳곳에 설치된 지부, 대도시 유력인사들의 지지선언 등으로 빈틈없이 무장했던 막강 드림머신 ‘클린턴 호’가 출범 1년 남짓에 타이태닉이 되어가고 있다.
‘힐러리의 지식의 깊이, 지성의 힘, 경험의 폭은 인상적’이라는 찬사와 함께 ‘강력한 통수권자가 될 힐러리는…민주당이 백악관을 탈환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던 뉴욕타임스의 공개지지 선언이 나온 것도 불과 한 달 전이다. 그런데 지난주부터는 뉴욕타임스와 뉴스위크, 워싱턴포스트 등 진보성향의 주류언론들에 ‘힐러리 사퇴’를 공개 촉구하는 칼럼들이 줄을 잇고 있다.
무엇일까, 이런 급추락의 원인은. 지난 주 칼럼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가장 큰 요인은 힐러리 자신보다는 오바마, 오바마 바람일 것이다.
물론 힐러리 진영의 작전 실패도 여러모로 지적된다. 승리를 따 놓은 당상이라고 과신한 자만에서 비롯된 실수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과도한 개입에 더해 특히 대형주에만 매달린 채 수퍼화요일 이후 싸움다운 싸움도 하지 않고 ‘작은 주’들을 포기한 것이 결국 치명적이었다. 그동안 오바마가 거둔 것은 단순한 10연승이 아니었다.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차근차근 대의원 수를 늘려가는 한편 본선 경쟁력에 대한 신뢰도 확보해 놓은 것이다.
가장 큰 실수는 오바마에 대한 과소평가로 지적된다. 뉴욕타임스의 정치담당 아담 내고니기자는 “상대가 여느 평범한 정치가였더라면 힐러리가 벌써 승리했을 것이다…그러나 오바마는 지난 몇 달간 하루가 다르게 성숙해져온 보기 드물게 비범한 정치가다. 클린턴 진영은 오바마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범했다”고 전제한 후 ‘예상보다 훨씬 강한 후보, 예상보다 훨씬 강한 변화 욕구’라는 두 가지 요소가 오늘 힐러리의 패배를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이런 판세를 못 읽을 힐러리도 아니지만 여기서 물러날 힐러리는 더더욱 아니다. 아직은 ‘마지막 희망’으로 인정해주는 3월4일 미니 수퍼화요일이 남아있다. 힐러리가 공들여온 텍사스와 오하이오에 더해 로드 아일랜드와 버몬트 주의 경선이다.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어느 정도면 ‘승리’라 할 수 있을까. 지난 주 빌 클린턴 전대통령은 “오하이오와 텍사스에서 이기면 힐러리는 민주당 후보가 될 것이다, 지면 못된다. 여러분에게 달렸다”고 호소했다. 워싱턴포스트가 민주당 전략가들의 의견을 모아 정리한 분석은 두 가지다. 첫째, 텍사스와 오하이오에 더해 작은 주 한 개를 더 이겨야 공식적 ‘승리’로 선언할 수 있다. 둘째, 텍사스와 오하이오 양쪽에서 최소한 득표수로는 앞서야 캠페인을 계속해 4월말 필라델피아까지 갈 명분이 생긴다.
반드시 이겨야는 하는데 현재의 여론조사로 보면 두 가지 다 기대하기 쉽지 않다. 이런 절박한 힐러리의 입지는 엊그제 TV로 중계된 오하이오주 공개토론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어쩌면 자신에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공개토론에서 힐러리는 ‘투사(fighter)’의 면모를 과시하며 열심히 싸웠다. 선두주자의 여유를 잘 활용한 오바마는 더욱 ‘대통령다운 면모’로 점수를 높였지만 “여러분을 위해 싸우는 파이터”를 자처한 힐러리도 나쁘진 않았다.
물론 ‘안티 힐러리’들은 조급해진 패자의 히스테리라고 깎아내렸다. 사실 오바마만 편애하는 미디어에 대해 힐러리가 토해놓은 불평은, 설사 사실이라 해도, 별로 당당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주요이슈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사명감은 설득력이 있었고 특히 사회자의 구박을 받아가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헬스케어 논쟁도 효과적일 수 있다. 전국 시청자들에겐 지루했을지 몰라도 오하이오와 텍사스 주민에게 현재 최대이슈는 경제와 헬스케어이기 때문이다.
힐러리가 다음 주에도 패배할 경우 민주당 지도부의 기대에 맞춰 ‘품위있게 퇴장’할 것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그러나 이미 전처럼 “내가 대통령이 되면”이란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뉴스위크의 한 블로그는 ‘힐러리 구출작전’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독자들로부터 힐러리 역전을 위한 전략 아이디어를 모집했는데 말미엔 대부분 ‘그러나 너무 늦지 않았을까’가 덧붙어 있다.
힐러리 쪽에서 보면 기댈 여건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선두주자에서 언더독으로 내려선 그에게 동정표가 올 수도 있다. 게다가 오바마의 10연승 열기를 어느 정도 식힐 수 있는 2주의 휴면기를 지내고 치르는 경선이다. 뉴햄프셔에서 힐러리를 되살려낸 것은 여성표였고, 캘리포니아에서 힐러리의 손을 들어준 것은 히스패닉 표였다. 다음 주 힐러리의 생사를 가를 텍사스의 주요 표밭이 바로 여성과 히스패닉이다. 이들의 표심이 또 한번 주목받고 있다.
벼랑 끝에 선 힐러리를 당겨서 구해줄 지, 아예 밀어 추락시킬 지…앞으로 닷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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